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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공문서 위조사건과 청조의 정보 통제정책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18세기, 공문서 위조사건과 청조의 정보 통제정책 | 2007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차혜원(연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21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01월 31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18세기 중반, 중국에서 발생한 위조 공문서의 작성, 유통사건을 문서의 내용과 형식, 유통경로를 통해 재구성했다. 1751년경 孫嘉淦이라는 저명 관료의 상소문으로 가장한 괴문서가 전국적으로 유통된 사실이 정부에 적발되었다. 위조문서의 내용은 孫嘉淦 자신이 乾隆帝의 잘못된 정치를 하나 하나 지적하는 것이었다. 당시 건륭제가 시행한 江南 巡幸과 고급 武官에 대한 가혹한 처벌 등이 대표적인 失政으로 열거되었다. 지금까지 이 사건은 청조에서 발생한 악명 높은 文字獄 사건의 하나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위조문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져 전국에 유통되었다는 점에서 문자옥에 연루된 문서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문서를 작성한 주체와 목적 역시 아직까지 불분명한 점이 많았다. 이 사건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위조문서의 내용과 함께 문서가 사회로 확산될 수 있었던 구조를 검토했다.
    충직한 관료 孫嘉淦을 일약 ‘정치영웅’으로 부상시킨 것은 정치적 정보와 참여를 갈구하던 민간 사회의 역동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관심과 사회적 유동성과 정치적 관심이야 말로 청조 체제가 대응해야 했던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적’이었다. 특히 이 사건은 작성과 내용, 전달 경로 면에서 기밀 유지를 제일 관건으로 했던 청대 공문서 전달체계의 원칙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청조 정부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국가측이 끊임없이 정보 통제를 꾀하는데 반해 정치적 정보에 대한 민간사회의 수요는 예상치 않던 방향에서 발산되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청조 행정의 효율성을 말해주던 奏摺이 여기서 위조문서의 유통 경로로 이용된 것은 정부의 정치적 폐쇄성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 영문
  • A Study on the Case of the forgery of an Official Document
    in the 18th Century China

    This study focuses on the case of the forgery of an official document in the middle 18th century, and discusses the contents and form of the document, and its network of distribution as well.
    In early 1750's, a mysterious fake draft was circulated nationwide in China. It was disguised as a petition of appeal(上奏文shangzouwen) to the Emperor, forged as authored by the name of Sun, Jiagan(孫嘉淦). This document contained many comments on every last political faults committed by the Emperor Qianlong(乾隆帝). The royal tour to south(Jiangnan District江南) and harsh treatments to high-class officials, made by the Emperor Qianlong, were typical examples of the criticism.
    Up to recent research, this case was characterized by a simple case of notorious 'Literary Inquisition(文字獄), often occurred in the Qianlong reign(1735-1795). But, there were many remaining obscurities with the document forger and his intention. Why the anonymous forger or forgers choose Sun, Jiagan Also, why this fake draft distributed such a large scale
    This case calls for more attention of historical researchers, and should be understood differently, considering two factors at least. Firstly, the document was forged intentionally, and secondly, it was circulated on nationwide scale. This paper studies contents of the document, and social environment which induced the circulation of the document in such a large scale.
    In the early modern period of China, there were strong requirements of political information among whole society. Sun, Jiagan never wanted to be a political hero, but his early reputation of 'justice and righteousness' never faded away among people. The anonymous forger wanted to express his political opinion in the name of Sun Jiagan and so many people wanted that kind of information. The fake draft was circulated almost all sphere of Ching Dynasty, by means of official document delivery system. Emperor Qianlong regarded it as a real evidence of crisis, and he tightened restriction over the whole communication system of the socie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8세기 중국사회를 특징짓던 이른바 ‘乾隆盛世’의 60년은 그 이후 체제의 급격한 몰락, 해체과정과 뚜렷이 대조되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당시 제국을 유지하던 각종 관리기능은 여러 면에서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정보와 지식의 유통과 관련된 국가의 노골적인 통제와 폐쇄적 대응이라는 점에서도 18세기는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 18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僞孫嘉淦奏稿案'이라는 전국 규모의 허위 공문서 유포사건은 관련 조사 대상자가 이천여 명에 이른 중대 사안으로 당시 체제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이 사건은 일견 견고해 보이는 18세기 중국 사회의 여러 공백과 문제점들을 보여준다. 체제에서 요구하는 충실한 ‘能吏’의 길을 가고자 했던 孫嘉淦은 ‘奉公直言’의 명성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엄청난 정치적 파란에 휩싸였다. 僞稿案이 충직한 관료 孫嘉淦을 일약 ‘정치영웅’으로 부상시킨 것은 특정 주체들이 아니라 정치적 정보와 참여를 갈구하던 민간 사회의 역동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관심과 사회적 유동성과 정치적 관심이야 말로 청조 체제가 대응해야 했던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적’이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사건은 작성과 내용, 전달 경로 면에서 기밀 유지를 제일 관건으로 했던 청대 공문서 전달체계의 원칙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체제측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국가측이 끊임없이 정보 통제를 꾀하는데 반해 정치적 정보에 대한 민간사회의 수요는 예상치 않던 방향에서 발산되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청조 행정의 효율성을 말해주던 奏摺이 여기서 위조문서의 유통 경로로 이용된 것은 정부의 정치적 폐쇄성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사회의 원심력은 청조의 통치범위가 영토와 인구 면에서 미증유의 규모로 확대되면서 점점 더 중앙의 통제능력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과제 결과와 이를 통해 기대되는 효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청대 정보전달체계 및 정치체제가 안고 있던 문제점과 한계 등이 연구를 통해 보다 명확해졌다. 청대 문서행정과 의사소통 구조는 체제의 도구라는 차원을 넘어 민간사회에서도 정치정보의 획득원으로 비상한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僞稿案이라는 대규모 정치사건은 奏摺과 軍機處 정치의 실태와 한계를 보여주는 뚜렷한 예였다. 다수의 인물들이 관련된 대사건의 처리 과정을 통해 볼 때 당시의 중국사회에서는 공문서 전달 네트워크를 통해 중앙의 정치 동향이 민간사회에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대한 기존 행정체계의 대응이 대단히 제한적인 범위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연구 과정에서 문자옥과 '乾隆禁書'에 관련된 청조의 입장 변화, 정치적 정보에 대한 민간의 수요 등 앞으로 18세기의 중국 사회를 다각적으로 조명할 자료들을 획득할 수 있었다. 본 과제에서 제기한 청대 공문서 전달체계와 정보 통제책의 문제점은 당시 청조체제의 근본적 한계를 시사한다. 현재 중국의 주요 특징인 방대한 인구 규모와 거대 행정 구역의 존재는 청대 사회가 남긴 유산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청대 행정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현재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국 사회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주요한 분석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중국사회 내부에서 나타나는 관료주의적 요소의 잔재 및 행정부재 현상은 중국 근세의 행정체제가 지닌 사회 적응도의 깊이와 그 한계를 고려함으로써 보다 심층적 분석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를 통해 나타난 공문서라는 전달 매체와 정치 정보를 둘러싼 역사적 전개과정이 '정보'와 '매체'에 관련된 역사학 분야와 문제관심을 공유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역사학에서 ‘정보’를 중심으로 한 시각이 사회와 국가의 신경계, 신경중추에 해당되는 분야이며 정보를 어떻게 취급할지가 향후 역사학의 주된 과제가 된다는 점이 선행 연구들을 통해 강조된 바 있다. 본 연구는 가능한 한 정보와 매체를 둘러싼 문화사 분야의 성과를 다양하게 이용하여 폭을 넓히고자 하며 연구의 결과가 역으로 이들 학문의 해당 분야에도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색인어
  • 주접, 손가감, 위조문서, 건륭제, 제당, 공문서, 명망, 여론, 민간사회, 진범, 심문, 군기처, 주접정치, 옹정제, 황제권, 18세기, 문자옥, 정치사건, 문인관료, 사상탄압, 정보,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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