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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古都)의 근대 : 식민지 시기 평양 부여 경주의 문학적 표상에 관한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고도& #40;古都& #41;의 근대 : 식민지 시기 평양 부여 경주의 문학적 표상에 관한 연구 | 2008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황종연(동국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104
선정년도 2008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9년 12월 24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9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고도인 세 도시, 즉 평양, 부여, 경주라는 장소가 일본의 문화적 헤게모니 하에서 어떻게 새롭게 이해되고 구획되고 재현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식민지시기를 통틀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고도의 근대적 표상 만들기 작업은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선택되고, 발명된 과거로서 전통의 창출과정을 증명하는 한 유력한 예이다. 식민지시기에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만들어낸 각각의 고도 표상은 주체구성을 둘러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경쟁의 일환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따라서 고도의 근대적 표상은 제국/식민지주의의 헤게모니를 배경으로 역사-지리-권력의 상호관계에서 역동적으로 산출되는 근대적 주체 구성의 복잡한 맥락을 분석할 수 있는 핵심적인 코드이다. 그 코드를 이해하는 것은 과거의 찬란한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고도가 근대에 새로운 장소로 재편되는 과정을 각종 지리지, 여행기, 관광안내서, 문학텍스트 등을 통해 알아보는 작업을 통해 가능하다. 본 연구는 고대를 소환하여 재현하는 동기 및 방식과 관련하여 고도의 역사적 인식과 문학적 표상을 고찰하는 데 주력하였다. 식민지시기에 걸쳐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고대왕국은 근대조선의 역사적 기원이자 민족적 정체성의 출처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표상되었다. 이들 고대 왕경(王京)의 표상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민족 구성원 사이에 공유되었고, 그 속에 존재하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차이들을 넘어서는 민족적 공통성의 기표로 작동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도의 근대적 표상 사례들을 추출하고 분석하는 작업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경주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는 일본 식민지 지배와 함께 결정적 변화를 맞는다. 세키노 다다시가 제출한 「조선건축조사보고」중의 경주 관련 항목은 특히 건축, 미술, 공예라는 측면에서 신라시대의 유물을 기술함으로써 신라예술이라는 관념이 가능함을 시사하고 아울러 그것과 동시대 중국 및 일본의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경주의 신라 유물에 관한 세키노의 보고는 그 장소를 동양미술의 전당으로 표상하는 관행에 기초를 놓았다. 일본인 식민지주의자들은 신라를 가지고 마치 그들의 통제 하에 있는 당대 조선의 전형상처럼 취급했다.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그곳은 있는 그대로의 경주라기보다 제국 일본의 정치적, 미적 관심에 따라 개발되고 해석되고 표상된 경주였다.
    근대 이후 평양은 국민국가, 동아시아 지역주의, 세계 질서 등 지정학적 세계 체제 변동 과정 속에서 그 위상을 달리해왔다. 평양은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 사이에서 그곳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주체의 위치, 관점, 욕망 등에 따라 고정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면서 ‘평양임’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이효석의 「은은한 빛」은 근대 초기부터 제국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인에 의해 고도, 전적지, 색향 등으로 표상되었던 평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평양 토포필리아를 갖고 있는 식민/피식민 정주자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 조선문화의 지정학적 위상을 새롭게 주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의 지방이자 제국 일본의 지방이라는 이중적 위계화가 중첩된 공간에 대한 인식과 표상 체계를 추인하는 듯하면서도 동일한 문법으로 그러한 인식과 표상 체계를 해체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부여는 백제 멸망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망각된 고도였다. 부여라는 도시에 대한 근대적 이미지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부역고적보존회가 재단법인화된 1929년을 전후한 상황이었다. 부여는 이제 경주나 평양에 맞서는 유서깊은 고도로 다시금 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내선융화’라는 당대의 시책조차도 넘어서 조선과 일본을 지극히 깊은 관련으로 맺어주는 장소로서 부여의 정체성을 다시금 만들어내는 것이다. 1939년 3월 총독부가 부여신궁 건립계획을 발표하면서 부여는 신도(神都)로 새롭게 탄생한다.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부여를 새롭게 만드는 이 도시계획은 천 년이 넘도록 퇴락한 채 먼 옛날의 부귀영화만을 추억하고 있는 고도 부여가 소생하는 순간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그것은 일본 본토에도 단 하나밖에 없는 ‘신도’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영문
  • Since the modern age, Pyongyang(平壤) has varied with its topology amid a process of change of a geopolitical world system such as a national country, regionalism of the East Asia, world order and others. Pyongyang wasn't fixed according to a position, a viewpoint, desire and others of a subject viewing and recognizing the place between imperial Japan and colonial Joseon and became to be made as "being Pyongyang". The 'Elegant light' of Lee, Hyo-seok is centered on the space called Pyongyang that was recognized and represented in familiar ways such as an ancient city, a battlefield and a hometown of gisaengs, etc. by imperial Japanese and colonial Korean since the early modern age and was making geopolitical topology of Joseon culture at the time through voice of colonial settlers having Pyongyang Topophilia. It seems to confirm a recognition and representation system on the space that dual hierachization such as a country of colonial Joseon as well as a country of imperial Japan is duplicated, and also had a possibility to dismantle such recognition and representation system with the same grammar. The Joseon, Joseon culture and Joseon literature in the latter half period of a colony always had a critical point that doesn't converge to Japan, Japan culture and Japan literature. The narrative of the ‘Elegant light’ of Lee, Hyo-seok suggests 'constitution' and 'climate' based on the individuality and originality of Joseon culture amid a behavior of a figure having Pyongyang Topophilia, and showed desire of a colonial Joseon intellectual who tries to newly reorganize the topology of Joseon in the world and Joseon in the East Asia in a geopolitical culture viewpoint.
    Buyeo was an ancient city that had been forgotten for a long time since a fall of Baekje. The image in Baekje and Buyeo, which are seen here and there until the 1920s, is the one in the declined ancient kingdom and is being automated to be indicated sentiment of remorse on one scene in the fallen history. What the modern image on a city called Buyeo started to be produced was a situation before and after 1929. Its important chance can be taken what Buyeo Ancient-family Preservation Association, which was established in 1915, was changed into a foundation in 1929. The introduction on Buyeo, which is observed in newspaper articles or travel sketches since then, is delivering intention of re-discovering Buyeo as a city equivalent to Gyeongju or Pyeongyang. Buyeo is being illuminated again as a historically ancient city of standing now against Gyeongju or Pyeongyang. As a place that makes Joseon and Japan have the extremely deep relationship beyond even the contemporary policy called 'Naeseonyunghwa內鮮融和-Japan and Joseon need to be reconciled).' it is what again makes identity of Buyeo. It is what newly casts a symbol of Buyeo through recognizing that it is difficult to be imagined except a place called Buyeo if there had been relationship something significant in history of both countries.
    As the government-general announces a plan for establishing Buyeo Shindo Shrine(扶餘神宮) in March of 1939, a situation comes to be varied completely. Buyeo, which was newly born as Shindo City(神都), is re-illuminated as a city that has brilliantly cultural heritage in the past, not a small town anymore where was forgotten. This urban plan, which newly makes Buyeo for intellects in the colonial times, implied the moment of being revived ancient-city Buyeo, which is recalled just wealth and prosperity in distant old days with being decayed for over 1000 years. At the same time, it also signified that the qualification of 'Shindo City(神都),' which there is just one even in the mainland Japan, is given to a regional city of Joseo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경주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는 일본 식민지 지배와 함께 결정적 변화를 맞는다. 세키노 다다시가 제출한 「조선건축조사보고」중의 경주 관련 항목은 특히 건축, 미술, 공예라는 측면에서 신라시대의 유물을 기술함으로써 신라예술이라는 관념이 가능함을 시사하고 아울러 그것과 동시대 중국 및 일본의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경주의 신라 유물에 관한 세키노의 보고는 그 장소를 동양미술의 전당으로 표상하는 관행에 기초를 놓았다. 일본인 식민지주의자들은 신라를 가지고 마치 그들의 통제 하에 있는 당대 조선의 전형상처럼 취급했다.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그곳은 있는 그대로의 경주라기보다 제국 일본의 정치적, 미적 관심에 따라 개발되고 해석되고 표상된 경주였다.
    현진건의 「고도 순례-경주」에서 경주의 고적을 대하는 태도는 낭만적 예술가가 고대의 잔해를 접하는 태도에 근접해 있다. 그의 몽상과 동경 속에서 경주는 인간의 정열이 예술적으로 승화됨으로써 생겨난 세속 너머의 어떤 세계의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신라의 유물이라는 “시체”를 밟고 과연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것은 물론 자주국민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린 당대 조선민족의 정치적, 문화적 갱생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다.
    반면 이태준의 「석양」에서 경주는 민족과 문화에 있어서 순일하다기보다 혼합적인 고대조선의 표지가 된다. 이태준은 미학상의 동양주의자답게 경주를 인도, 중국, 일본, 조선을 포괄하는 상상의 동양 속의 한 공간으로 정치(定置)한다. 또한 「석양」은 동양적인 것의 신생이라는 비전의 일단을 내보이고 있다. 이태준이 경주의 풍경과 애욕의 초월을 겹쳐 상상하고 있을 무렵 동양 또는 아시아는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군사적 모험을 정당화하는 이념이었다. 이태준의 동양주의는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적 헤게모니의 갱신에 복무한 아시아의 이념과 은밀하게 타협하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근대 이후 평양은 국민국가, 동아시아 지역주의, 세계 질서 등 지정학적 세계 체제 변동 과정 속에서 그 위상을 달리해왔다. 평양은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 사이에서 그곳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주체의 위치, 관점, 욕망 등에 따라 고정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면서 ‘평양임’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이효석의 「은은한 빛」은 근대 초기부터 제국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인에 의해 고도, 전적지, 색향 등으로 표상되었던 평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평양 토포필리아를 갖고 있는 식민/피식민 정주자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 조선문화의 지정학적 위상을 새롭게 주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의 지방이자 제국 일본의 지방이라는 이중적 위계화가 중첩된 공간에 대한 인식과 표상 체계를 추인하는 듯하면서도 동일한 문법으로 그러한 인식과 표상 체계를 해체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효석의 「은은한 빛」의 서사는 평양 토포필리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의 행위 속에서 조선문화의 개별성, 독창성의 근거로 ‘체질’과 ‘풍토’를 제시하면서 세계 속의 조선, 동아시아 속의 조선의 위상을 문화지정학적으로 새롭게 재편하고자 하는 식민지 조선 지식인의 욕망을 보여주었다.
    부여는 백제 멸망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망각된 고도(古都)였다. 부여라는 도시에 대한 근대적 이미지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부역고적보존회가 재단법인화된 1929년을 전후한 상황이었다. 이후로 신문기사나 기행문에서 엿보이는 부여에 대한 소개는 경주나 평양에 필적하는 도시로 부여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의도를 전하고 있다. 부여는 이제 경주나 평양에 맞서는 유서깊은 고도로 다시금 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내선융화’라는 당대의 시책조차도 넘어서 조선과 일본을 지극히 깊은 관련으로 맺어주는 장소로서 부여의 정체성을 다시금 만들어내는 것이다.
    1939년 3월 총독부가 부여신궁 건립계획을 발표하면서 부여는 신도(神都)로 새롭게 탄생한다.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부여를 새롭게 만드는 이 도시계획은 천 년이 넘도록 퇴락한 채 먼 옛날의 부귀영화만을 추억하고 있는 고도 부여가 소생하는 순간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그것은 일본 본토에도 단 하나밖에 없는 ‘신도’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부여를 내선일체의 영지이자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내선의 ‘피’의 친연성을 증명하는 장소로서의 신도로 건설하고자 했던 1940년대 초반의 움직임에 부응하는 작품으로 김동인의 장편역사소설 󰡔백마강󰡕을 들 수 있다. 민족의 비애를 불러일으키는 몰락한 고대왕국의 이미지와 일본과의 혈통적 친연성의 증거가 되는 고대국가의 이름 사이에서 백제라는 표상은 부유하고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조선이라는 공간은 일본제국주의 하에서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조선의 영토에 대한 지배를 확립한 일본인들은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익에 맞는 새로운 공간을 그 영토 위에 만들어냈다. 그래서 조선은 지리상의 독자적인 실재가 아니라 일본제국의 한 변방 지역이라는 위상을 가지게 되었고 경성을 비롯한 일본인 정착민 지구를 중심으로 식민지적 공간의 급속한 팽창을 보았다. 일본인의 이주 촉진, 철도, 항만, 도로 등 교통망의 신설, 통감부시기 이래의 구관조사와 고적조사, 1912년부터 조선 전역에 걸쳐 이루어진 토지조사, 1914년의 12부 24면의 행정구역 창설 등과 같은 일련의 관제사업이 추진된 결과, 조선은 종래에 그것이 가지고 있던 편제와 형세, 이미지와 연상물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으며 식민지 통치의 목적에 맞게 측정, 통제, 표상이 가능한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재공간화는 과거에는 조선에 존재한 적이 없는 새로운 장소와 구역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유서 깊은 장소에 새로운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일본인에 의한 고도의 재편과 표상은 조선인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그 역사적 장소에서 자기인식과 자기개조를 위한 새로운 상징을 찾고자 하는 시도를 조선인에게 가능하게 만든 동시에 그 성질과 판도를 제약한 조건이었다.
    식민지시기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주로 역사와 시간을 중심축으로 해서 진행되어왔다. 문학사 기술이나 역사 서술에 나타난 시기 구분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식민지시기를 역사와 시간을 축으로 해서 바라보는 거시적인 관점은 식민지시기 이후 한국 근대성의 형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갖는다. 현재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식민지시기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 식민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전통과 문화가 식민지시기에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었으며, 그 속에서 근대문화의 중층성이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해명하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한다. 본 연구가 주목한 평양, 부여, 경주 등 고도에 대한 문화지리학적 분석은 식민지시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식민성을 극복하는 데 일조하였다고 자평한다.
    현재 ‘한국적인 곳’으로 간주되는 공간은 식민지시기 새롭게 발명되고 창안된 것들이다. 그것은 과거의 유산이면서 동시에 근대인에 의해 새롭게 발견되고 명명된 곳으로 식민지시기 이후 한국인의 공간감각을 형성하고 장소감을 자아내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식민지시기 한국적인 공간과 장소가 만들어진 메커니즘을 파악한다면,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해 현재의 한국인의 모습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한국 사회의 진정한 탈식민성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본 연구는 한국문학, 일본학 등 관련 연구 분과의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본 연구를 최초에 수행한 전임연구인력은 주목할만한 연구 업적을 쌓으면서 관련 연구소의 전임연구원이 되었고, 그에 이어 전임연구인력직을 인계한 연구자도 한국문학 연구의 현장에서 괄목할 만한 연구를 수행해 나갈 인력으로 본 과제를 수행해나가면서 자신의 학문 분과의 주제를 더욱 심화․확대하였다. 그리고 본 연구팀에 참여하는 박사과정 연구보조원들은 이 연구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이미 한 편 이상의 논문을 작성하였거나 작성중이다.
    문화지리학적 연구방법론의 검토와 수용을 통해 전임연구인력 이하 연구보조원, 대학원생들은 한국문학과 일본학이라는 개별 분과적 학문 영역을 넘어 새로운 연구 방법과 내용을 각 분과 학문 영역에 제시하였다.
    본 연구의 가장 큰 특징은 ‘고도’라는 공간에 대한 공간표상학과 문화지리학의 연구방법론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다. 따라서 한국문학의 개별 분과의 폐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 교육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학제로서의 교과과정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최근 문화연구 분야 및 문화학이 인문학 분야의 새로운 학제로 부상함에 따라 공간표상학과 문화지리학의 연구방법과 연구내용은 이들 학문 영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이와 같은 연구방법론이 한국문학과 일본학, 그리고 문화학 분야에서만 새로운 교과목의 개발이나 교과과정의 개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본 연구가 주목하고 있는 ‘표상’과 ‘지리학’이라는 키워드는 인문학 전반에 새로운 학문적 패러다임을 생산하는 데 있어 유용한 관점일 뿐만 아니라 미술, 영상미디어 등의 예술 분야의 교과과정의 개편과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 색인어
  • 고도, 평양, 부여, 경주, 공간, 장소, 시간, 근대성, 민족, 국민, 국민국가, 민족주의, 토착, 제국, 제국주의, 식민주의, 탈식민주의, 교통, 지리, 문화지리학, 심상지리, 지도, 지방지, 민족지, 역사, 도시, 영토, 향토, 지역주의 지방성, 자연, 관광, 순례, 기행문, 정체성, 혼종성, 문명개화, 교육, 주체, 타자, 근대문학, 모더니즘, 욕망, 환상, 재현/표상,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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