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경북 영천을 사례로, 한국전쟁 전후 시기(1945~1953년) 지방권력의 변화과정을 미시적 수준에서 조사하고 분석하여, 국가와 정치사회가 지방주민들 사이에 내재적 권력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한국은 해방 이후 냉전체제 하에서 외세에 의해 초기 국 ...
이 연구는 경북 영천을 사례로, 한국전쟁 전후 시기(1945~1953년) 지방권력의 변화과정을 미시적 수준에서 조사하고 분석하여, 국가와 정치사회가 지방주민들 사이에 내재적 권력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한국은 해방 이후 냉전체제 하에서 외세에 의해 초기 국가기구가 만들어지고 정부가 수립되면서, 서구처럼 ‘시민사회→정치사회→국가’의 경로가 아니라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의 경로를 밟으면서 근대국가가 형성되었다. 이때 식민지시기부터 각 지방에 존재해온 지방권력은 중앙국가기구와 말단 지방주민들 사이에서 중간매개자 또는 대리통치자 역할을 하면서 중앙권력의 기반을 창출하기도 하고, 비판세력이나 저항세력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사대상지역인 영천은 해방 직후부터 지역 안에서 건국운동이 활발했고 1946년 10월항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1946년 10월항쟁에는 다양한 층의 인사들이 항쟁에 참여했는데, 당시 영천항쟁 참여층으로는 첫째, 항일운동을 했던 지식인, 지역 명망가, 지주계층 등 군 단위 지도자급 인사, 둘째, 계몽적 지식인, 한학자, 지역유지, 면장ㆍ구장 등 면 단위 또는 마을 단위의 지도자나 여론 주도층, 셋째, 상인과 학생, 소작농민이나 하층민 가운데 행동세력으로서 선봉대 역할을 한 청장년층이 있었다. 그리고 계급적 동질성에 의해 결합한 하층민 조직, 일가주의적 동질성에 의해 결합한 친족공동체, 마을 자치조직의 전통 등이 사회경제적 원인이나 이념적 요소의 기저에서 여론 형성과 조직화의 기반이 되었다. 1946년 10월항쟁 직후부터 충남경찰부대와 서북청년단 등 군경의 진압이 있었으며 우익 청년조직들도 강화되었다. 이 무렵부터 야산대가 조직되어 활동했고, 1948년 2.7사건 이후 영천에는 남로당 활동이 활발하여 경북에서 가장 먼저 야산대가 빨치산유격대로 조직되었다. 빨치산은 1948년 말~1949년 초 대구6연대반란사건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그 후 군경 측의 토벌도 강화되면서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군경과 빨치산이 계속 대치하면서 ‘작은전쟁’이라 불리는 지역내전의 양상이 나타났으며 이 와중에 주변 마을에 거주하던 민간인들이 다수 학살되었다. 군경의 토벌작전에 살아남은 민간인 상당수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1950년 2월경에 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민보도연맹 영천지부에는 약 1,000명이 가입하였는데 영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은 ① 1946년 10월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군경의 진압을 피해 입산하여 저항하다가 1949년 말~1950년 초 자수한 경우, ② 이들에게 연루되었던 일가친척이나 산간지역 주민, ③ 정부에서 지시한 가맹 할당량 때문에 행정조직에 의해 강제로 가입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영천은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영천전투와 신녕전투가 있었던 격전지였는데,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은 상당수가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에서 9월 사이에 영천경찰서 소속 경찰과 당시 영천에 주둔 국군에게 학살되었다. 이처럼 1945년부터 1953년 사이 영천에서 집단학살사건으로 희생된 민간인은 약 1,200명으로 추산되며, 이 중 국가기관에 의해 희생 진상이 규명된 사람만 해도 500명이 넘는다. 그리고 이 중에는 해방 직후 건국운동을 벌였던 인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한국전쟁 전후의 기간 동안 영천의 지방권력은 중앙국가기구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좌우로 나뉜 세력들이 대립하며 마을 주민들을 통치하는 이중권력의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권력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1946년 10월항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화북면 자천동의 경우에는 신분/계급 갈등 요인이 큰 영향을 미쳤다. ‘작은전쟁’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마을 주민들이 몰살당한 화북면 구전동의 경우에는 ‘일가주의’-친족관계 요인이 큰 영향을 미쳤다. 마을 주민들은 낮에는 군경, 밤에는 빨치산이 지배하는 이중권력 하에서 양쪽에 동원되면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모순된 위치에서 생활하였다. 이 와중에 그들은 강제성과 자발성이 혼합된 정체성을 지닌 채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중앙국가기구는 지방권력과 마을 주민들을 자신의 기준에 따라 배제ㆍ말살하거나 선택ㆍ포섭하면서 신생국가의 통치주도권을 획득하고 체제를 공고히 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