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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후반 신라의 대일외교와 대재부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7세기 후반 신라의 대일외교와 대재부 | 2015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조이옥(이화여자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5S1A5B5A07038475
선정년도 2015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7년 01월 08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7세기 후반 양국관계의 실상에 접근하기 위한 방안으로 ‘대재부’가 교류의 장이었음을 검토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주요 연구방법으로는 양국관계에 대한 문헌사학적 방법과 고고학 분야의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이외 주요한 추진전략으로는 일본 측 사료인『일본서기』에 대한 한일 학계의 인식 차이를 극복하고 객관적인 양국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나당전쟁 이후 신라사의 내적 성장과 산업의 발전 등에 중점을 두고 일본 문헌에 나오는 율령제적 표현을 입체적으로 해석할 것이다.
    본 연구는 7세기 후반 대재부와 신라와의 관계를 통해 신일관계의 객관적 역사상에 접근하고자 한다. 주요 내용으로는 먼저 나당전쟁 이후 동북아 국제 정세의 추이와 더불어 신라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 제반 상황 및 일본의 사정을 검토하고, 다음으로 신라의 대일외교 전략과 왜전의 별치 문제 및 양국이 교환한 물품 내역, 그리고 대재부가 실제 교류의 장으로 기능한 사례 등을 통해 7세기 후반 신라의 대일외교가 갖는 역사적 위상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668년 국교를 재개된 이래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특이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676년 나당전쟁이 종결되면서 신라는 일본과의 교섭이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당과의 외교 단절 속에서 신라는 일본을 배후세력으로 이용하는 동시에 해외시장으로 개척하고자 했다. 따라서 신라의 대일외교 전략도 점차 정치중심으로 ‘경제적 측면’에 치중하는 외교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671년부터 신라는 일본의 교섭에서 다량의 물품을 교역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형태의 물품 교역은 679년부터 시작하여 680년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672년 임신의 난의 성공으로 집권한 천무정권(672-686)은 신라와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671년 이래 702년까지 당과의 국교 단절 상황에서 신라는 일본이 선진지식과 문물을 수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양국을 둘러싼 정세의 변화 속에서 신라는 대일교역에 소요되는 물품을 원만하게 조달하기 위한 관사로 내성 산하 倭典을 다시 설치하였는데 , 대체로 왜전이 재설치되는 시기는 신라의 대일 교섭이 급증하는 문무왕19년(679)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7세기 후반 양국교섭이 대재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은 신라사의 사행로를 통해 추적하고자 한다.『일본서기』에 전하는 668년부터 700년까지 신라사의 사행경로를 추적해 보면 구주의 筑紫에 입항한 신라사절은 藤原京에 입경하는 사례보다 대재부의 객관인 筑紫館(鴻臚館)에서 향응을 받고 귀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신라와 일본의 공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대재부의 외교기능은 더욱 강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7세기 후반 대재부와 신라와의 관계를 통해 신라와 일본이 율령제 하의 조공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경제중심의 외교를 전개한 사실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일본서기』에 나오는 朝貢, 調 라는 용어와 서술 내용이 8세기 율령제하의 일본 지배층의 대외이념의 산물이었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리라 생각된다.
  • 영문
  • This study explores into the reality of bilateral relationship between Silla and Japan through in the late 7th century. The study confirms that it was a transitional period for Silla and Japan’s diplomacy in the late 7th century, moving its stage from capital city to Daizahu located in the northern Kyushu area. And yet, the fact that Japan allowed this type of Daizhau diplomacy implicates that it was a diplomatic compromise to cope with Silla’s feeling of wariness.
    With this aspect, the study looks into the reality of bilateral relationship based on the nature and background how Daizhau diplomacy evolved in the negotiation process between Silla and Japan in the late 7th century. And the Daizahu diplomacy made under the supervision of Silla’s official delegation and Daizhau’s management was in the form of government enterprise. this is proven by the facts of its drastically increased armaments and high-profile diplomacy with japa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7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의 관계에 있어 ‘대재부’라는 교류의 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신일관계의 새로운 역사상을 정립하는데 목적이 있다.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세계에 있어 국가 간의 외교는 각국의 왕경에서 거행되는 외교의례를 통해 구현된다. 그런데 7세기 후반 일본의 경우 신라와의 외교교섭이 북구주의 ‘대재부‘를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때 양국 간의 외교는 의례를 중시하기 보다는 실무위주로 전개되고 있어 주목된다. 따라서 7세기 후반 대재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양국관계에 대해서는 조공관계의 범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복원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7세기 후반 신일관계에 대한 기왕의 연구는 일본학자들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일본학계의 경우 『일본서기』에 나오는 朝貢, 調 등 용어와 기술내용을 거의 비판 없이 수용하면서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시종 조공관계로 규정하고 있고, 한국학계의 경우 당의 재침을 우려해 신라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여 저자세외교를 추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본 연구는 기왕의 선행연구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종래 왕권 중심의 조공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실제 교류의 장인 대재부에 초점을 맞추어 7세기 후반 신일관계의 객관적 실상을 복원하는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본 연구를 추진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기왕의 대재부에 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그 동안 소홀히 다루어져 왔던 7세기 후반 대재부와 신라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서기』등 문헌 자료에 대한 사료비판 및 재해석과 함께 대재부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 유적에 대한 고고자료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검토 ·연구하여 양국관계의 객관적 실상을 복원해 보고자 한다.
    요컨대 본 연구는 7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의 외교교섭에 있어 대재부가 교류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신라의 대일외교가 기왕의 외교형식과는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음을 확인하고, 동시에 이러한 변칙적인 외교방식은 동아시아 변경에 위치한 일본의 내부정세에서 비롯되었음을 구명해 보고자 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일본우위의 연구 시각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안 모색에 기여
    본 연구가 의도한 대로 수행된다면 일본 우위의 연구 시각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왕의 고대한일관계사 연구에 있어 가장 큰 난관은 식민사관의 극복문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7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전하고 있는 일본 측 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상하 조공관계로 기술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학계는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조공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학계의 경우 기왕의 조공관계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본 연구가 의도한 바, 대재부와 신라와의 관계를 통해 율령제 성립 이전인 7세기 후반 양국 간의 관계가 조공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추적하고, 이러한 특이한 외교형태는 결국 동아시아 변방에 위치한 일본문화의 후진성과 폐쇄성에서 기인한 것임을 구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본 연구는 기왕의 일본우위의 고대한일관계사 연구의 시각에서 탈피하여 객관적· 균형적인 방법론을 제공하는 데 기여하리라 예상된다.

    2. 역사교육 및 역사 대중화에 활용
    교육적으로 본 연구는 동북아 역사 재단 등에서 실시하는 동아시아 역사 교육에 연구 성과를 활용하여 고대 동아시아 외교사 복원에 활용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올바른 한일관계사 정립에도 기여할 것이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여 일본의 한일관계사에 대한 역사 왜곡에 대응하는 새로운 논리 개발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 연구는 21세기 일본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에도 교육적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색인어
  • 통일신라, 일본서기, 신라사, 축자대재, 대재부, 북부 구주지역, 외교의례, 신라물,공물, 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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