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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寧波의 亂’ 漂流人 刷還을 둘러싼 朝·明 외교전략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16세기 ‘寧波의 亂’ 漂流人 刷還을 둘러싼 朝·明 외교전략 | 2013 년 | 구도영(한밭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3S1A5B5A07047688
선정년도 2013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5년 02월 10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5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523년 발생한 ‘닝보의 난’은 明日 조공관계를 한동안 중단시킬 만큼 양국 관계를 경색시킨 중요 외교 사건이었다. 일본 지역의 두 유력세력인 호소가와씨(細川氏)와 오우치씨(大內氏)가 明과의 무역에 대한 利權을 둘러싸고 명의 주요 무역항인 닝보에서 살인 및 방화 등 큰 폭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명과 일본 양국 간의 문제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인접 국가인 조선에도 의도치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닝보 항구에서 소동을 일으킨 일본 사절단이 배를 타고 도주하던 도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조선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조선은 명에 죄를 지은 일본인과 이들이 포로로 잡아 온 중국인 모두를 명 정부로 송환하였고, 명으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표류된 ‘죄인 일본인과 사로잡힌 중국인’ 송환은 명에 대해 그 외교적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안이므로 누구보다도 조선국왕 中宗이 적극성을 띠었다. ‘닝보의 난’이 명의 강남지역에서 발생한 일이므로 요동지역 관리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고, 흔하기만 한 피로인 송환보다는 그 외교적 성과가 크게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정한 功을 세우고자 한 나름의 외교적 계산을 염두한 중종에 의해 명 정부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난동자’를 붙잡아서 송환한 조선의 조치는 이후 명의 위정자에게 조선의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에 사로잡힐 당시 그들은 ‘나약한 표류인’이었지만, 명에서 볼 때 그들은 ‘중국에서 살육을 행한 倭人’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30여 년 뒤 明에 왜구가 범람하여 이들을 토벌하는 문제로 골치를 앓게 되자, 명 내에서는 ‘닝보의 난’ 일본인 송환 조치를 떠올리며 조선을 이용하여 왜구를 억제하자는 의논이 비등하게 되었다. 심지어 조선의 우월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왜구 토벌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조선 이용론은 황제의 허가까지 받았으나, 당시 명의 여러 정황으로 인해 결국 시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명 조정 내 위정자들에게 조선 이용론이 호응을 얻어 실제로 실행 직전까지 갔다는 사실은 ‘닝보의 난’ 표류인 송환 조치가 명 위정자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명의 조선 이용론이 사행단의 정보수집으로 인해 조선에 보고되자, 조선 신료들은 명측의 군사 정벌에 조선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는 현실적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기가 明日간 불법해상무역이 가장 활발하여 조선에 표류하는 불법해상무역업자들의 출현이 매우 빈번했다는 점이다. 불법해상무역업자와 왜구의 구분이 모호한 상황에서 향후 이들을 또다시 명으로 송환하게 될 경우 조선의 ‘군사 강국 이미지’가 더욱 강건해질 수 있었다. 표류인 송환이 조선이용론을 부채질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하였지만, 결국 조선은 중종대 이래의 방법을 고수하여 이들을 지속적으로 명에 돌려보냈다. 한편 조선의 ‘닝보의 난’ 표류인 송환 문제는 대일본 관계에서 조선을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하였다. 명에서 죄를 저질렀다 하여도 표류된 일본 사절단을 일본이 아닌 명으로 돌려보낸 것은 표류인을 인도적 차원에서 本國으로 돌려보내는 관행에 어긋난 것이었으며, ‘닝보의 난’이라는 명일 양국 간 외교 사안에 조선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明日간 외교사건에 깊이 개입하게 됨으로써 이후 오랫동안 일본이 조선을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외교적 빌미를 제공하였다.
    동아시아 삼국 모두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조선은 이 사건을 통해 명에게 특별한 사대를 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명분을 얻고자 하였으며, 명은 범람하는 왜구를 진압하는 데에 조선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일본은 을묘왜변 등 자신들의 외교적 입지가 좁아지거나 특정한 요구사항이 있을 때 이 사건을 거론하여 자신들의 요구사항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닝보의 난’ 표류인 송환 조치는 조선국왕 중종이 ‘닝보의 난’의 난동자를 잡아 明으로 돌려보냄으로써 크나큰 공적을 세우고자 한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관례에서 벗어나 명에 치우친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조선의 對明, 對日 외교 모두에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닝보의 난’ 표류인 송환 조치는 그것이 동아시아 삼국에 가져온 파장만으로도 이 시기 조선의 대외관계에서 주목해야 할 사건임과 동시에 對明, 對日 관계에서 균형을 잃어가는 16세기 조선의 대외관계 경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 영문
  • 'The Event Fighting for Tribute in Ningbo' in 1523 was an important diplomatic event which disrupted the tributary relationship between Ming and Japan and consequently strained 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se two countries. The spatial range was not restricted to Ningbo in China or adjacent coastal area but had an unexpected impact on Joseon. While the Japanese who made commotions with tributary trade in Ningbo was on castaway, they arrived at Joseon after drifting due to bad weather. Joseon repatriated both the Japanese who committed crimes in China and their Chinese captives to Ming, which acknowledged Joseon's contribution. Since the repatriation of drifted 'criminal Japanese and captive Chinese' based on the loyalty of Joseon's King was an event which might be acknowledged for its diplomatic contribution to Ming, King Jung Jong was active in this matter. Since 'the event fighting for tribute in Ningbo' occurred in the southern area of Ming, there was no need to read the administrators of Liadong region and the diplomatic achievement might be greater than the common repatriation of the captives. It developed toward active advertisement to Ming by King Jung Jong who took into account diplomatic benefit to make some contribution.
    However, the arrestment and repatriation of Japanese criminals to Ming was seen as a symbolic event which showed military superiority of Joseon to Ming by the hypocritical politicians in Ming. For them, the Japaneses who were caught and repatriated by Joseon were close to 'Japanese invaders who used to kill Chinese people' than to 'weak drifters'. Moreover, repatriation of drifters with Japanese nationality to Ming rather than Japan might cause rage from Japan but Joseon's such action might demonstrate that Joseon's national power was superior to Ming. Therefore, when Ming was troubled with Japanese invaders after 'the great Japanese invader era' came 20 years later, the political opinion to control Japanese invaders using Joseon boiled in Ming. Even a measure to suppress Japanese invaders using Joseon in a military way was proposed. The assertion to use Joseon was near put into practice with the approval of Ming's King but was not implemented due to many situations in Ming at that time. However, the fact that the assertion to use Joseon received positive responses from the hypocritical politicians in Ming and was near put into practice indicates the degree of impact of repatriation of the drifters of the event fighting for tribute in Ningbo on Ming's government.
    When the assertion to use Joseon was reported to Joseon through information collected by envoy group, the hypocritical politicians worried about it. However, they did not make any change in toadyism toward Ming. When the illegal ocean trade occurred frequently between Ming and Japan during the great Japanese invader period, the marine force which drifted and arrived at Joseon increased naturally. However, Joseon consistently repatriated such Chinese to Ming. Although repatriation of illegal Chinese traders to Ming might accelerated the image of 'strong Joseon', Joseon did not neglect the idea of 'diplomatic exchange in manner'. On the contrary, such 'diplomatic exchange in manner' of Joseon led Joseon to read the mind of Japan. Even they were criminals, repatriation of drifted Japanese envoy to Ming rather than Japan was a violation of the customs to repatriate the drifters to their country from humanistic perspective and Joseon directly intervened the diplomatic event such as the event fighting for tribute in Ming between Ming and Japan. Since Joseon was involved in the diplomatic event between Ming and Japan, Joseon provided an diplomatic cause for Japan to criticize Joseon more confidently.
    All of three countries in east Asia used this event in a political manner. Joseon wanted to gain political justification, whereas Ming want to get Joseon involved in suppressing Japanese invaders. Japan mentioned this event whenever their diplomatic position was threatened or they had specific requirements to justify their request. While the repatriation of drifters from the even fighting for tribute in Ninbo was caused by the 'achievement-oriented diplomacy by capturing and returning the Japanese criminals to Ming, it caused tension in the diplomacy of Joseon both with Ming and Japan since Joseon lost balance between Ming and Japan. The event fighting for tribute in Ming is a noticeable event in the diplomatic relationships of Joseon with its ripple effects as well as a symbolic event to demonstrate Joseon's diplomatic picture in the 16th centur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523년(중종 18, 嘉靖 2)에 발생한 ‘닝보의 난’은 明日 조공관계를 한동안 중단시켜 양국 관계를 경색시킨 중요 외교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명일간 외교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조선에도 의도치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닝보에서 조공무역 문제로 살인 방화 등의 소동을 일으킨 일본 사절단이 배를 타고 도주하던 도중 악천후로 漂流하여 조선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조선은 명에 죄를 지은 일본인과 이들이 포로로 잡아 온 중국인 모두를 명 정부로 송환하였고, 명으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표류된 ‘罪人 일본인과 被虜 중국인’ 송환은 명에 대해 그 외교적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안이므로 누구보다도 中宗이 적극성을 띠었다. ‘닝보의 난’이 명의 강남지역에서 발생한 일이므로 요동지역 관리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고, 흔하기만 한 被虜人 송환보다는 그 외교적 성과가 크게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정한 功을 세우고자 한 나름의 외교적 계산을 염두한 중종에 의해 명 정부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亂動者’를 붙잡아서 송환한 조선의 조치는 이후 명의 위정자에게 조선의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에 사로잡힐 당시 그들은 ‘나약한 표류인’이었지만, 명에서 볼 때 그들은 ‘중국에서 살육을 행한 倭人’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30여 년 뒤 ‘大倭寇 時代’가 도래하여 明이 왜구 문제로 골치를 앓게 되자, 명 내에서는 ‘닝보의 난’ 일본인 송환 조치를 떠올리며 조선을 이용하여 왜구를 억제하자는 의논이 비등하게 되었다. 심지어 조선의 우월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왜구 금압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조선 이용론은 황제의 재가까지 받았으나, 당시 명의 여러 정황으로 인해 결국 시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명 조정 내 위정자들에게 조선 이용론이 호응을 얻어 실제로 실행 직전까지 갔다는 사실은 ‘닝보의 난’ 표류인 송환 조치가 명 위정자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명의 조선 이용론이 사행단의 정보수집으로 인해 조선에 보고되자, 조선 신료들은 명측의 군사 정벌에 조선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는 현실적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기가 明日간 불법해상무역이 가장 활발하여 조선에 표류하는 불법해상무역업자들의 출현이 매우 빈번했다는 점이다. 불법해상무역업자와 왜구의 구분이 모호한 상황에서 향후 이들을 또다시 명으로 송환하게 될 경우 조선의 ‘군사 强國 이미지’가 더욱 강건해질 수 있었다. 표류인 송환이 조선이용론을 부채질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하였지만, 결국 조선은 중종대 이래의 방법을 고수하여 이들을 지속적으로 명에 돌려보냈다. 한편 조선의 ‘닝보의 난’ 표류인 송환 문제는 대일본 관계에서 조선을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하였다. 명에서 죄를 저질렀다 하여도 漂流된 일본 사절단을 일본이 아닌 명으로 돌려보낸 것은 표류인을 인도적 차원에서 本國으로 돌려보내는 관행에 어긋난 것이었으며, ‘닝보의 난’이라는 명일 양국 간 외교 사안에 조선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明日간 외교사건에 깊이 개입하게 됨으로써 이후 오랫동안 일본이 조선을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외교적 빌미를 제공하였다.
    동아시아 삼국 모두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조선은 이 사건을 통해 명에게 특별한 사대를 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명분을 얻고자 하였으며, 명은 범람하는 왜구를 진압하는 데에 조선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일본은 乙卯倭變 등 자신들의 외교적 입지가 좁아지거나 특정한 요구사항이 있을 때 이 사건을 거론하여 자신들의 요구사항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닝보의 난’ 표류인 송환 조치는 朝鮮國王 中宗이 ‘닝보의 난’의 난동자를 잡아 明으로 돌려보냄으로써 크나큰 공적을 세우고자 한 ‘治積 외교’를 위해 발로된 것이었지만, 관례에서 벗어나 명에 치우친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조선의 對明, 對日 외교 모두에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닝보의 난’ 표류인 송환 조치는 그것이 동아시아 삼국에 가져온 파장만으로도 이 시기 조선의 대외관계에서 주목해야 할 사건임과 동시에 對明, 對日 관계에서 균형을 잃어가는 16세기 조선의 대외관계 경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첫째, 본 연구는 寧波의 亂 범위를 1523년 사건 발생 시점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하여 파생된 표류인 쇄환과정까지 포괄하여 시각의 범위를 확장하였다. 이 사건이 외교적인 사안으로서 일단락되기까지는 사건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닝보의 난 처리과정에서 조선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을 한국사학계에서 본격적으로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16세기 조·명 관계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더욱이 본 사건이 그간 알려진 것보다 국제적인 사건이었음을 새롭게 발굴하면서 당시 동아시아 삼국의 외교적 긴장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이 사건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역을 확인하였다.
    둘째, 닝보의 난을 보다 입체적으로 다루었다. 기존에는 이를 경제적 성격에 국한하여 살펴보았으나, 본 연구는 닝보의 난 후속처리를 둘러싼 동아시아 3국의 외교적 입장을 살펴보고, 특히 조선과 명의 외교전략에 대해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 조선이 ‘닝보의 난’ 표류인 쇄환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리고 이를 추진하는 가운데 명과 일본과 어떤 외교행위를 추진했는지, 이 사건이 종결된 이후 ‘大倭寇 시대’를 맞은 明이 이 문제를 對朝鮮 외교전략으로 어떻게 이용하려 하였는지 집중 조명하였다. 또한 표류인이 명에서 죄를 저지른 자들이지만, 조선이 기존의 관행을 어기고 일본 표류인을 明으로 보내 그들이 처형당하게 했다는 점에서 향후 일본이 조선의 표류인 쇄환 조치를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는 그간 조선과 명과의 연구가 주로 조선의 입장만을 다루었다는 한계를 극복하여, 명 조정내에서 닝보의 난 관련 사안을 대조선 외교책으로 구성하는 숙의의 과정을 상세히 다룬다는 점에서 균형 잡힌 조명 외교사를 정립하는 데 일정정도 시사점을 부여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한 사건을 둘러싸고 한중일 삼국의 외교적 입장이 모두 드러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셋째, 이 사건의 전개과정 중 조선의 직접적인 개입의 계기가 된 표류인 쇄환문제를 면밀히 살핌으로써 조선 대외관계사의 한 축인 표류인 쇄환 연구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 그간 표류인 쇄환 연구는 표류인을 어떠한 절차와 방법으로 쇄환을 진행했는지, 또는 몇 명을 쇄환하였는가 등 사실을 확인하는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이 사건에서 표류인 쇄환이 의례적으로 행해 온 ‘관례적 행사’의 수준에서 머문 것이 아닌 매우 전략적인 외교행위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분석하였다. 그러한 차원에서 본 연구는 표류인 쇄환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 활용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 색인어
  • 조선, 명, 16세기, 寧波의 亂 , 표류인,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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