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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서·남해상의 해적, 호족 그리고 해상(海商)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신라 하대 서·남해상의 해적, 호족 그리고 해상& #40;海商& #41; | 200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권덕영(부산외국어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2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4월 20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8세기 말 이후 당과 신라의 정치․사회적 불안과 빈부 격차에 따른 경제적 불균형으로 신라에서는 流移民이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동시에 각지에서는 독자적인 세력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 유이민 가운데 일부는 해적성향을 가진 해상세력가에게 투탁하여 해적이 되어, 당시 동아시아 해역을 빈번하게 왕래하던 민간무역선을 약탈대상으로 삼아 크게 번성하였다. 바다에서 해적들이 橫行하던 시기에 한반도 서․남해안 곳곳에는 해상활동을 통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군사력을 키운 이른바 해상호족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합법적 교역과 불법적 약탈을 병행하였는데, 9세기 후반 일본 해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신라 海商들의 해적활동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9세기 말 후삼국의 정립과 더불어 호족들 사이의 각축전이 보다 치열해졌다. 이에 각지의 호족들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위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해상호족을 포함한 재지세력들은 公利的 이념을 내걸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종전의 해적행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관할영역에서 활동하던 불법적인 해적을 토벌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 해적들은 해상호족에 흡수되거나 해체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스스로 공리적 이념을 내세우며 호족화하였다. 이처럼 해상호족의 해적행위 중지와 해적토벌 그리고 해적들의 호족화로 인하여 마침내 한반도 해역에서 해적이 사라졌고, 호족들 역시 고려왕조로 귀속됨으로써 점차 독자성을 잃게 되었다.
  • 영문
  • On account of a lack of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stability from the latter half of the eighth century onward in Silla, many people departed their native place and wandered from place to place. Some of them became a pirate and committed robbery at sea to make plans for support their lives. As the result, the western and southern sea of Korean peninsula was a pirate-ridden sea in a late Period of Silla.
    At that time, powerful local gentries(豪族) located in the various districts along the shore of the western and southern sea. For example, the Wanggun(王建) family and Youchungung(柳天弓) stood their ground at the northern part of the western sea, the Bokchigeum(卜智謙) and Paksulhi(朴述熙) family at the middle, the Ohdareun(吳多憐) and Choijimong(崔知夢) family at the southern. In addition to these, Changpogo(張保皐), Pakyoungku (朴英規), Kangbongku(姜逢規), Soyoulhi(蘇律熙) stood their ground at the shore of southern sea. They were generally said to be maritime local gentries.
    Maritime local gentries accepted those wandering peoples under their command and made use them for oversea trade. Moreover they striped other sea traders of goods and took people away by force of arms. For this reason, we can say that there was no sharp distinction between local gentries and pirates in a late period of Silla.
    Now struggle for mastery among the local gentries severed in the closing day of ninth century, they stood in need of support from people absolutely. To survive in a struggle for existence, the powerful local gentries discarded a pirate behavior and devised a public welfare ideology. Furthermore they translated it into practice. In the process of practicing the public welfare ideology, the maritime powerful local gentries suppressed pirates who have acted in their sphere of jurisdiction and put people's mind at rest. As the result, the western and southern sea of Korean peninsula in which pirates were prevalent in a late period of Silla became in equilibrium. At the same time powerful local gentries were subjected to Koryo dynasty. Hereby pirates and powerful local gentries who were the leading part of the political and social confusion in a late period of Silla left the scene of histor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8세기 말 이후 당과 신라의 정치․사회적 불안과 빈부 격차에 따른 경제적 불균형으로 신라에서는 流移民이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동시에 각지에서는 독자적인 세력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 유이민 가운데 일부는 해적성향을 가진 해상세력가에게 투탁하여 해적이 되어, 당시 동아시아 해역을 빈번하게 왕래하던 민간무역선을 약탈대상으로 삼아 크게 번성하였다.
    바다에서 해적들이 橫行하던 시기에 한반도 서․남해안 곳곳에는 해상활동을 통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군사력을 키운 이른바 해상호족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합법적 교역과 불법적 약탈을 병행하였는데, 9세기 후반 일본 해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신라 海商들의 해적활동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9세기 말 후삼국의 정립과 더불어 호족들 사이의 각축전이 보다 치열해졌다. 이에 각지의 호족들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위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해상호족을 포함한 재지세력들은 公利的 이념을 내걸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종전의 해적행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관할영역에서 활동하던 불법적인 해적을 토벌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 해적들은 해상호족에 흡수되거나 해체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스스로 공리적 이념을 내세우며 호족화하였다. 이처럼 해상호족의 해적행위 중지와 해적토벌 그리고 해적들의 호족화로 인하여 마침내 한반도 해역에서 해적이 사라졌고, 호족들 역시 고려왕조로 귀속됨으로써 점차 독자성을 잃게 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지금까지 소홀하게 취급했던 신라 서남해역의 호족을 구체적을 고찰함으로써, 9세기 해적의 정치 사회 경제적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2. 호족과 해상(海商) 그리고 해적을 상호 유기적으로 관련시켜 고찰함으로써, 신라말 고려초의 역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조명하였다.
    3. 9세기 동아아사의 전개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한국사의 연구영역과 시야를 확대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색인어
  • 신라 하대, 해적, 해상호족, 해상(海商), 민간무역, 공리적 이념, 한반도 서남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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