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성과물 유형별 검색 > 보고서 상세정보

보고서 상세정보

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40220&local_id=10052348
遼寧國民外交協會의 국권수복운동-‘東三省韓人問題案’을 중심으로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遼寧國民外交協會의 국권수복운동-‘東三省韓人問題案’을 중심으로 | 2012 년 | 김영신(원광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2S1A5B5A07035925
선정년도 2012 년
과제진행현황 중단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3년 08월 14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3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918년 張作霖이 사실상 동북 전체를 통제하면서부터 奉天派가 오랫동안 반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북의 특수한 지리 및 자원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여기에 동삼성을 둘러싼 복잡한 국제관계가 깊이 작용하였다. 봉천파의 동북지배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전반적인 건설에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방행정의 추진, 사회경제의 건설, 심지어 일정한도의 대의정치 실험 등을 통해 군벌통치시기 동북은 중국대륙에서 가장 안정되고 번영을 구가한 지역이었다.
    한일합병으로 한국인이 ‘일본국 臣民’으로 바뀌면서 동북 거주 韓人 문제는 중대 현안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한일합병 이전 동북거주 한인 문제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었던 중국 지방관헌들은, 이후 한인 관련사무 처리과정에서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동북으로 이주하는 한인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동북 지방당국의 우려도 커갔다. 동북당국은 이주 한인들이 일본 동북침략의 선봉이 되지 않을까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마침내 동북 거주 한인 축출문제가 봉천파 수뇌부 사이에 중요 현안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일본에 의해 정책적으로 추진된 한인의 동북이주를 일본세력의 침략으로 인식한 봉천파는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기존 거주자를 축출하고 향후 한인의 동북이주를 철저하게 취체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각 지방정부에 日人과 韓人의 거주와 토지임대를 강력히 단속하라는 일련의 명령을 하달하기에 이르렀다.
    장학량 집정기에도 일인과 한인의 滿蒙 거주를 제한하고 금지하려는 의도에서 ‘關於管制韓人耕作土地之訓令’․‘取締移居韓人之訓令’․‘禁止盜賣國土暫行條例’ 등 위반자에 대해 엄중한 징벌 내용을 담은 많은 훈령과 포고가 발포되었다. 한인의 거주와 경작을 금지하려는 의도에서 집행된 여러 조치들은 장학량 집정기 오히려 이전에 비해 훨씬 강화된 모습이었다. 한인거주 문제에 보이듯 부친에 비해 한결 도전적이고 과격한 장학량의 排日 성향은 민간의 적극적인 지지와 옹호 속에서 가능했다. 당시 장학량이 주도한 동북의 배일정책에서 일정 부분 임무를 분담한 것이 遼寧省國民外交協會였다. 국민혁명군의 북벌을 방해하기 위해 일본군이 산동에 출병하자 봉천총상회가 중심이 되어 외교후원회를 조직했다. 동북 최초의 排日 시위운동을 주도했던 외교후원회의 활동을 이어 받아 장학량 집정기 동북 배일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 1929년 조직된 요녕성국민외교협회이다.
    旅順과 大連 및 滿鐵 회수, 영사재판권 회수 등 문제에 강경한 목소리를 내며 장학량의 배일정책을 지지하고 지원했던 요녕성국민외교협회의 활동 가운데 또 다른 중심 문제는 ‘동삼성 거주 한인문제’였다. 중앙정부 및 지방당국에 한인 대우방법의 확정을 요구하는 한편 한인문제연구위원회 설치를 주장했던 요녕성국민외교협회 역시 동북 한인을 일본침략의 선봉으로 인식하였다.
    한인의 거주와 개간을 강력하게 단속하려 했던 조치는 동북당국과 동북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동북침략을 철저하게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국권수호의 한 수단이었다. 그 배경에는 한인이주자를 일본 침략세력의 선봉으로 간주한 인식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주지하다시피 동북당국의 이런 우려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한 일부의 시각과 결론은 ‘재만한인’은 봉천파 배일정책 집행의 ‘피해자’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한인 문제에 대한 봉천파의 결정과 행동을 일방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작림 부자는 물론이고 당시 동북의 중국인들이 이런 결정을 내리고 지지하기까지 그들이 처했던 상황과 당시 동북의 현상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이해와 연구가 전제되어야만 할 것이다.
  • 영문
  • Koreans being changed into Japanese subjects due to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the problem of Korean living in Northeast China emerged as critical issue. Afterwards the China authorities, which could handle relatively freely the problem of Korean living in Northeast China before merger, were interfered in the course of paperwork regarding Korean. As the number of Korean immigrants move to the northeastern area grew, the concern of local authorities became larger.
    Fengtian Clique, which recognized Korean migration politically promoted by Japan as the invasion of Japanese forces, in order to prevent the spread of the crisis, decided to expel the existing residents and block out the future Korean migration. As a result, they ordered every local authority to exercise strict control of Korean residence and land lease.
    During the Zhang Xue-Liang regime, in order to restrict and prohibit Japanese and Korean residence in Manchuria, lots of introductions and proclamations were decreed. With more defiant and radical tendency than his father, Zhang Xue-Liang could exclude the Japanese in the active support and advocacy of private sector. At that time, ‘Liaoning Province public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divided the mission of anti-Japanese policy in northeastern area ruled by Zhang Xue-Liang. Another issue of ‘Liaoning Province public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which supported Jang’s anti-Japanese policy raising the voice in the recovery of Lushun, Dalian, Manchuria Railway and consular jurisdiction, was ‘Korean residence in Dong-san Province’. ‘Liaoning Province public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demanding the way of treating Korean to central government and local authorities, insisting the installation of ‘Korean problem research council’, recognized northeastern Korean as the vanguard of Japanese aggression.
    The action of strongly cracking down on Korean residence and cultivation, from the point of view of northeastern authority and people, was a means of defending sovereignty from the intension of sealing Japanese invasion thoroughly. In the background, the recognition that Korean immigrants are the vanguard of Japanese invasion forces was the most important reason. As everyone knows, this concern of northeastern authority was not unfounded. Nevertheless, the dominant views and conclusions regarding this issue were that ‘Korean immigrants in Manchuria’ are the victims of anti-Japanese policy implementation of Fengtian Clique.
    However, the decision and action of Fengtian Clique regarding Korean cannot be blamed arbitrarily in terms of our analysis. It is required more subjective understanding and study of the circumstances and phenomenon that Chinese living in Northeast as well as the father and son, Zhang Zuo-Lin and Zhang Xue-Liang, decided and supported the polic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한일합병으로 한국인이 ‘일본국 臣民’으로 바뀌면서 동북 거주 韓人 문제는 중대 현안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한일합병 이전 동북거주 한인 문제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었던 중국 지방관헌들은, 이후 한인 관련사무 처리과정에서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동북으로 이주하는 한인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동북 지방당국의 우려도 커갔다. 일본에 의해 정책적으로 추진된 한인의 동북이주를 일본세력의 침략으로 인식한 奉天派는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기존 거주자를 축출하고 향후 한인의 동북이주를 철저하게 취체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각 지방정부에 日人과 韓人의 거주와 토지임대를 강력히 단속하라는 일련의 명령을 하달하기에 이르렀다.
    張學良 집정기에도 일인과 한인의 滿蒙 거주를 제한하고 금지하려는 의도에서 많은 훈령과 포고가 발포되었다. 부친에 비해 한결 도전적이고 과격한 장학량의 排日 성향은 민간의 적극적인 지지와 옹호 속에서 가능했다. 당시 장학량이 주도한 동북의 배일정책에서 일정 부분 임무를 분담한 것이 遼寧省國民外交協會였다. 旅順과 大連 및 滿鐵 회수, 영사재판권 회수 등 문제에 강경한 목소리를 내며 장학량의 배일정책을 지지하고 지원했던 요녕성국민외교협회의 활동 가운데 또 다른 중심 문제는 ‘동삼성 거주 한인문제’였다. 중앙정부 및 지방당국에 한인 대우방법의 확정을 요구하는 한편 한인문제연구위원회 설치를 주장했던 요녕성국민외교협회 역시 동북 한인을 일본침략의 선봉으로 인식하였다.
    한인의 거주와 개간을 강력하게 단속하려 했던 조치는 동북당국과 동북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동북침략을 철저하게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국권수호의 한 수단이었다. 그 배경에는 한인이주자를 일본 침략세력의 선봉으로 간주한 인식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주지하다시피 동북당국의 이런 우려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한 일부의 시각과 결론은 ‘재만한인’은 봉천파 배일정책 집행의 ‘피해자’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를 통해 도출된 결과가 가져올 가장 큰 기대효과는 역시 많은 후속연구를 촉발시키는 작용이라는 점이다. 앞서도 여러 차례 지적하였듯 지금까지의 민국사 연구는 지역적으로 關內에 심히 편중된 현상을 보였다. 동북이라는 지역을 공간적 대상으로 삼아 군벌통치기 이 지역을 장악했던 봉천파를 다룬 본 연구는 동북을 비롯한 서북과 서남 등 종래 주목받지 못했던 지역으로까지 중국학의 연구범위를 확대한 많은 후속연구를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의 주된 연구주제 역시 지금까지는 관내지역에 편중된 모습을 보여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러․일의 만주침략과 청조의 대응, 군벌통치기 동북의 교육발전, 開港과 租借가 근대 만주의 도시발전에 미친 영향 등 동북지역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연구의 필요성을 생각해 볼 때, 이번 연구가 향후 중국사 연구의 외연을 관외로까지 넓힐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민국사 연구의 공간적 범위를 관외지역으로 확대한 본 연구의 세부주제는 종래의 민국시기 군벌 연구에서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내용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구의 내용과 결과는 군벌 혹은 군벌통치기 연구의 폭을 넓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존의 군벌 연구는 생성 배경과 외국과의 관계 등 몇 가지 한정된 주제 속에 그 결론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군벌통치기 동북의 현상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를 통해 봉천파 통치기 동북의 다른 부분(군수, 재정, 대외교역)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연구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번 연구에서 다룬 세부주제들을 관내로 확대하면 동일시기 다른 군벌들의 존재형태와 사회경제면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동북지역사에 대해 우리 학계는 오래 전부터 주목해 왔고 많은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이런 연구들이 우리를 중심에 놓고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제 동북을 장악하고 경영했던 현지세력과 현지사회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한 연구가 미흡하였다는 점에서 본 연구는 우리 학계가 지향해야 할 동북사 연구의 한 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연구를 통해 도출된 성과는 본인이 주로 담당하고 있는 중국현대사 관련 강의에서 직접적인 참고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최근 몇 년 본인이 주목하고 있는 동북지역사 연구를 더욱 심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초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동북거주 한인문제까지를 포함하여 장작량 부자 통치기 동북의 총체적인 연구의 중요한 한 축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자연스럽게 봉천파 통치기는 물론이고 일본점령기 동북거주 한인에 관한 다양한 문헌자료들이 수집되고 정리될 것이다. 이런 자료들은 그간 독립운동사에 편중되었던 동북지역 한인사회 연구 진행에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색인어
  • 봉천파, 만주, 장작림, 장학량, 여순, 대련, 요녕성국민외교협회, 만철, 영사재판권, 한인, 한일합병, 재만한인
  • 이 보고서에 대한 디지털 콘텐츠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 본 자료는 원작자를 표시해야 하며 영리목적의 저작물 이용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 또한 저작물의 변경 또는 2차 저작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