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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혁명기 잉글랜드와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교류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잉글랜드 혁명기 잉글랜드와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교류 | 2010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김중락(경북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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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61
선정년도 2010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1년 10월 24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1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640년대 뉴잉글랜드 사회 역시 잉글랜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으로 분열된 사회였고, 청교도의 종교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것처럼 뉴잉글랜드 사회도 각 식민지별로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 본 연구가 발견한 것은 대서양 양편의 청교도들의 교류는 이러한 다양한 청교도들이 참여하게 됨에 따라 분열적 성격이 반영되었다는 사실이다.
    뉴잉글랜드에서 대안을 찾고자 한 청교도들에게 이러한 잉글랜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땅이었다. 당시 이주자들의 문헌에 잉글랜드는 ‘테러’의 땅이었고, 그들의 이주는 ‘청교도 헤지라(hegira)’였다. 식민지의 공식적 기구의 문헌은 잉글랜드에 대한 노골적 비난 용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이는 여전히 식민지의 위상이 불안전했고, 본국 정부의 통제아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식민지의 긍정적인 모습을 부각시켜 상대적으로 잉글랜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뉴잉글랜드 이주자들의 표현속에는 잉글랜드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 적지 않다. 이것은 그들이 여전히 잉글랜드의 사법적 통치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폴리머스 식민지의 지도자였던 윌리엄 브레드포드(William Bradford)는 잉글랜드를 ‘이집트’로 비유했고, 그들 자신들의 이주를 구약성서의 출애급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청교도인 리차드 마드(Richard Mather)는 1633년 설교제재를 받고 뉴잉글랜드로 이주했으며, 이를 두고 그의 아들 잉크리스 마더(Increase Mather)는 잉글랜드를 ‘두려운 폐허’라고 표현되기도 하였다. 일부 과격한 이들은‘재앙의 잉글랜드’또는 ‘타락한 교회’가 있는 곳으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뉴잉글랜드에 대한 인식은 초기 이주자들의 보고에서 기인하였다. 초기 이주자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라졌다. 이러한 대조적인 보고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다양성과 강조점에 대한 차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뉴잉글랜드에 대한 보고는 크게 네 종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먼저 살기 좋은 환경과 경건한 사회라는 보고이다. 두 번째로는 환경은 살기에 좋지만 청교도적 실험은 실패라는 시각이고, 세 번째는 환경은 어려운 곳이나 경건한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견디어 내야 한다는 시각이다. 마지막으로는 환경도 정착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종교적인 경건한 사회도 실패했다는 시각이다. 이처럼 다양한 보고는 본국 청교도들에게 그대로 반영된 듯하다.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을 때 식민지 지도자들은 매우 난감한 입장에 처하였다. 당연히 식민지들은 각자 그들이 선호하는 편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가 본국의 내전에서 왕당파와 의회파 가운데 어느 쪽이든 공개적으로 가담하는 것은 큰 위험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식민지 지도자들은 매우 신중하게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본국의 상황을 묘사하는 용어로서 "큰 시련", "슬픈 상황", "위험한 시기" 등의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처음부터 의회편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들은 행정, 입법 등 모든 면에서 공공연히 의회편을 들었으나 잉글랜드 의회가 요구하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프로비던스 식민지의 경우는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의회편에 적극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들은 가장 작은 식민지로서 잉글랜드 의회편에 속함으로서 그들의 위치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일부 청교도 지도자들은 장기의회의 교회 개혁 프로그램을 그들과 함께 순순한 교회를 만드는 거대한 프로젝터의 일환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들은 잉글랜드로 돌아가 설교단과 군대에서 지위를 가졌다. 당시 하바드 대학의 첫 졸업생들이 대부분 잉글랜드로 역이주하여 내전에서 의회편에 가담한 것도 이러한 현상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은 내전 초기부터 의회의 승리를 위해 자주 감사와 금식예배를 드렸다.
    1640년대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뉴잉글랜드의 교회는 중요한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뉴잉글랜드의 급진뉴잉글랜드의 급진적인 청교도들은 잉글랜드의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잉글랜드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정로교도들과의 분열을 초해하기도 하였다. 뉴잉글랜드의 교회 모델은 잉글랜드의 한 모델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열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 영문
  • New England in 1640s was a divided society in religion as much as Old England. They were dominantly puritans, but the spectrum of puritanism was wide enough. The transaction of the puritans from both sides of the Atlantic was to reflect this situation. The Puritan immigrants to New England regarded their home land as a place of no hope. The terms used to indicate England in their writings were such as the land of terrors, Egypt, and a corrupted place, and their immigration ro New England was an 'Exodus' and 'Hegira'. The perception of New England by the puritans of Old England was maninly formed from the reports of the immigrants. Various reports influenced those who were preparing the immigration. Many dropped the plan by the negative reports. The sudden fall in the number of immigration in 1640s may be explained by this. When the civil war broke in England in 1642, the puritan leaders felt that an affiliation to one side would be dangerous for the new plantations. Whereas they supported the parliamentarians in practice, they officially kept neutrality. In individual level many puritan regarded the civil war as an opportunity to accomplish a pure reformed church in the English Atlantic world. They joined in the pulpits and army. Vast majority, however, expressed verbal supports. Some of them had a vision of their model of church planted in England. However, this played a divisive role in the puritan circle of the English Atlantic world, a division not only between the both sides of the Atlantic, but also between themselv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의 목표는 잉글랜드 혁명기에 잉글랜드와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1630년대는 '대이주'의 시기라 불릴 만큼 잉글랜드인들의 뉴잉글랜드로의 이주가 많았던 시기였다. 이주자의 절대 다수는 청교도였으며, 그들의 이주 동기는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청교도의 대이주는 1640년 초에 갑자기 중지되었다. 그것은 내전이 이주의 조건을 어렵게 만들었다기보다는 내전이 청교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초기 이주자들의 문헌에 잉글랜드는 ‘테러’의 땅이었고, 그들의 이주는 ‘청교도 헤지라(hegira)’였다. 식민지의 공식적 기구의 문헌은 잉글랜드에 대한 노골적 비난 용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이는 여전히 식민지의 위상이 불안전했고, 본국 정부의 통제아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식민지의 긍정적인 모습을 부각시켜 상대적으로 잉글랜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초기 이주자들의 식민지에 대한 반응은 극명하게 갈라졌다. 일부는 뉴잉글랜드가 소문과는 달리 정착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시각을 보내왔고, 다른 일부는 여전히 뉴잉글랜드가 가능성이 있는 땅이라는 보고였다. 뉴잉글랜드에 대한 보고는 크게 네 종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먼저 살기 좋은 환경과 경건한 사회라는 보고이다. 두 번째로는 환경은 좋지만 청교도적 실험은 실패라는 시각이고, 세 번째는 환경은 어려운 곳이나 경건한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견디어 내야 한다는 시각이다. 마지막으로는 환경도 정착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종교적인 경건사회도 실패했다는 시각이다. 청교도 성향의 이주자들이 많이 모인 뉴잉글랜드의 성향은 분명히 의회 편이었다. 그러나 식민지가 본국의 내전에서 왕당파와 의회파 가운데 어느 쪽이든 공개적으로 가담하는 것은 큰 위험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키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의회편에 가담하였다. 개인적 노력 역시 순수한 교회건설이라는 차원에서 의회에 정신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의 교회모델은 잉글랜드 교회개혁의 중요한 모델로서 인식되기도 하였지만 청교도간의 분열적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올드 잉글랜드에 대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인식
    뉴잉글랜드에서 대안을 찾고자 한 청교도들에게 이러한 잉글랜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땅이었다. 당시 이주자들의 문헌에 잉글랜드는 ‘테러’의 땅이었고, 그들의 이주는 ‘청교도 헤지라(hegira)’였다. 뉴잉글랜드 이주자들의 표현속에는 잉글랜드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 적지 않다. 그들은 잉글랜드를 ‘이집트’로 비유했고, 그들 자신들의 이주를 구약성서의 출애급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또는 잉글랜드를 ‘두려운 폐허’라고 표현되기도 하였다. 일부 과격한 이들은‘재앙의 잉글랜드’또는 ‘타락한 교회’가 있는 곳으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2) 뉴잉글랜드 이주에 대한 올드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인식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뉴잉글랜드에 대한 인식은 초기 이주자들의 보고에서 기인하였다. 초기 이주자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라졌다. 이러한 대조적인 보고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다양성과 강조점에 대한 차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뉴잉글랜드에 대한 보고는 크게 네 종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먼저 살기 좋은 환경과 경건한 사회라는 보고이다. 두 번째로는 환경은 살기에 좋지만 청교도적 실험은 실패라는 시각이고, 세 번째는 환경은 어려운 곳이나 경건한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견디어 내야 한다는 시각이다. 마지막으로는 환경도 정착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종교적인 경건한 사회도 실패했다는 시각이다. 이처럼 다양한 보고는 본국 청교도들에게 그대로 반영된 듯하다.
    (3) 잉글랜드 내전에 대한 뉴잉글랜드 식민지 정부의 공식적 대응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을 때 식민지 지도자들은 매우 난감한 입장에 처하였다. 당연히 식민지들은 각자 그들이 선호하는 편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가 본국의 내전에서 왕당파와 의회파 가운데 어느 쪽이든 공개적으로 가담하는 것은 큰 위험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식민지 지도자들은 매우 신중하게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본국의 상황을 묘사하는 용어로서 "큰 시련", "슬픈 상황", "위험한 시기" 등의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처음부터 의회편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들은 행정, 입법 등 모든 면에서 공공연히 의회편을 들었으나 잉글랜드 의회가 요구하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프로비던스 식민지의 경우는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의회편에 적극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들은 가장 작은 식민지로서 잉글랜드 의회편에 속함으로서 그들의 위치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4) 잉글랜드 내전에서 뉴잉글랜드 개인적 청교도들의 역할
    일부 청교도 지도자들은 장기의회의 교회 개혁 프로그램을 그들과 함께 순순한 교회를 만드는 거대한 프로젝터의 일환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들은 잉글랜드로 돌아가 설교단과 군대에서 지위를 가졌다. 당시 하바드 대학의 첫 졸업생들이 대부분 잉글랜드로 역이주하여 내전에서 의회편에 가담한 것도 이러한 현상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은 내전 초기부터 의회의 승리를 위해 자주 감사와 금식예배를 드렸다.
    1640년대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뉴잉글랜드의 교회는 중요한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뉴잉글랜드의 급진적인 청교도들은 잉글랜드의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잉글랜드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정로교도들과의 분열을 초해하기도 하였다. 뉴잉글랜드의 교회 모델은 잉글랜드의 한 모델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열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연구결과 활용계획
    본 연구는 순수 역사학적 연구이므로 이는 연구논문으로 출판하고자 한다. 이 노문은 역사학 관련 학술지에 게재할 것이며 출판된 논문은 역사학 전공의 학생들과 연구자들 그리고 교회사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 논문은 많은 원사료를 제시하고 있어 이후의 연구자들에게좋은 기초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잉글랜드 혁명, 뉴잉글랜드, 잉글랜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프로비던스 식민지, 청교도, 보스톤, 웨스트민스터 총회, 장기의회, 윈스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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