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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近畿地方出土 韓半島系 考古資料의 歷史的 意味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日本 近畿地方出土 韓半島系 考古資料의 歷史的 意味 | 2005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성정용(충북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30
선정년도 2005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7년 05월 31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에서는 日本 近畿地方出土 韓半島系 考古資料의 歷史的 意味를 이해하기 위해 토기와 취락 및 부뚜막시설을 중심으로 그 양상을 개관하고 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보고자 하였다.
     먼저 近畿지역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토기와 일본열도 토기와의 병행 관계를 통해 삼국시대 고분의 曆연대 설정을 시도하고, 시기별 토기의 이입 양상을 분석하여 그 교류의 주체와 변화를 살펴보았다. 近畿지역 출토 삼국시대 토기는 4세기까지 금관가야와 아라가야양식 토기가 주류를 이루다가 5세기 전반에는 신라양식 토기가 출현한다. 5세기 후반에는 대가야양식 토기가 이입되며 6세기 초를 전후하여 영산강유역산 토기가 출현한다. 이러한 이입 양상은 일본열도 중심부인 近畿지역과 교류의 시기별 주체 및 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6세기 초를 전후하여 이입된 승석문타날호는 영산강유역산으로서, 이와 같은 토기가 집중 이입되는 것은 이 지역의 독 자적인 교섭보다 그 공반 문물로 볼 때 백제와 왜 왕권과의 교섭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취락에서 보이는 壁柱건물과 부뚜막을 중심으로 백제계 이주민의 일본 기내지역 정착과정을 살펴본 결과 카와치지역에 속하는 長原유적에서는 한반도 서남부와 연결되는 方墳이 묘제로 이용되었고, 이들은 백제 중앙세력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반면 쿠즈와유적의 경우는 6세기 말 경 飛鳥寺의 축성을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白加라는 인물과 관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카토리일대의 경우는 야마토노아야히토(東漢氏)로 불린 집단과 관련되며, 이들은 6∼7세기 경 백제에서 이주해간 집단으로 추정하였다. 그밖에 오오미지역의 이주민집단은 문헌적인 증거에서 백제계임이 분명한데, 이들이 남긴 분묘에서는 소형의 이동식 부뚜막과 동곳이 출토되는 빈도가 매우 높으며 시기적으로는 6∼7세기, 지역적으로는 중앙과 가까운 곳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토카이지역에서도 벽주건물이 검출되며 주변에서 한식계토기가 출토되지만, 한식계토기는 그 형태와 제작방법에서 畿內의 전형적인 것과는 사뭇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결국 벽주건물이란 하나의 주거방식을 통하여 백제계 이주민이 5세기 이후 6, 7세기까지 간헐적으로 일본열도에 이주하였음을 확인하였으며 이들은 정착한 지역의 물질문화 환경에 영향 받아 각기 다양한 형태의 물질문화를 만들어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종래 일본열도의 초기 마구는 주로 금관가야의 정치적 변동의 결과 전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대세적 시각이었다. 그런데 兵庫縣 池尻2호분(TK 216형식단계) 등 近畿 주변 지역에서 출토된 초기 표비들이 銜과 引手를 遊環을 개재시켜 연결하는 백제 마구의 중요한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일본 열도 초기 마구문화 확산에 백제계 마구의 영향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兵庫縣 出合유적이나 豊中市 利昌西遺蹟 출토 廣口長頸壺 등 4세기말∼5세기초 무렵 금강유역에서 이입된 것으로 보이는 토기들은 당시 백제가 금강유역집단을 매개로 하여 일본열도와 교섭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5세기대에 한반도계 벽주건물이 등장하는 것과 대체로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일본열도의 고분시대 전기 전반은 삼각연신수경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이며, 후반은 거울과 석제완식류를 위신재로 활용하는 체계가 쇠퇴하고 새로이 철제무기와 무구가 주류를 점하게 된다. 전기의 후반이후에는 일본열도의 금관가야산 문물 및 대성동고분군의 畿內계 문물과 같은 고고자료와 함께 왜가 任那加羅로 퇴각하였다는 문헌사료 등에 의거하여, 任那加羅 즉 금관가야와 왜가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5세기가 되면 구주의 老師3호분 등과 같이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석실이 북부구주를 중심으로 출현하며, 5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近畿 지역에도 점차 한반도계 묘제가 확산된다. 滋賀 지역에서 한반도계의 벽주건물을 가진 취락의 주변에 횡혈계묘제가 축조되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계 석실의 출현에는 백제계 이주민들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 영문
  • This research aims to understa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Korean culture in Kinki province through reviewing archaeological remains of ceramics, harness, oven structures, and burials. The paper investigates the shift of the main trading agencies, based on the calendar years and exchange patterns of ceramics between the Three Kingdoms in Korea and the Wae in Japan. In Kinki, the ceramic styles of the Geum-Gwan Gaya and Ara Gaya were dominant during the 4th century AD. The ceramic styles of the Dae Gaya appeared in the late 5th century AD and that of the Yongsan River valley occurred in the early 6th century AD. The change of dominant ceramic types may reflect the shift of the main trading bodies and the social relations through time. Particularly, the pot of the Seongsukmun Tanal style, which was originated from the Yeongsan River valley, seems to indicate the trades between the royal families of the Baekjae and the Wae.
    This paper also explores the processes of establishing Baekjae immigrant culture in Kinki, by comparing the structures with posts along walls and the oven structure. The square-plan tomb at the Nagahara site in the Kawachi region implies that this regional culture was influenced by the southwest Korea not by the central power group in Baekjae. On the other hand, the Kuzwa site represents the tomb of 'Baekga', an officer whom the central government of the Baekjae sent to Japan in order to construct the Askara temple in Japan. The Yamatonoayahito group in the Digatori region was probably the immigrants from the Baekjae during the 6th and 7th centuries AD. The group in the Oomi region left the tombs and small, portable ovens, which were influenced from the central Bakjae culture. The Chinese 'Han' style ceramics and the Baekjae-style structures with posts along the walls were found in the Tokai region. The Han-style ceramics was different in styles and the manufacture techniques from those of the Kinai region. These archaeological data confirm that the Baekjae people immigrated to Japan from the 5th to 7th centuries AD, and that they left the assimilated culture between the Baekjae and Wae.
    The import of the harness to Japan probably occurred during the TK23 phase, as seen in the Miyayama tomb in Hyokou Prefecture. Previous studies argued that the early style of harnesses was imported from the Geum-Gwan Gaya due to its internal political changes. The style of harnesses from several tombs in Kinki, however, showed the influence from the Baekjae. They include the Okanokotou burial 1 in Kagawa Prefecture (TK23 phase), the Zhuyamashi-Ichitounishi Burial 3 in Okayama Prefecture (TK 208 phase), and the Ikejiri burial 2 in Hyokou Prefecture (TK216 phase). Both harnesses and ceramics from the Geum River valley point the influence and active exchange systems between the Baekjae and Wae. The trading between the Baekjae and Wae, connected by the group along the Geum River during the late 4th and early 5th centuries AD can be seen in the wide-mouth long-neck pottery (Gwangu-Janggyeong Ho) from the Geum River basin from the Deai site in the Hyokou Prefecture and the Nitounisi site in the Toyonaga City. During the late 5th century AD, the wide spread of the 'f' style bit and sword-style ornament in Japan indicates the import of the Baekjae culture through the Dae Gaya.
    The main prestige items during the early Kofun period was the bronze mirror of the triangle section, while the iron armory became the prestige became the major prestige items during the Late Kofun period. The Geum-Gwan Gaya and the Wae was probably in close relations, as indicated by the Geum-Gwan Gaya artifacts in Japan and the Kinai-style artifacts at the Daeseongdong tomb in Korea. The written record also described that the Imna-Gaya retreated. From the 5th century Ad, the Korean-style stone-chamber tombs appeared in northern Kyshu, and this Korean typ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삼국시대 특히 3∼6세기 무렵의 동아세아는 실로 격변과 격동의 시기로서,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던 때이다. 이 시기 중국은 魏에 의한 천하통일도 잠시뿐, 남중국에서는 東晋에서 宋齊梁陳으로 이어지는 漢人政權이, 북중국과 동북지역에서는 선비족의 前燕을 비롯한 諸민족들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와 함께 중남부지역의 백제와 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하여 삼국이 생존을 위한 치열한 각축을 하고 있었다. 일본열도 또한 大和政權이 각 지역세력들을 점차 흡수 통합하면서, 율령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을 예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동적인 시기에 한반도에서 전개된 삼국시대의 물질문화는 한반도계의 이주민과 열도의 필요성에 의해 거의 실시간으로 전래되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로부터의 물질문화 전래 과정이나 동인, 그 역사적 의미 등에 대한 종전의 연구들은 주로 3∼4세기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철기문화나 6∼7세기의 기와를 비롯한 사원건축 등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는 90년대초까지 가야고고학이 집중적인 발굴 조사 성과를 낸데 힘입은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한 지역 양상을 중심으로 일본열도의 문물을 이해하려했기 때문에, 한반도의 각국과 일본 열도 사이에 이루어진 교섭 양상이나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또 한국의 연구자들이 일본 열도에서 출토되고 있는 한반도계 자료에 대해 정확히 숙지하지 못하고 있던 점도 상호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백제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에서 다량의 자료가 발굴됨에 따라 한반도 전체와 일본열도 사이의 관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치열한 경쟁의 시기에 백제·가야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및 왜 사이에 이루어진 교섭의 양상을 보다 명확히 밝히고자 하였다. 특히 일본 열도에서도 그 핵심지역인 近畿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각종 한반도계 고고 자료를 통해, 그 교섭의 양상과 함께 역사적 의미까지 추구해 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近畿 지방에서 출토되고 있는 한반도계 고고자료를 크게 토기와 벽주건물, 부뚜막 시설 등을 중심으로 그 양상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4세기대에 백제 지역에서 개량화된 마구가 5세기 무렵 近畿 및 그 주변 지역으로 유입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이면에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처럼 백제 한성기의 중앙과 왜 왕권 사이에 긴밀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6세기 초를 전후하여 이입된 승석문타날호는 종래 가야토기로 인식되어 왔으나 영산강유역산으로 파악되며, 이와 같은 토기가 집중 이입되는 것은 이 지역의 독자적인 교섭으로 볼 수 없고 그 공반 문물로 볼 때 백제와 왜 왕권과의 교섭에 의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한편 벽주건물이란 하나의 주거방식을 통하여 백제계 이주민이 5세기 이후 6, 7세기까지 간헐적으로 일본열도에 이주하였음을 확인하였으며 이들은 정착한 지역의 물질문화 환경에 영향 받아 각기 다양한 형태의 물질문화를 만들어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일본열도 특히 근기지역에서 발견되는 한반도계 고고자료에 대한 분석 결과 종래 가야 지역과 倭 왕권 사이에 주로 교섭이 이루어졌다는 시각에서 탈피하여 백제를 포함한 한반도 세력과 왜 지역 사이에 이루어진 교섭의 양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여 볼 수 있었다. 특히 近畿지역에는 가야 뿐만 아니라 백제계 이주민이 5세기 이후 6, 7세기까지 간헐적으로 일본열도에 이주하였음을 확인하였으며. 이들은 정착한 지역의 물질문화 환경에 영향을 받아 각기 다양한 형태의 물질문화를 창조하여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또 금번 연구를 통해 한반도계 이주민들의 역사를 일본 학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한국사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조망하여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학계의 소위 도래계문화에 대한 기존의 정체된 인식을 극복하고 보다 심화된 인식, 예컨대 이들이 막연한 도래인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어느 지역에서 언제 이주해왔는지를 추구하여 볼 수 있었다. 나아가 종래 사료적 가치를 의심받던 몇몇 단편적 자료에 의지하여 전개된 불안한 상태의 한일관계사 연구에서, 물질문화 자료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및 비교를 통해 그 관계사를 구체적으로 복원하여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과거 동아세아 역사 구성원으로서 삼국과 倭 사이의 자체적인 발전과정과 역량, 상호 관계 등을 확인하여, 한일 고대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함은 물론 역사적 실상을 바탕으로 하는 바람직한 한일 古代史象을 정립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의 틀을 만듦으로써, 한일 고대사 관련 교재 등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색인어
  •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任那加羅, 신라, 영산강유역, 倭, 近畿지역, 奈良, 畿內, 북부 九州, 백제계 이주민, 토기양식, 編年, 年輪年代, 교류, 須惠器, 陶邑, 승석문타날호, 馬飼집단, 馬具, 재갈(비), 부분보강등자, 引手, 遊環, 표비, 판비, 3줄 겹쳐꼬기기법, 취락, 벽주건물, 연통, 횡혈식석실분, 동곳, 이동식 부뚜막, 무장, 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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