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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후반 중화계승의식의 강화와 북학론의 형성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18세기 중후반 중화계승의식의 강화와 북학론의 형성 | 2007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허태용(성균관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1
선정년도 2007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02월 24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문화적 화이관에 입각한 중화계승의식이 강화되는 동시에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화이관의 엄격성이 부정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의 차별적인 특징을 통해서 조선만이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성립시켰다고 해도, 이미 지리적, 종족적 차원의 중화의식이 해체된 이상 청나라와 같이 다른 지역의 다른 종족들도 중화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화라는 척도 자체가 주관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중화와 이적의 구분은 자의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실제로 "우리도 중화"라고 자부하던 신유한은 청나라가 중화의 모습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보라는 조심스러운 당부의 말을 하기도 하였으니 이 역시 문화적 화이관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초래한 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듯 변화된 화이관의 형성은 무역을 통한 청나라와의 교류가 급속히 확대되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청나라에 대한 일부 긍정적인 인식의 출현으로도 이어졌고, 동시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진 명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도 연결되었다. 이미 1712년(숙종 38) 백두산 정계비 수립을 위해 사신으로 온 청나라 관리의 청렴함을 칭찬하던 중인 고시언과 역시 같은 해 연행하였던 김창업에게서 청나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의 일단이 드러났었는데, 이후 이러한 인식은 이익이 보인 명나라에 대한 부정적 인식 및 청나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그리고 명나라를 양 중에 음 정도로 평가하던 조귀명의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청나라의 번성함을 직접 목도한 연행의 경험들이 큰 영향을 주면서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명나라의 멸망은 스스로 자초한 것으로 평가되는 동시에, 청나라는 문명을 이루어낸 ‘이적 중의 중화’로 평가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북벌론에 대한 조소 어린 비난이 일부의 인물들에 의해서 강렬히 행해지고 있던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셈이다. 박지원과 박제가는 물론이지만 이복휴 같은 인물도 박지원, 박제가와 거의 같은 논리로서 북벌론의 허구성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는 「복설의」라는 논설을 통해서 북벌을 성취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첫째, 명나라가 가혹한 정치를 하였기에 도적이 많이 일어나 망한 것이니 우리가 명나라를 복구하자고 해도 천하에 호응할 자가 없을 것이다. 둘째,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월왕 구천처럼 20년을 하루같이 치밀하게 비밀리에 준비해야 하는데 우리는 조금의 일만 있어도 저들이 먼저 알 만큼 비밀 보장이 안 된다. 셋째, 경제력도 부족하고 인구도 부족하다. 넷째, 청나라의 기세는 너무 대단해서 우리같이 약한 세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당랑거철에 불과하다는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대업’을 이루고자 한다면 양반들을 군대로 편성하여서 사노들을 이끌고 종군하게 하자는 의견을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즉 그의 논리에 따르면 하천은 대의를 모르고 양반들이나 글을 알아 대의에 밝으니 충렬한 자손으로서 복수설치의 마음이 있는 자들로 별도의 영문을 만들어서 종군하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여기에 몽골과의 제휴 같은 방법을 간단히 제시한 후에 복수설치의 마음을 간직한 ‘충렬한 양반 자손’을 군대로 편성하여서 모든 준비를 20년 동안 잘 갖춘 이후에 북벌을 시도해보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는 사대부들에게 머리 깎고 호복을 입으라는 대책을 내놓은 허생)의 주장이나 20년 동안 준비한 후에 북벌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던 박제가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북벌론이 갖는 허구성에 대한 조소 어린 비난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일부 조선 지배층 인물들의 북벌론 비판과 청나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연행을 통해 접한 서구과학의 영향과 문화적 화이관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에서 초래된 또 다른 한 귀결이었던 셈인데, 이제 문화적 화이관이 극도로 변형될 경우에는 중화와 이적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지경에까지도 이를 수 있었다. 객관적인 지역이 아니라 주관적인 문화로 중화와 이적이 구분된다면 누가 ‘중화문명’을 더 순수하게 계승했는가, 그리고 ‘중화문명’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중화와 이적의 구분이 유동적으로 되며, 더 나아갈 경우 중화와 이적의 구분이 무의미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홍대용의 "華夷一也"라는 언급은 바로 이런 인식의 가장 극단적인 지점에 서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문화적 화이관의 전개와 변형에 따른 청나라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나의 배경으로 하고서, 그 위에 청나라와 청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문물을 구분하게 되면 홍양호, 성대중, 박지원, 박제가와 같이 북학론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 영문
  • Having admitted Sinocentric world order as a ordinary and desirable order for 200 years since its foundation in 1392, Joseon dynasty's ruling class felt so hard to accept that the Chinese Ming was replaced by the barbarian Jurchen Qing after 1644. So they had to explain this unprecedented situation without changing or abandon their traditional notion on Sinocentric world order. Most of them thought that the heaven and earth was turned over for a while and believed that the Chinese Ming would be restored immediately after a short chaos time. But desire of restoration of Ming dynasty could not be persisted in late of 17th century, because as times went by, possibility of restoration of Ming dynasty was gradually disappeared, and Qing regime was more stabilized. In this changed condition, Joseon dynasty's ruling class tried to find another explanation way that did not deny or abolish their traditional notion on Sinocentric world order. So they came to consider Joseon dynasty as the only proper successor of Confucian culture instead of Ming dynasty which did not exist any more. This means that Sinocentric world order which place Joseon in the center instead of Ming still exist. We can name this new changed notion as the 'Notion on Confucian-Cultural Succession'. 'Notion on Sino-Cultural Succession' gave great influence on several parts of Joseon society after late of 17th century. And even in mid of 18th century, Joseon dynasty's ruling class came to consider Joseon as Sino-Cultural itself by consolidating 'Notion on Sino-Cultural Succession', because the fact that Chinese Ming completely could not be restored became cleared. At the same time, they designed 'Confucian-Culturalism' to get rid of logical obstacle for Joseon to be a Sino-Cultural itself. In this process, Joseon dynasty's ruling class felt so great pride of their Confucian Culture. In fact, 'Bukhak(Northern learning) Thoughts' which was appeared between some ruling class elite of 18th century had same context with 'Notion on Confucian-Cultural Succession'. Bak Jega and Bak Jiwon asserted Bukhak not to make Joseon powerful and independent from sinocenric order, but to make Joseon the rightful heir of Confucian Culture, because Joseon was lack of Confucian Culture as well as technical tools in comparison with Jurchen Qing.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문화적 화이관에 입각한 중화계승의식이 강화되는 동시에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화이관의 엄격성이 부정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의 차별적인 특징을 통해서 조선만이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성립시켰다고 해도, 이미 지리적, 종족적 차원의 중화의식이 해체된 이상 청나라와 같이 다른 지역의 다른 종족들도 중화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화라는 척도 자체가 주관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중화와 이적의 구분은 자의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실제로 “우리도 중화”라고 자부하던 신유한은 청나라가 중화의 모습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보라는 조심스러운 당부의 말을 하기도 하였으니 이 역시 문화적 화이관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초래한 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듯 변화된 화이관의 형성은 무역을 통한 청나라와의 교류가 급속히 확대되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청나라에 대한 일부 긍정적인 인식의 출현으로도 이어졌고, 동시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진 명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도 연결되었다. 이미 1712년(숙종 38) 백두산 정계비 수립을 위해 사신으로 온 청나라 관리의 청렴함을 칭찬하던 중인고시언과 역시 같은 해 연행하였던 김창업에게서 청나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의 일단이 드러났었는데, 이후 이러한 인식은 이익이 보인 명나라에 대한 부정적 인식 및 청나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그리고 명나라를 양 중에 음 정도로 평가하던 조귀명의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청나라의 번성함을 직접 목도한 연행의 경험들이 큰 영향을 주면서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명나라의 멸망은 스스로 자초한 것으로 평가되는 동시에, 청나라는 문명을 이루어낸 ‘이적 중의 중화’로 평가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북벌론에 대한 조소 어린 비난이 일부의 인물들에 의해서 강렬히 행해지고 있던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셈이다. 박지원과 박제가는 물론이지만 이복휴 같은 인물도 박지원, 박제가와 거의 같은 논리로서 북벌론의 허구성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는 「복설의」라는 논설을 통해서 북벌을 성취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첫째, 명나라가 가혹한 정치를 하였기에 도적이 많이 일어나 망한 것이니 우리가 명나라를 복구하자고 해도 천하에 호응할 자가 없을 것이다. 둘째,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월왕 구천처럼 20년을 하루같이 치밀하게 비밀리에 준비해야 하는데 우리는 조금의 일만 있어도 저들이 먼저 알 만큼 비밀 보장이 안 된다. 셋째, 경제력도 부족하고 인구도 부족하다. 넷째, 청나라의 기세는 너무 대단해서 우리같이 약한 세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당랑거철에 불과하다는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대업’을 이루고자 한다면 양반들을 군대로 편성하여서 사노들을 이끌고 종군하게 하자는 의견을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즉 그의 논리에 따르면 하천은 대의를 모르고 양반들이나 글을 알아 대의에 밝으니 충렬한 자손으로서 복수설치의 마음이 있는 자들로 별도의 영문을 만들어서 종군하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여기에 몽골과의 제휴 같은 방법을 간단히 제시한 후에 복수설치의 마음을 간직한 ‘충렬한 양반 자손’을 군대로 편성하여서 모든 준비를 20년 동안 잘 갖춘 이후에 북벌을 시도해보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는 사대부들에게 머리 깎고 호복을 입으라는 대책을 내놓은 허생)의 주장이나 20년 동안 준비한 후에 북벌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던 박제가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북벌론이 갖는 허구성에 대한 조소 어린 비난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일부 조선 지배층 인물들의 북벌론 비판과 청나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연행을 통해 접한 서구과학의 영향과 문화적 화이관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에서 초래된 또 다른 한 귀결이었던 셈인데, 이제 문화적 화이관이 극도로 변형될 경우에는 중화와 이적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지경에까지도 이를 수 있었다. 객관적인 지역이 아니라 주관적인 문화로 중화와 이적이 구분된다면 누가 ‘중화문명’을 더 순수하게 계승했는가, 그리고 ‘중화문명’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중화와 이적의 구분이 유동적으로 되며, 더 나아갈 경우 중화와 이적의 구분이 무의미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홍대용의 “華夷一也”라는 언급은 바로 이런 인식의 가장 극단적인 지점에 서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문화적 화이관의 전개와 변형에 따른 청나라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나의 배경으로 하고서, 그 위에 청나라와 청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문물을 구분하게 되면 홍양호, 성대중, 박지원, 박제가와 같이 북학론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가)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이 각국의 역사 전개에 미치는 차별성을 학문적으로 접근/
    17세기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곧 이은 명청교체는 20세기 말 냉전의 종식을 연상 시킬 만큼 충격적이고 급격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기존의 華夷觀으로서는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초래하였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조선, 일본, 베트남의 경우 모두 각각의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齊)는 중국을 중화로 부르는 것에 반대하고 각국 스스로를 中으로 바라보고 四外를 夷로 바라보는 전환된 시각을 보이게 되는데 이는 청나라를 중화로 여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중국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대두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야마가 소코(山鹿素行)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中朝事實이라는 역사서를 통해 중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성을 다방면에서 논증하면서 일본을 中朝, 中華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인식들을 배경으로 古事記傳의 저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중국 유교의 도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중국 멸시관까지 드러냈고 이를 바탕으로 神道와 같은 고유한 습속을 고대부터 유지한,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이 세계의 상국이며 중심국이 되어 여타의 주변국을 복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드러냈다. 결국 일본의 경우 명의 멸망을 계기로 새로운 중화를 중국과 상관없이 독자적 문화 연원 속에서 창조해 내었던 것이다. 베트남의 경우도 일본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반면에 조선의 경우, 조선 고유의 문물로부터 독자적인 중심주의를 도출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유교)문물을 그대로 중심으로 인정한 위에서 그것을 繼承, 내지 保全이라는 이름으로 자기화하여 독점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명이 이미 망한 이후에는 천하에 오직 조선만이 중화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상을 각국 간의 역사적인 조건의 차별성을 바탕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21세기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이 각 국의 역사전개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역사적인 시사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나) 근대 한국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보다 진전된 이해 시도/
    기존의 연구를 통해서 18세기의 사상적 흐름이 20세기 한국민족주의와 일정한 관련성이 있음이 지적될 수 있었지만 조선후기의 사상적 흐름을 배태한 현실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속에서 그 의미를 살펴본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시각에서 현재의 인식과 비슷하게 보이는 과거 인식을 발굴한 후 현재와 바로 연결시켜버림으로써 추상적인 역사인식을 그것이 딛고 있던 구체적인 현실과 일부 괴리시켰을 뿐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인식의 전달과정을 단순화한 측면이 있었다. 게다가 19세기라는 중간지대에 관한 고려가 충분하지 못하였기에 한국 민족주의는 19세기를 뛰어넘어서 18세기와 바로 연결 되는 듯한 인상마저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17, 18세기의 사상적 흐름과 역사인식을 근대 민족주의의 전사로서 보는 시각을 탈피하여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시각으로 재해석할 경우 한국의 민족주의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

    다) 19세기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정립/
    기존의 한국사 연구에서 19세기의 역사는 이전 시기인 17, 18세기에 비해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실 발전적인 사관에 기반한다면 20세기 직전인 19세기의 역사 연구를 통해서 18세기 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자본주의, 민족주의의 가능성이 활발하게 발굴되어야 함에도 오히려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른바 ‘세도정치’라는 정치적인 반동 요인으로 인해서 이전의 가능성 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설명으로 이 시기를 정리하려고 하지만 궁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훨씬 많은 사료를 남기고 있는 19세기 역사에 관한 이러한 기존 관념은 19세기를 18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끼어버린 시기로 격하해버리면서 19세기 역사의 정당한 위치와 의미를 찾아주지 못한 인상이 강하다. 따라서 20세기를 향한 직선적 발전시각에서 벗어나 17, 18세기의 조선이 처해있던 역사적인 상황과 19세기의 조선이 처해있던 역사적인 조건의 차이를 감안하여 그 시대 속에서 공시적으로 다시 살피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렇게 되면 19세기의 역사가 어떤 과제와 문제의식 속에서 전개되었는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나아가 근대 한국사가 17, 18세기의 유산 위에서만 수립된 것이 아니라 19세기에의 유산 역시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중화계승의식, 중화회복의식, 문화적 화이론, 북학론, 민족주의,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홍양호, 성대중, 이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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