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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생산기술의 발달과 유통체계 확대의 정치사회적 함의 -토기, 철기의 유통망 복원과 교섭양상의 규명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백제 생산기술의 발달과 유통체계 확대의 정치사회적 함의 -토기, 철기의 유통망 복원과 교섭양상의 규명 | 2003 년 | 이남규(한신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M0021
선정년도 2003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7년 05월 31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번 연구는 토기와 철기의 과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백제의 생산기술의 도달수준, 유통체계, 그리고 물류와 원거리 교역에서 보이는 정치사회적 함의를 추적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Ⅰ. 토기의 생산 및 유통

    이번의 토기 태토의 산지분석 결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다. 그 중 토기의 유통망과 관련된 몇 가지 내용만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 공급된 토기는 동일한 생산체제에 의한 것이다. 이 생산체제는 백제 중앙의 소비에 대응된 것이다.
    둘째, 중앙에 공급된 토기는 한강 상류의 미사리나 하류의 멱절산에는 공급되지 않았다. 이 곳은 각기 나름의 생산체제에 의해 토기가 유통되고 있었다.
    셋째, 탄천수계의 상류에 속하는 용인 수지에는 한성 중앙에서 사용되던 토기가 공급되었다. 이는 당시의 유통망이 직선거리보다 수계에 보다 긴밀한 관련성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경기도와 충청도 각지의 중요 유적, 즉 지방 세력의 거점에서는 각기 독자적인 토기 생산체제와 유통망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중앙에서 생산된 토기가 지방에까지 도달한 것은 아닌 셈이다.
    다섯째, 중앙과 지방에는 각기 지방과 중앙의 토기들이 이동하는 경우가 보인다. 현재의 데이터로 보는 한 그것은 고배와 삼족기, 뚜껑 등의 소형 기종의 토기가 주종을 이룬다. 취사용기는 이동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한성 백제 내부에는 그리 넓지 않은 복수의 토기 유통망이 공존하였던 셈이며 광역의 유통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Ⅱ. 철기의 생산 및 유통

    낙동강유역권과는 달리 경기 남부와 금강유역권에서는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의 유적이 별로 확인되지 않고 있고, 그에 따라 이 시기 철기문화의 계기적 발전양상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인데 비해 上記한 바와 같이 3세기 대에 일부지역에서 철제무기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 특히 주목된다. 이는 집단간 갈등과 대립이 크게 증폭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이러한 정치군사적 상황에서 당시 각 지역의 수장들에게 있어 최대의 관심사는 양적·질적으로 남들보다 우월한 수준의 강철제 무기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한 시점에서 上述한 바와 같은 炒鋼技術이 도입됨으로써 강철제 무기의 생산이 촉진될 수 있었고 당시 급증하는 수요에 큰 어려움 없이 대처해나갈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다만 그러한 강철제무기 생산과 유통의 확대양상이 전체 지역에서 齊一的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상당한 지역적 낙차가 있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Ⅲ. 토기 및 철기의 유통을 통해 본 정치사회적 의미

    백제의 왕실수공업은 마한 소국 시기부터 선진 기술을 수용하고 전문 장인들을 포섭하면서 확대된 생산기반을 토대로 하여 점진적으로 성립되었다. 구슬류의 장식품 생산이 상대적으로 일찍이 왕실수공업으로 정착했고 견직, 고급 마직의 직조 및 봉제 수공업, 흑색마연토기, 삼족기 등 특수 토기 제조업이 뒤를 따랐다. 외교, 전쟁, 대외교역 등 왕권의 고유 권한과 관련된 수공업 부문도 점차 왕실수공업으로 편제되어 가는 추세였으니, 4세기 중엽의 근초고왕대에는 외국에 봉제ㆍ단야 장인을 파견하고 鐵鋌, 寶劍 등 수공업품을 증여하기도 했다. 백제 왕실은 이 시기에 이미 다른 지역 수장과 차별화된 고급 수공업 생산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의 규모가 전보다 확대되므로 전투장비 생산 부문 등 일부 관영수공업도 분화되었다. 근초고왕대와 그 직전 시기인 4세기 초ㆍ중엽이 백제 왕실수공업이 성립한 다.
    국왕의 속료 조직은 4세기 이전부터 존립했으며 이들에 의해 왕실수공업도 관리ㆍ운영된 듯하다. 백제의 왕실수공업은 생산품별로 수공업장이 조직되었고, 박사급의 숙련 장인과 하급 장인들로 구성된 수공업자 집단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공방을 운영하는 체제로 생산이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국왕의 속료 조직이 이들 수공업장 조직을 장악했다. 이러한 생산체제를 기초로 하여 후대에 발전한 결과가 사비기의 內官 소속 수공업 관부이며, 왜국의 율령체제와 결합해서는 品部로 변형된다.
  • 영문
  • - Sociopolitical Implications of the Development of Production Technoloy and the Expansion of Material Flow System of Baekche-

    By analyzing ceramic and iron artifacts scientifically, this project aims to illuminate the nature of the production technology, meterial flow system. and the sociopolitical implication of the material distribution and long distance trade.
    The resultof this research is as follows.

    Baekche's royal handicraft was gradually formed on the basis of production foothold which was enlarged, expropriating an advanced technique and joining manufacturers specialized from Mahan. Production of trinkets like beads was early established as royal handcraft and weaving, sewing and special earthenware manufacture followed.

    Baekche's royal family, in the period of king Geunchogo(近肖古王), has higher instruments of production than chieves in other zone. As the scale of war spreaded, the part of govermental handicraft such as the production of combat equippage was branched. It is thought that Baekche's royal handcraft was formed in the early and middle parts of the 4th. century.

    The production regime can be guessed through Baksa(博士) system. Best specialist was appointed as Baksa and he commanded craftsmen. A boverment agency was established to contro; them. The bureaucracy under the kingship who had Chiness style name was guessed to be that. What developed afterwards on the basis of the system was the handicraft post belonging to Inner-bureaucracy(內官) in the period of Sabi-capital.

    This product system centraling around royal handicraft changed and new system established on the basis of national collection system in which come villages produced specific articles and paid them to the capital. This change of production system resulted in abolition of some part of royal handicraft agencies on Inner-bureaucracy organization in the period of King Mu(武王).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와 철기에 대한 종합 및 분석, 생산유적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삼고 진행되었다. 과거의 연구들이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고 분석 이후의 작업에 대한 전략적 전망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데에 비해 앞으로는 고고학적 물질자료를 자연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그 기술사적 도달점을 가늠하고 경제사적 의미(생산체제와 유통체제의 복원) 부여를 거쳐 정치사회적 의미(물류와 국가권력의 문제)를 파악하는 데주력하였다.

    본 연구의 핵심적 연구주제였던 토기 및 철기의 유통을 통해 본 정치사회적 의미를 ?렵罹만? 다음과 같다.

    백제의 왕실수공업은 마한 소국 시기부터 선진 기술을 수용하고 전문 장인들을 포섭하면서 확대된 생산기반을 토대로 하여 점진적으로 성립되었다. 구슬류의 장식품 생산이 상대적으로 일찍이 왕실수공업으로 정착했고 견직, 고급 마직의 직조 및 봉제 수공업, 흑색마연토기, 삼족기 등 특수 토기 제조업이 뒤를 따랐다. 외교, 전쟁, 대외교역 등 왕권의 고유 권한과 관련된 수공업 부문도 점차 왕실수공업으로 편제되어 가는 추세였으니, 4세기 중엽의 근초고왕대에는 외국에 봉제ㆍ단야 장인을 파견하고 鐵鋌, 寶劍 등 수공업품을 증여하기도 했다. 백제 왕실은 이 시기에 이미 다른 지역 수장과 차별화된 고급 수공업 생산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의 규모가 전보다 확대되므로 전투장비 생산 부문 등 일부 관영수공업도 분화되었다. 근초고왕대와 그 직전 시기인 4세기 초ㆍ중엽이 백제 왕실수공업이 성립한 다.
    국왕의 속료 조직은 4세기 이전부터 존립했으며 이들에 의해 왕실수공업도 관리ㆍ운영된 듯하다. 백제의 왕실수공업은 생산품별로 수공업장이 조직되었고, 박사급의 숙련 장인과 하급 장인들로 구성된 수공업자 집단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공방을 운영하는 체제로 생산이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국왕의 속료 조직이 이들 수공업장 조직을 장악했다. 이러한 생산체제를 기초로 하여 후대에 발전한 결과가 사비기의 內官 소속 수공업 관부이며, 왜국의 율령체제와 결합해서는 品部로 변형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번의 토기 태토의 산지분석 결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다. 그 중 토기의 유통망과 관련된 몇 가지 내용만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 공급된 토기는 동일한 생산체제에 의한 것이다. 이 생산체제는 백제 중앙의 소비에 대응된 것이다.
    둘째, 중앙에 공급된 토기는 한강 상류의 미사리나 하류의 멱절산에는 공급되지 않았다. 이 곳은 각기 나름의 생산체제에 의해 토기가 유통되고 있었다.
    셋째, 탄천수계의 상류에 속하는 용인 수지에는 한성 중앙에서 사용되던 토기가 공급되었다. 이는 당시의 유통망이 직선거리보다 수계에 보다 긴밀한 관련성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경기도와 충청도 각지의 중요 유적, 즉 지방 세력의 거점에서는 각기 독자적인 토기 생산체제와 유통망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중앙에서 생산된 토기가 지방에까지 도달한 것은 아닌 셈이다.
    다섯째, 중앙과 지방에는 각기 지방과 중앙의 토기들이 이동하는 경우가 보인다. 현재의 데이터로 보는 한 그것은 고배와 삼족기, 뚜껑 등의 소형 기종의 토기가 주종을 이룬다. 취사용기는 이동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한성 백제 내부에는 그리 넓지 않은 복수의 토기 유통망이 공존하였던 셈이며 광역의 유통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낙동강유역권과는 달리 경기 남부와 금강유역권에서는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의 유적이 별로 확인되지 않고 있고, 그에 따라 이 시기 철기문화의 계기적 발전양상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인데 비해 上記한 바와 같이 3세기 대에 일부지역에서 철제무기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 특히 주목된다. 이는 집단간 갈등과 대립이 크게 증폭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이러한 정치군사적 상황에서 당시 각 지역의 수장들에게 있어 최대의 관심사는 양적·질적으로 남들보다 우월한 수준의 강철제 무기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한 시점에서 上述한 바와 같은 炒鋼技術이 도입됨으로써 강철제 무기의 생산이 촉진될 수 있었고 당시 급증하는 수요에 큰 어려움 없이 대처해나갈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다만 그러한 강철제무기 생산과 유통의 확대양상이 전체 지역에서 齊一的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상당한 지역적 낙차가 있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국왕의 속료 조직은 4세기 이전부터 존립했으며 이들에 의해 왕실수공업도 관리ㆍ운영된 듯하다. 백제의 왕실수공업은 생산품별로 수공업장이 조직되었고, 박사급의 숙련 장인과 하급 장인들로 구성된 수공업자 집단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공방을 운영하는 체제로 생산이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국왕의 속료 조직이 이들 수공업장 조직을 장악했다. 이러한 생산체제를 기초로 하여 후대에 발전한 결과가 사비기의 內官 소속 수공업 관부이며, 왜국의 율령체제와 결합해서는 品部로 변형된다.
    본 연구의 최대 특징은 작업의 최종 목표를 향하여 고고학, 역사학, 자연과학이란 3개 분야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것이었다. 분석의 대상이 종합적이란 점, 자연과학적 분석에서 출발하여 경제적 유통망의 복원, 정치사회적 함의로 시각이 상승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고고학적 분석이 고고학자와 자연과학자 사이에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못하거나 어느 한측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분석고고학자, 토기분석 전문가, 철기분석 전문가, 통계고고학자를 망라한 상태에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연구전략의 구상, 외부 협력기관의 확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망라된 진정한 의미의 학제적 연구는 앞으로 본격화되어야 할 것이다.


  • 색인어
  • 토기 태토의 산지분석 ,토기의 유통망, 백제중앙, 강철제 무기, 지방세력, 중앙과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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