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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39173&local_id=10060305
포스트휴먼의 출현과 몸과 마음의 상상력 -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소설 『나 여기 햇빛과 그늘 속에 있으리라』를 중심으로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포스트휴먼의 출현과 몸과 마음의 상상력 -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소설 『나 여기 햇빛과 그늘 속에 있으리라』를 중심으로 | 2012 년 | 구연정(서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2S1A5B5A07037723
선정년도 2012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4년 02월 28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4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검은 피부에 푸른 눈, 이것은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세 번째 소설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늘 속에> (2008)의 이름 없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이처럼 혼종적인 특징은 그의 신체적인 정체성을 각인시킬 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 세계의 모습이이기도 하다. 그는 원래 ‘노예의 나라’ 아프리카 출신이지만, 스위스로 왔고 지금은 스위스 소비에트 공화국의 지위 높은 장교 신분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소설 마지막에는 그는 그의 고향 아프리카 대륙으로 돌아감으로써 이와 같은 식민지적 모방 심리에서 출발한 스위스 장교라는 신분을 벗는다.
    하지만 그가 귀향한 것이 그가 다시 옛날의 원래 정체성을 되찾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고향이 다가올수록 그의 눈은 짙은 푸른 색으로 변해가고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아프리카 흑인의 신체적 내면적 정체성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은 혼종성은 오히려 그가 아프리카 흑인의 정체성도, 스위스의 장교의 정체성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웅변해주며, 그가 제삼의 다른 인물로 변화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혼종적 신체적 특징은 호미바바가 일찍이 지적한 것처럼 식민주의에서 탈식민주의로 나아가는 정체성의 변화로 읽힐 뿐만 아니라, 휴먼 이후의 휴먼, 즉 포스트휴먼의 특징으로도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 인물의 혼종성은 기술적으로 보완되고 진화되면서 나타나는 신체적이고 내면적인 혼종성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 번째는 포스트휴먼의 담론의 변화를 고찰하면서 포스트휴먼의 특성을 구분하고 포스트휴먼적 자아의 정체성을 재정의하였고, 두 번째는 이와 같은 포스트휴먼 정의 및 포스트휴먼 담론을 독일의 동시대 작가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작품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늘 속에>에 나타나는 혼종성으로 미학으로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 영문
  • Black skin and blue eyes are featuring the nameless protagonist in the third novel by Christian Kracht I'll be here in sunshine and in shadow (2008).
    This hybridity marks not only his bodily identity but also his inner world: He originally comes from Africa which is called in this novel as the slave world, but now he identifies himself with the high-level officer in Swiss-Soviet Republic(SSR), at the end of the novel he takes this kind of identity off and returns to his home country. Even if he go back home, it doesn't mean, that he gets the original identity. As his eyes show, they are getting more blue, which is not of the black african. In this hybrid figure not only the transition from a colonized to postkolonialisierten subject ( H. Bhabba ) recognizable is, but also the emergence of the posthuman, so called human after the human.
    As long as the figure is a technically supplemented and evolved human, his existence annulled the boundary between the human and the non-humane. Rather he shows a material-informational Identity, "whose boundaries undergo continuous construction and reconstructiona collection of heterogenous components."(K. Hayles) This kind of human K. Hayles called the posthuman, who is characterized by "a collection of heterogenous components".
    In the present work the novel which Kracht writes after a conjectural historical speculation, was analysed in the posthumanism discourse and discussed the aesthetic of the hybridity as that of the post-huma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번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 번째는 포스트휴먼의 담론의 변화를 고찰하면서 포스트휴먼의 특성을 구분하고 포스트휴먼적 자아의 정체성을 재정의하였고, 두 번째는 이와 같은 포스트휴먼 정의 및 포스트휴먼 담론라는 정의를 독일의 동시대 작가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작품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늘 속에>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논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포스트휴먼에 대한 사유는 국내에서 아직 많이 연구된 것은 아니지만 90년대 말부터 학계에서뿐만 아니라 시각 예술작품, 바이오아트라든지 테크노아트 등에서 적극적으로 표상되고 있다. 독일의 경우 포스트휴먼 논의는 90년대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포스트모던 계몽주의자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며 그의 논의에서는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이라는 담론적 특징이 띄고 있다. 영미권에서 좀더 활발한 논의의 양상을 띤다. 특히 1992년 도나 헤러웨이의 기념비적 논문 「몬스터의 약속: 부적당한/해진 타자들을 위한 재생 정치 The promises of monsters: A Regenerative politics for Inappropriate/d Others」에서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넘어서는 타자로서의 포스트휴먼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해러웨이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자로서 인간의 모습을, 또 자원이 아니라 인간과 같은 지위를 가진 존재로서 자연의 위상을 사유하고 있는데, 실재와 가상, 육체와 정신, 생명과 무생명, 주체와 환경, 자아와 타자,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근본적으로 무력화될 포스트휴먼적 세계에서 다양한 종의 행위자들이 공존하여 얽혀있는 사회를 보여주었다. 이 두 연구자의 포스트휴먼에 대한 글은 미래 사회의 탈중심화된 구조를 예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번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포스트휴먼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계몽주의적인 '확고한 자아'를 버린 주체라고 할 수 있으며 '탈주권화된' 인물이자 독립적 개체라기보다는 분리가능하며 다른 존재들과 결합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크라흐트가 이 소설에서 가정하고 있는 시대는 바로 휴머니즘이 종말에 이른 시점이라는 점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소설 인물들 또한 다양한 기계적 정체성과 이종적 결합의 과정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포스트휴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실재라고 생각했던 존재들의 사라짐의 현상이 주도적으로 나타나는데, 무엇보다 휴먼적 세계의 기반이 되는 문자와 인물들의 사라짐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사라짐이 단순히 종말을 뜻하는 건 아니다. 트랜스휴먼적 징후를 보이는 파브르는 유탄을 맞아 죽지만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뒤에 오는 세대가 새로운 인간의 초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문자는 없지만 언어는 존재하는데, 그것은 이미지적인 것으로 제시되며, 이들 세대는 휴먼적 근대 세계가 구상되고 건설된 유럽 대륙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늘 주변에 있었던 아프라카 대륙에서 발현될 수 있으며, (실제로 주인공 아프리카 고향마을에서 행복하다.) 어쩌면 중심과 주변이 해체된 공간에서 포스트휴먼의 삶의 공간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포스트 휴먼의 세계에서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역사의 종말을 섣불리 짐작하는 것은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사고이다. 크라흐트가 소설의 마지막에 언급하는 것처럼, 근대적 삶의 공간의 건설가 제네레는, 도시를 지키기 위해 군인들을 보내지만 그들마저도 도시를 떠나는 인파에 섞어든다. 텅 빈 도시의 관청 건물에 홀로 남은 제네레는 결국 가로등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의 담벼락에 넝쿨 식물이 타고 오르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징후로서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 넝쿨 식물이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크라흐트의 이번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인류 역사의 종말, 인간의 사라짐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새로운 포스트휴먼적 세계, 포스트리얼리티로의 진입이 강력히 암시된다고 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포스트휴먼의 양상이 문자 언어가 주요 매체인 문학에서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현재까지 근대 이후의 시대의 포스트휴먼 논의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시각 매체, 영화나 시각예술에서 보여준 기존의 포스트휴먼은 양극적인 이미지를 일반 대중에게 심어주었는데, 기계와의 접속에 의해 무력화되거나 아니면 강화되어 인간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포스트휴먼으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이런 트랜스휴먼적 이미지들은 시각매체에서 때로는 극단적으로, 때로는 섹슈얼하게 제시되고 포스트휴먼의 논의에 진입하기도 전에 일반 대중은 수동적으로 이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인간 유형을 바라보면서 거부감 내지는 매혹적이라는 상반된 감정적 선입견을 갖게 된다. 그에 반해 문학에서 다루어지는 “인간 이후”의 모습은 단순히 제시되는 게 아니라 읽는 사람 스스로가 주어진 묘사를 따라 그 이미지를 구축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각각의 능동적인 형상물로 그려질 수 있고 그 양상은 훨씬 더 다양하고 포괄적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능동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포스트휴먼의 모습은 읽는 이가 직접 구축한 새로운 이미지이기 때문에, 기계와의 결합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소통과 공존의 가능성에 더 큰 의미를 두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중요한 것은 기계와 대립과 충돌이라는 인간 중심의 동일화된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과 기계는 서로 융합(컨버전스)하되 나쁜 인간 기계와 선한 인간 기계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 있다는 하이브리드적 사고 체계로 이행해가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을 바탕으로 사회적 가장 먼저 도움이 되는 것은 현재의 젊은 세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의 네트워킹 문화, 신체의 일부인 양 손에 붙어 있는 핸드폰과 책이나 회화를 통해 문화를 직접 보고 체험하기보다는 기술정보에 의존하고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기꺼이 가상인물로서 실체 없이 다른 정보들 사이에 흐르기를 바라는 사이버 욕망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문화를 이해할 때, 젊은 세대의 자아는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확장되고 강화되려 하면서 어떤 경계를 넘어서려고 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실재와 가상, 육체와 정신, 생명과 무생명, 자아와 타자, 인간과 기계의 구분을 근본적으로 무력화시킬 이들 미래 세대의 자기 이해와 문화를 이해함으로써 미래의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또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적 시선으로 확장된 육체와 마음의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등의 트랜스휴먼과 가상 인물 아바타이 갖게 될 가상 현실과 가상 의식 등이 논의될 때 이들 트랜스휴먼을 첨단 테크놀로지의 차원에서만 취급하는 공학적 접근이나 수학적 논의들이 낳을 수치적 단순화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술과 결합하는 인간이라고 해서 자유롭게 분리되고 해체되고 대체될 수 있으며 수단화될 수 있다는 오류 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포스트휴먼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인간 형태인 동시에 기술중심주의에서도 벗어난 인간 유형이 될 것이다. 포스트휴먼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은 타고난 자연적 몸과 기술적으로 실행되는 몸이 서로 겹침으로서 그 자체로 분리될 수 없는 어떤 정체성을 생산한다. 이들은 다른 정보들에 접속하면서 다양화되고 변화할 수는 있지만, 즉 기술에 의해 중재되긴 하지만 여전히 자연적 결과이다. 이런 관점은 기계와 결합된 인간은 영혼이 없어서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일반적 시선에 문제제기를 한다. 사이보그니 안드로이드 등은 기술적으로 향상된 인간이지만,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이들은 감성을 가질 수 있다. 바뱅에 따르면 지성과 감성은 서로를 반사하는 고리처럼 엮여 있으며 최근의 인지과학은 감성이야말로 육체의 소산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논의의 방향은 결국 포스트휴먼은 자연과 인공이 공존하여 하나의 정체성으로 생성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메탈의 보철물 안에도 감성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고자 한다. 바로 그처럼 크라흐트의 소설은 바로 그런 하이브리드적 존재로서 포스트휴먼들의 탈중심화된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근대적 인간과 다르지 않게, 아니 어쩌면 더욱 인간적이어서 기꺼이 “햇빛과 그늘 속에 있고 싶은” 포스트휴먼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 색인어
  • 포스트휴먼, 탈식민지주의, 혼종성, 크라흐트, 사라짐, 비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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