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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와 아리스토텔레스적 중용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카타르시스와 아리스토텔레스적 중용 | 2014 년 | 김덕천(연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4S1A5B5A07039741
선정년도 201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6년 02월 24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비극의 정의(定義)는 연민(eleos)과 공포(phobos)의 카타르시스를 이 시가 장르의 본질적인 기능으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비극의 플롯은 그러한 정서의 유발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건과 행위들의 짜임새를 갖출 것이 요구된다. 훌륭한 비극 작품은 기품 있는 인물들의 복된 삶이 나락으로 빠져드는 정황을 묘사해서는 결코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일깨우기보다는 갑작스런 심적 동요나 극도의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역겨운(miaron), 문자 그대로 저열하고 추악한 이야기가 되는 까닭이다. 우리가 카타르시스라는 표현을 ‘정화’, ‘순화’, ‘배설’, ‘제거’ 혹은 그 무엇으로 풀이하든, 그러한 것은 카타르시스의 의미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허구적 서사(敍事)의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시학 Peri poiētikēs》은 카타르시스와 미메시스 개념의 친화력을 명백히 부각시키고 있다. ‘비극에 적합한 고유의 쾌’(oikeia hēdonē)는 “재현의 수단을 빌어 연민과 공포라는 정념으로부터 산출되는 즐거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적 사건들로 말미암아 연민과 공포를 느끼는 쾌적함을 줄 수 없는 경우와 모방․재현의 결과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감상자에게 쾌적함을 선사하는 예술적인 상황을 결연히 구분 짓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은 1448b 10-12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뚜렷이 확증되고 있다. “우리는 실제로 보면 고통스러운 사물일지라도, 매우 자세하게 그려진 그것의 표상을 바라볼 때에는 즐거움을 느낀다. 가령 아주 끔찍한 짐승이나 송장의 모습과 같은 것 말이다.” 그러한 현실적 대상들은 순수성을 결여한 것들이기에 이른바 카타르시스의 정화 작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전대의 시문학에도 부정적이었던 스승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응답은 인간의 감정 능력을 폄하하는 플라톤의 견해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이라고도 평할 수 있겠다. 실로 소크라테스가 국가 공동체에 기여하는 시가의 가치를 역설하는 ─ 그것도 ‘산문체’로 ─ “시인이라고는 볼 수 없는 시가의 예찬자들을” 논박하고자 나섰을 때, 플라톤은 자신의 마음속에 이미 문하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 비호적 시각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방적 시가에 대한 플라톤의 주된 반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연민, 탐욕, 분노 등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의 주도로 억제되고 저지되어야 마땅한 격정들을 감싸거나 조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모방적이고 극적인 시가는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이 규율되어야 한다고 보았을 때, 그러한 정서들의 환기가 일상적인 상황에서의 통제를 어렵게 하기 때문에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정념들에 휩쓸리는 일시적인 경험마저도 감상자의 영혼에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인데, 무대에서 연출되는 타인의 수난에 대한 연민의 감정들을 방조하는 일은 감상자 자신의 삶에서의 불운의 예감을 잠재우는 데 있어 그다지 도움이 되질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이 유효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플라톤의 주장을 배격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열정의 홀황한 분출(enthousiasmos)로 고통을 겪는 시민들의 치유와 연관 지어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을 자극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느끼는 과도한 정념들을 해소시켜주는 ‘정화의 노래들’에 힘입어 병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야콥 베르나이스(Jakob Bernays)는 우리가 비극 작품을 관람함으로써 체험하게 되는 카타르시스를 연민과 공포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들의 촉발과 배설이라는 대등한 도식에 준하여 해명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접근 방식의 문제는 베르나이스 자신이 플라톤 미학의 난점이라고 치부했던 감정에 대한 전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견지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특정한 인간의 정서들을 주기적으로 해소될 필요가 있는 병적인 증후군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가정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조화와 균형을 이룬 감정의 반응들은 합리적 선택(prohairesis)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요건으로 기능하며, 그러한 반복적인 활동(energeia)들이 습관(ethos)으로 굳어진 결과, 기틀이 잡힌 탁월한 성품(ēthos)을 형성하고 또한 유지하게 된다는 사실을 면면 깊숙이 인식하고 있었다. 때로 사람들은 연민이나 분노 혹은 두려움을 느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정념들이 타당한 방식과 시의적절함 속에서 올바른 대상을 향하여 적절한 정도로 가늠될 수 있으려면 말이다. 적당한 동정심, 정당한 분노, 지나침이 없는 기개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좌우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마땅한 것이다. 상황에 맞추어 느껴야 한다! 과도한 두려움을 가지면 겁쟁이가 되고, 세상이 두려운 줄을 모르면 무모하고 터무니없는 인간이 된다. 정황에 어울리는 상대적으로 적정한 만큼의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용기의 덕을 획득하게 된다. 덕은 그렇게 우리의 유효적절한 정서적 반응에 달려 있는 것이며, 그 반응은 개인마다의 차이에 상응하는 극단들 사이의 중도에 달하여야만 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올곧게 감정을 느끼는 성향은 탁월한 성품을 계발시키는 첩경으로 된다. 설령 우리가 정의롭게 행하기를 내적으로는 강제하지만 기실은 다른 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자제력을 가졌다고(enkrateis)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충분한 만큼의 덕성을 갖추었다고 이르기는 어려운데, 진정으로 우리가 욕구하는 바가 우리의 행위와 호응을 이루는 조화의 상태를 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선을 행함으로써 선한 사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행위가 우리의 ‘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우리는 적절한 감정을 키워나감으로써 올바른 정서적 반응을 습성화시키게 된다. 인간의 감정 또한 인지적 요인들을 지니고 있기에, 그러한 반응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에 있어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이끄는 것이며, 그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덕성을 갖춘 참된 중용의 길에 보다 근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영문
  • Because the definition of tragedy makes the catharsis of pity(eleos) and fear(phobos) essential to the genre, the plots of tragedies are best structured in such a way as to represent the kinds of actions that are best suited to arouse those emotions. A good tragedy should not depict the fall of decent men from good fortune into misfortune, since this does not excite pity or fear, but is miaron, “disgusting,” literally “dirty” or “polluted,” provoking feelings of shock or revulsion. This evidently constitutes the opposite of catharsis, whether we take that term to mean “cleansing,” “purification,” “purgation” or “clarification.”
    The Poetics also specifically connects catharsis with mimēsis: the pleasure proper to tragedy(oikeia hēdonē) is “the pleasure that comes from pity and fear by means of representation.” Aristotle distinguishes between feeling pity and fear because of real events(which is not pleasant), and feeling these emotions because of a representation(which is pleasant). This distinction is confirmed by 1448b10-12: we derive pleasure from looking at representations even of things that are in actuality painful to contemplate, like the most despised animals and corpses; these objects are “impure” – once again evoking the idea of catharsis.
    Aristotle’s response to Plato’s attack on poetry is also a response to Plato’s view of the emotions. Indeed, when Socrates challenges those defenders of poetry “who are not poets but love poetry” to prove in prose that poetry is beneficial to society, Plato may already have had Aristotle in mind. One of Plato’s main objections to mimetic poetry is that it can nourish emotions – such as pity, lust and indignation – which would be better suppressed or restrained by the reasoning part of the soul. Mimetic and dramatic poetry is dangerous because the arousal of such emotions may make it difficult to restrain them in one’s everyday circumstances, putting the appetitive part of the soul in charge. Even the temporary experience of being under the control of such emotions can permanently affect the soul of the spectator, since nurturing feelings of pity for others’ sufferings on the stage makes it difficult to restrain such a reaction toward one’s own misfortunes in life.
    If Aristotle’s theory of catharsis is to hold, he needs to refute Plato on this point. Aristotle explains tragic catharsis by comparing it with the healing of people suffering from ecstatic outbreaks of emotion(enthousiasmos); these people are cured by “cathartic songs,” which excite their souls and thereby relieve their excessive emotions. Jakob Bernays argued that the catharsis which we obtain from watching a tragedy operates similarly, arousing and releasing undesirable feelings of pity and fear. The weakness of his approach is his assumption that Aristotle held the same wholly negative opinion of the emotions that Bernays attributes to Plato, and would therefore regard them as needing to be cleaned out periodically. Aristotle recognized that well‑balanced emotional reactions are a crucial factor in making correct choices(prohairesis) and thus in forming and maintaining a settled good character(ēthos). Sometimes one should feel such emotions as pity, anger or fear, if they are felt towards the right object, to the proper degree, in the correct way and at the right time. Proper compassion, justified anger and the right degree of courage can and should affect moral choice. We must feel the emotions rightly for the circumstances: if we have too much fear, we are cowardly; if too little, we are foolhardy. Only if we feel the correct amount of fear relative to the situation do we attain courage. Virtue lies in our having such appropriate reactions, reaching the mean between the extremes relative to ourselves.
    A disposition to feel emotion correctly in this way is essential to the development of good character. If we force ourselves to act justly, but in fact long to act otherwise, we are self‑controlled(enkrateis) but not fully virtuous, since our desires are not in tune with our actions. Just as we become good by habitually doing good, until good action becomes a “second nature” to us, so too by feeling emotion appropriately we become habituated to having the correct emotional responses. Because the emotions also have a cognitive component, such reactions help us to take the correct decisions, so that we approach nearer to the virtuous mea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전대의 시문학에도 부정적이었던 스승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응답은 인간의 감정 능력을 폄하하는 플라톤의 견해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이라고도 평할 수 있겠다. 모방적 시가에 대한 플라톤의 주된 반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연민, 탐욕, 분노 등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의 주도로 억제되고 저지되어야 마땅한 격정들을 감싸거나 조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모방적이고 극적인 시가는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이 규율되어야 한다고 보았을 때, 그러한 정서들의 환기가 일상적인 상황에서의 통제를 어렵게 하기 때문에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정념들에 휩쓸리는 일시적인 경험마저도 감상자의 영혼에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인데, 무대에서 연출되는 타인의 수난에 대한 연민의 감정들을 방조하는 일은 감상자 자신의 삶에서의 불운의 예감을 잠재우는 데 있어 그다지 도움이 되질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이 유효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플라톤의 주장을 배격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열정의 홀황한 분출(enthousiasmos)로 고통을 겪는 시민들의 치유와 연관 지어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을 자극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느끼는 과도한 정념들을 해소시켜주는 ‘정화의 노래들’에 힘입어 병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조화와 균형을 이룬 감정의 반응들은 합리적 선택(prohairesis)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요건으로 기능하며, 그러한 반복적인 활동(energeia)들이 습관(ethos)으로 굳어진 결과, 기틀이 잡힌 탁월한 성품(ēthos)을 형성하고 또한 유지하게 된다는 사실을 면면 깊숙이 인식하고 있었다. 때로 사람들은 연민이나 분노 혹은 두려움을 느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정념들이 타당한 방식과 시의적절함 속에서 올바른 대상을 향하여 적절한 정도로 가늠될 수 있으려면 말이다. 적당한 동정심, 정당한 분노, 지나침이 없는 기개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좌우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마땅한 것이다. 정황에 어울리는 상대적으로 적정한 만큼의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용기의 덕을 획득하게 된다. 덕은 그렇게 우리의 유효적절한 정서적 반응에 달려 있는 것이며, 그 반응은 개인마다의 차이에 상응하는 극단들 사이의 중도에 달하여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론은 스승 플라톤의 예술철학에 대한 치밀하고 효과적인 대응방식을 보여준다. 서구 미학사의 근간을 형성하는 이 두 관점의 본질적인 차이는 일반 대중들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극단적인 상황들을 그들의 삶 속에서 추구되어야 할 일상적인 사회 규범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어서 그들에게 재현물과 초월적인 실재를 분간해 내기를 기대하는 것은 기실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는 플라톤의 염세주의에서 드러나게 된다. 낙천적이고 현실적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는 반대로 시민들이 능히 모방품과 실재를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드라마의 감상에서 비롯하는 정서적 반응들을 고지식하게도 그들의 실생활에까지 확장시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객들은 플라톤이 가졌던, 드라마가 그려내고 들추어내는 정서적 유약성의 습성화를 향한 노파심을 떨쳐내며 카타르시스의 과정 속에서 유효적절한 감정의 반응들을 포착하게 될 것이다. 플라톤이 도시국가의 모든 구성원을 감수성이 지나친 숙성되지 못한 존재들로 염려하고 있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관심을 미성년자들에게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단지 청소년들에 관한 처방이었다면 플라톤의 급진적 극예술 비판론의 타당성을 재차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플라톤이 그랬던 데 비하여 교육의 역할에 대한 보다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성인들에게 개방된 문예 양식들에 대한 일체의 규제에 찬동하지 않았을뿐더러 그들이 가져다주는 감성적이고 이지적인 계몽과 교화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월한 예술과 저열한 예술을 감별해내어 형평에 맞게 포상을 내릴 수 있는 경각(警覺)한 감상자들의 원숙하고 식견을 갖춘 판단의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극단적인 행위의 연기는 성인 관객들로 하여금 적절한 정서적 반응들을 마음껏 체험함으로써 윤리적 실천의 중용(mesotēs)에 도달하도록 이끄는 필수적인 드라마적 요건이 될 수 있었지만, 충분한 인생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미성년의 청소년들에게는 미메시스와 실재를 여실히 분별해내지 못하는 미망(迷妄)과 현혹을 초래할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서양 정신의 출발을 알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 행위의 모방(mimēsis; 재현) 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우리를 일상의 감성적 차원에서의 중용(mesotēs) 상태에 보다 근접하도록 습성화시키는 유효적절한 방편이 될 수 있으며, 시문학, 특히 드라마는 성숙한 도시국가 시민의 양성과 지속적인 생애교육에 공헌할 수 있는 간과하기 어려운 역량을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관점은 예술적 재현과 대중매체에 대한 공공의 규제 및 교육과 공동체 사회에 있어서의 예술,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유서 깊을 뿐 아니라 현재 진행적인 논의의 골간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검토를 요구하는 중차대한 의의를 확보하게 된다.
    2000년을 넘어서면서 우리 학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철학에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을 창작과 모방, 비극론, 카타르시스 등의 개념에 준하여 《시학》의 좁은 틀 안에서만 분석하고 있을 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는 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예술과 도덕성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조명하고 있지는 않다는 뚜렷한 한계점을 갖는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본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과 윤리학을 상호 연계시켜 그들 사이에 놓인 본질적 상관구조를 직접적이고 적극적이며 전면적인 방식으로 규명해 보인 우리 학계 최초의 통섭의 시도라 할 수 있다.
    본 연구기획의 성공적인 이행은 국내외 저명 학술지의 논문 발표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어져갈 《시학 Ars Poetica》과 《수사학 Ars Rhetorica》에 대한 세밀하고 정교한 문헌학적ㆍ철학적 논증 분석에 힘입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가제) The Aesthetics of Aristotle》이라는 전문연구서를 탄생케 할 것이다. 본인은 스스로가 기획하고 있는 이 전문연구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오하고 난해한 논증들을 가능한 쉽게 풀이함으로써 학계 전문가들의 이해 지평과 시야를 넓혀줄 수 있기를 소망하며 대학의 주요 교재로서도 널리 활용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현대는 바야흐로 감성과 예술ㆍ문화의 시대이며, 이에 발맞추어 국내의 여러 대학에서는 교양과 전공의 커리큘럼 속에 예술철학이나 미학을 주제로 한 다채로운 강좌들을 마련하고 있다. 그런데 서구 최초의 미학 연구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2000년을 훌쩍 넘기는 유장(悠長)한 시차에도 불구하고 감성과 이성에 관한 깊고 예리한 인간학적 통찰력을 드러내 보이는 현재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본 연구기획의 주제인 ‘카타르시스(katharsis)와 중용(mesotēs)’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같은 《시학》을 제대로 온전하게 이해하도록 이끄는 핵심 개념일 뿐만 아니라 비극과 문학, 음악, 미술 나아가 예술 전체와 인간 사회 공동체의 도덕적 삶을 재조명하게 하는 본원적인 관점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의미심장한 본 기획의 연구성과는 교육에의 환류 측면에서 지원자가 이제까지 14학기에 걸쳐 진행해온 다수의 학부 및 대학원 미학 강의에 적용됨으로써 이 땅의 젊고 패기에 찬 지성인들을 보다 차원 높은 문화ㆍ예술적 지평으로 계도하게 될 것이다. 지원자는 또한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열린 토론의 장(일례로,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이나 사설 아카데미)을 마련하고 이러한 미학 토론 서클의 활동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이 갖는 문화ㆍ예술상의 보편적 가치와 구경(究竟)의 지혜를 일깨우며 이를 바탕으로 현시대의 문화ㆍ예술 현상에 대한 과감한 혁신의 필요성을 부각시킬 것이다.

  • 색인어
  •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호메로스, 《시학》, 《정치학》, 《수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미학, 심리철학, 윤리학, 카타르시스, 중용, 실재, 모방, 현혹, 대중매체의 규제, 공동체, 교육, 예술, 문화, 창작술, 서사시, 비극, 희극, 이야기, 플롯, 《오이디푸스 왕》, 비극적 결함, 영혼, 열정, 욕구, 감정, 연민, 공포, 고통, 상황, 적합성, 반응, 배설, 치유, 비극에 고유한 쾌, 잠재력, 합리적 선택, 활동, 습관, 성품, 자제력 있음, 조화, 덕, 정서적 유약성, 이상국가, 청소년의 보호, 본질주의, 현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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