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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기 백제의 물류시스템 변화과정과 대외교섭의 전개: 과학적 토기분석을 통한 가설검증과 모델수립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한성기 백제의 물류시스템 변화과정과 대외교섭의 전개: 과학적 토기분석을 통한 가설검증과 모델수립 | 2002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이남규(한신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S1509
선정년도 2002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4년 05월 25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4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현재 한성시기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 體系的이고 力動的으로 파악하기 위해 당시의 물류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 대내적인 부문과 대외적인 부문으로 구분되는 한 국가의 전체적인 물류시스템은 고대단계부터 이미 상당히 복합적인 구조와 기능을 갖고 운영되고 있었던 만큼 그에 대한 문화복원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체계화된 전략적 개념을 갖고 접근해야 될 과제이다.
    한성백제시대 토기의 생산, 유통, 그리고 소비에 관련된 다양한 고고학적 과제들과 관련하여, 당하리 토기생산유적에서 백제토기의 중성자방사화분석(NAA) 결과는 토기생산유적에서 직접적이고도 고고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뚜렷한 군집을 형성하였다. 현재 광물학적 분석결과를 통해 생산과 분배의 복잡한 양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세부사항들이 검토되고 있다.
    백제토기에 대해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가정들, 성형기법에 대한 변화, 실용토기와 위신재용 토기 사이에 대한 구분, 재지적인 생산과 분배에 대한 추정들이 이번 분석에서 전혀 다른 각도에서 조명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당하리 토기가마에서 기준 군집의 설정, 당하리, 마하리유적의 토기분배에 대한 평가, 미사리유적에서 타날문토기의 유통에 대한 재평가, 그리고 이들 유적들에서 다양한 형식의 토기들에 대한 비교검토 등은 이번 프로젝트의 결과가 매우 유망함을 예고해 준다.
    백제의 국가 발전과정에서 대외교섭이 갖는 의미를 검토한 연구들이 적지 않다. 다만 기왕의 연구들이 일정시기의 대외관계 양상을 검토하는데 한정하거나, 고고자료에 주목하여 물질문화의 교섭양상을 파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한성백제기의 대외교섭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제 1기는 서진의 몰락과 동진으로의 남천 및 낙랑․대방군의 소멸까지로서, 교섭의 내용으로 볼 때 魏․西晉 및 낙랑․대방군과의 교섭이 중심을 이루는 시기이다. 제 2기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를 전기로 대외교섭의 양상이 다변화되는 시기로서, 대략 5세기 초반까지 이어진다.
    이시기 대외교섭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신라와의 적대적 관계와 가야-왜와의 우호․동맹적 관계가 기본 축을 이룬다. 제 3기는 2기와는 기본 양상이 변화되어, 5세기 전반 신라와의 동맹을 축으로 고구려와 격돌하다가 결국 패퇴하여 웅진으로 남천하기까지이다.
    백제의 대외교섭과 관련하여 중국 남조와의 와전류 교류가 주목된다. 현재 대체적으로 보아 동오시기의 도성 건업에는 운문과 인면문와당이 유행하였으며, 동진시기의 도성 건강에서는 수면문와당으로 바뀌고, 남조시기에 이르러 연화문와당을 주류로 하여 宮殿、禮儀建築、官署、府第、寺院、陵寢等의 고급건축물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 시기 수면문와당도 계속 사용되었으나 수량으로 보아 연화문와당에는 미치지 못한다.
    백제(마한)계 토기의 계보와 출토지를 보면,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지방은 영산강유역과 북부 구주지방이다. 특히 3~4세기에서는 다른 지역의 토기도 같이 출토하여 교역의 거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유적에서 백제(마한)계 토기가 출토되는 것이 주목된다.
    반면, 5세기 후엽 이후 전형적인 백제토기가 일본열도에서 출토되기 전에는, 적어도 토기를 통해서는 한강유역과 大和政權의 중심지였던 大阪府와 奈良縣과의 관계를 찾아보기 힘들다. 토기를 통한 상황만 보면, 3~5세기의 백제(마한)계 토기의 출토상황은 영산강유역과 북부구주 세력 사이에 문화적, 사회적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이 시기에는 한성백제와 大和政權의 관계는 그다지 강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겠다.
    백제와 중국의 문물교류가 물질 그 자체의 유입에 머무는 초기 단계에서 점차로 교섭의 농도가 짙어지면서 물질의 이면에 숨어 있는 정신적 측면까지 확대된다. 백제지역에서 발견된 낙랑(계) 유물은 기술의 유입 및 그것을 가능케 한 인간의 이주, 그리고 정신적 측면으로의 확산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 동안 兩晉과 南朝에 집중되었던 관심이 이제는 낙랑군과 대방군으로도 확대되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다.
  • 영문
  • Study of material circulation system is a key to systematically understanding the cultural/historical dynamics of Hanseong Baekje. The topic of an ancient state's intra- and inter-societal material circulation system is not a simple but is a very complex process, and thus requires systematic research strategies.
    For a relevant study, not only investigations of production locales of various goods but also scientific analysis of artifacts' provenances are critical. To do so, the number of sites for research must be large enough to reconstruct the material flow network and a chronological scheme must also be well established to ensure the contemporaneity of the sites.
    Analysis of ceramics from Danghari site, a pottery production locale of Hanseong Baekje, found some clusters of ceramics, providing archaeologically important clues to understanding production, circulation and consumption of Hanseong Baekje pottery. Detailed interpretation of the results through further mineralogical, petrographic and chemical analyses isunder way, and it will answer how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ceramics were operated. This preliminary result is expected to test the existing assumptions regarding change in pottery technology, distinction between utilitarian and prestige pottery, local production and distribution systems, all of which have been not been scientifically accessed but speculated. Moreover, establishment of reference groups of Danghari kiln, subsequent assessment of pottery distribution at Danghari, Mahari, and Misari, and comparison of various pottery types will provide important answers.
    Sequence and distribution of Baekje pottery suggests its close connection with the Youngsan River Valley and northern Kyushu, Japan. From trade centers dated between the 3rd and 4th centuries, Baekje pottery appeared. In contrast, until typical Baekje pottery appeared in Japan after the late 5th century, it is difficult to find evidence for connection between the Han River Valley and Osaka and Nara, two major cities of Yamato Dynasty. This suggests that Hanseong Baekje had relationships with Youngsan River Valley and northern Kyushu between the 3rd and 5th centuries, whereas its relationship with Yamato Dynasty was not strong. A closer look at the polities of northern Kyushu, however, leads us to a more complex picture. It is a well-known fact that northern Kyushu, a window through which Chinese and Korean cultures had been imported since the Paleolithic, had long kept relationships with southern Korea. Thus, Baekje (and Mahan) pottery in this area may have appeared in this context.
    Polities of northernKyushu were able to have direct interaction those in the Korean Peninsula and independently accept foreign cultures, as shown by the fact that they were the first importer of the stone chamber tomb with side entrance from Korean Peninsula. However, during this period, evidence for the developmentof new relationships with Yamato Dynasty, such as introduction of key-hole tombs and Yamato style pottery into this area, also increased in this area. This suggests that polities of northern Kyushu adopted dual strategies for intersocietal interaction they maintained relationships with various polities in the Korean Peninsula independently, while, at the same time, they had to keep some degree of relationship with Yamato Dynasty. Under these circumstances, not only their own interestsbut also Yamato Dynasty's interests would have been involved in northern Kyushu polities' interaction with polities in the Korean Peninsula.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현재 한성시기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 體系的이고 力動的으로 파악하기 위해 당시의 물류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 대내적인 부문과 대외적인 부문으로 구분되는 한 국가의 전체적인 물류시스템은 고대단계부터 이미 상당히 복합적인 구조와 기능을 갖고 운영되고 있었던 만큼 그에 대한 문화복원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체계화된 전략적 개념을 갖고 접근해야 될 과제이다.
    한성백제시대 토기의 생산, 유통, 그리고 소비에 관련된 다양한 고고학적 과제들과 관련하여, 당하리 토기생산유적에서 백제토기의 중성자방사화분석(NAA) 결과는 토기생산유적에서 직접적이고도 고고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뚜렷한 군집을 형성하였다. 현재 광물학적 분석결과를 통해 생산과 분배의 복잡한 양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세부사항들이 검토되고 있다.
    백제토기에 대해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가정들, 성형기법에 대한 변화, 실용토기와 위신재용 토기 사이에 대한 구분, 재지적인 생산과 분배에 대한 추정들이 이번 분석에서 전혀 다른 각도에서 조명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당하리 토기가마에서 기준 군집의 설정, 당하리, 마하리유적의 토기분배에 대한 평가, 미사리유적에서 타날문토기의 유통에 대한 재평가, 그리고 이들 유적들에서 다양한 형식의 토기들에 대한 비교검토 등은 이번 프로젝트의 결과가 매우 유망함을 예고해 준다.
    백제의 국가 발전과정에서 대외교섭이 갖는 의미를 검토한 연구들이 적지 않다. 다만 기왕의 연구들이 일정시기의 대외관계 양상을 검토하는데 한정하거나, 고고자료에 주목하여 물질문화의 교섭양상을 파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한성백제기의 대외교섭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제 1기는 서진의 몰락과 동진으로의 남천 및 낙랑․대방군의 소멸까지로서, 교섭의 내용으로 볼 때 魏․西晉 및 낙랑․대방군과의 교섭이 중심을 이루는 시기이다. 제 2기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를 전기로 대외교섭의 양상이 다변화되는 시기로서, 대략 5세기 초반까지 이어진다.
    이시기 대외교섭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신라와의 적대적 관계와 가야-왜와의 우호․동맹적 관계가 기본 축을 이룬다. 제 3기는 2기와는 기본 양상이 변화되어, 5세기 전반 신라와의 동맹을 축으로 고구려와 격돌하다가 결국 패퇴하여 웅진으로 남천하기까지이다.
    백제의 대외교섭과 관련하여 중국 남조와의 와전류 교류가 주목된다. 현재 대체적으로 보아 동오시기의 도성 건업에는 운문과 인면문와당이 유행하였으며, 동진시기의 도성 건강에서는 수면문와당으로 바뀌고, 남조시기에 이르러 연화문와당을 주류로 하여 宮殿、禮儀建築、官署、府第、寺院、陵寢等의 고급건축물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 시기 수면문와당도 계속 사용되었으나 수량으로 보아 연화문와당에는 미치지 못한다.
    백제(마한)계 토기의 계보와 출토지를 보면,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지방은 영산강유역과 북부 구주지방이다. 특히 3~4세기에서는 다른 지역의 토기도 같이 출토하여 교역의 거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유적에서 백제(마한)계 토기가 출토되는 것이 주목된다.
    반면, 5세기 후엽 이후 전형적인 백제토기가 일본열도에서 출토되기 전에는, 적어도 토기를 통해서는 한강유역과 大和政權의 중심지였던 大阪府와 奈良縣과의 관계를 찾아보기 힘들다. 토기를 통한 상황만 보면, 3~5세기의 백제(마한)계 토기의 출토상황은 영산강유역과 북부구주 세력 사이에 문화적, 사회적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이 시기에는 한성백제와 大和政權의 관계는 그다지 강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겠다.
    백제와 중국의 문물교류가 물질 그 자체의 유입에 머무는 초기 단계에서 점차로 교섭의 농도가 짙어지면서 물질의 이면에 숨어 있는 정신적 측면까지 확대된다. 백제지역에서 발견된 낙랑(계) 유물은 기술의 유입 및 그것을 가능케 한 인간의 이주, 그리고 정신적 측면으로의 확산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 동안 兩晉과 南朝에 집중되었던 관심이 이제는 낙랑군과 대방군으로도 확대되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를 통해서 백제 사회․경제의 구체적인 면모를 복원하고, 나아가 주요 물자에 대한 생산과 유통체계의 확립이라는 관점에서 백제국가의 성립과 성장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으므로, 본 연구의 결과물은 다양한 방면에서 활용될 수 있다.
    이를 학문적 기여, 전문 연구인력 양성과 사회 교육, 해외 관련기관과의 유대 강화로 나누어 제시하고자 한다.

    1) 학문적 기여
    본 연구의 결과는 국제․국내 학술심포지엄의 연구 발표와 토론,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간의 연구성과를 종합, 집대성한 저서 출간으로 외화되어 관련 학계와 향후 연구의 진전에 기여할 것이다.

    (1) 학술심포지엄 개최
    본 연구결과를 발전시켜 국내 관련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학술심포지엄 및 워크?을 개최한다. 여기에는 본 연구팀 연구인력과 국내 협력기관의 담당 연구자가 참여하여, 백제 토기, 철기의 제작기술과 유통체계, 그 정치사회적 함의에 관한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다.

    (2) 단행본 출간
    연구 결과를 단행본 저서로 발간하여 그 성과를 종합적․체계적으로 집대성한다. 현재 학연 출판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편집이 진행 중이며, 2004년 6월 출간 예정이다.

    (3) 관련 논문의 발표와 국내외 학술지 게재
    본 연구과제 수행과정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관련 주제에 대해서 개별 논문을 관련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학술지에 게재한다. 이미 일본 고대의 철기문화, 백제의 대중국 교섭과 문물교류, 경기도 화성의 길성리토성․사창리 유적에 대한 조사 보고, 낙랑문화와 고구려, 한성기 백제의 국가제의 양상 등에 대한 연구가 기발표되었거나 예정되어 있다.

    2) 전문 연구인력 양성 및 사회 교육
    본 연구에는 고고학,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연구 보조인력으로 참여하여 전공분야의 학문적 훈련과 실습을 쌓는다. 이들이 학문 후속세대로 성장하는데 본 연구과제 수행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와 함께 다양한 형태로 사회교육에 활용됨으로써 일반 시민들의 고대사 인식을 바로잡고 풍부하게 하는데도 기여할 수 있다.
  • 색인어
  • 백제, 한성기, 유통체계, 기술, 토기, 남조, 大和정권, 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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