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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토지소유구조의 변이 - 조선후기~일제초기 경기도 안산군의 사례 -
Reports NRF is supported by Research Projects( 장기 토지소유구조의 변이 - 조선후기~일제초기 경기도 안산군의 사례 - | 2006 Year | 이영호(인하대학교) ) data is submitted to the NRF Project Results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A00239
Year(selected) 2006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09년 04월 25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09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안산군 해변가 간척지를 대상으로 두편의 논문을 작성하였다. 첫째 논문은 1720년 간척된 石場屯에서 토지소유권이 탄생하는 과정과 소유의 실태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논문은 조선후기 석장둔의 탄생과 변동을 전제로, 갑오개혁 이후 국가적 통제의 과정에서 석장둔이 어떻게 존재하며 특히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서 어떤 귀결을 보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제1논문 : 「조선후기 간척지의 소유와 경영 - 경기도 안산 石場屯의 사례」
    1720년 賑恤廳(흉년에 양식과 종자를 제공하는 기관)에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安山郡 草山面에 石場屯을 간척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석장둔에서 토지소유권이 발생하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진휼청에서는 소금기를 빼는 등 作畓과정에 민간인을 투입하고 투입한 노동과 자금에 따라 민간인에게 토지소유권을 부여하였다. 진휼청은 수조권을 행사하여 米 40斗(租 100斗)를 징수하였다. 미 40두는 민전 지세(結稅)인 미 23두보다는 높은 수준이고 왕실과 국가기관의 소유지(永作宮屯)에서 최소 미 80두(조 200두)를 거두는 것과 비교하여 헐하다. 수취액의 수준은 당시 석장둔에 존재하는 토지소유권의 존재방식을 규정한다. 당시의 토지소유권은 一物一權의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가지고 논할 수는 없다. 석장둔은 별도로 양안이 작성되고 진휼청에서 수조권을 행사하는 등 독자적인 농장으로 운영되었지만, 토지소유자의 소유권이 인정되어 매매가 가능하였다. 『안산석장둔양안』을 분석해보면, 간척에 참여한 양반가와 평민가의 가호는 44호로 같지만 소유지 비율은 2:1 정도로 되어 양반가가 평민가보다 2배나 많은 간척지를 확보한 것으로 추산된다. 평민가의 적극적인 개간 참여와 소유권 획득은 조선후기 私的 토지소유권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제2논문 : 「한말 일제초 토지소유권의 확정과 국유·민유의 분기 - 경기도 안산 石場屯의 사례」
    본 논문은 1720년 간척된 석장둔이 갑오개혁(1894년) 이후 어떤 변동과정을 거쳐 근대적 토지소유권으로 성립되는지를 추적한 것이다. 안산군 석장둔의 관리권은 간척을 주도한 진휼청에서, 18세기 말 정조가 수원에 설치한 壯勇營(정조가 수원으로 수도를 옮기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군영)으로, 그리고 19세기에는 수원부 총리영(군사기구)으로 넘어갔다. 갑오개혁 이후 석장둔은 다른 둔토(국가기관의 농장)와 마찬가지로 국가적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갑오개혁기에는 탁지부(정부의 재정기관)에서 조사를 실시하고(乙未査辦), 대한제국기에는 內藏院(왕실재정을 총괄한 재정기관)에서 조사를 하였다(光武査檢). 作人을 확인하고 賭租(지대)를 책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장원은 대한제국의 왕실 창고로서 장토의 기원과 관계없이, 연루된 장토를 公土化하기 위한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렇지만 1900년 실시된 광무양전사업에서는 처음에는 석장둔을 時主(토지소유자)로 파악했으나 곧 민유지임을 인정하고 둔토로서의 성격을 부인하였다. 왕실과 정부 사이에 석장둔의 소유권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이후 일제의 국유화 조치와 토지조사사업에서, 석장둔은 국유와 민유를 판별해야 하는 분쟁을 겪었다. 장토의 성립과정에서 민전의 지세 미 23두보다 높은 미 40두로 책정된 것이 원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최초부터 토지소유권을 민간에 부여하였고 2백여년의 매매문기가 확연하였기 때문에 민유지로 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조선후기 간척지에서 발생한 민유지의 토지소유권은 관리기관의 국유화 강제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근대적 토지소유권으로 확정되어 갔다.
  • English
  • Two articles are presented, both dealing with reclaimed land along the shore in Ansan-gun(District).

    Article #1: Ownership and Management of Reclaimed Land in Late Joseon Period -- the Example of Seokjang-dun in Ansan-gun, Gyeonggi-do(Province)
    In 1720, Jinhyul-cheong, a government agency in charge of distributing food and grain seeds in case of bad harvest, created Seokjang-dun in Chosan-myun(Canton) of Ansan-gun by reclaiming the shore, to expand funds. This article investigates the building process of land ownership in Seokjang-dun area. Jinhyul-cheong mobilized civilians to earthworks such as salt-removing for the development of rice fields, and granted them thereafter with land ownership in proportion to labor and capital invested in that enterprise. Instead, Jinhyul-cheong levied 40 dus -- 1 du is equivalent to approximately 18 litters -- of rice(100 dus of millet) using its own tax collecting right, the burden of which is comparatively heavier than that levied to ordinary civilians' paddy[23 dus of rice] and much lighter than that levied to paddies belonging to Royal family or state organs[80 dus of rice or 200 dus of millet]. It is true that Jinhyul-cheong administrated Seokjang-dun as an independant farm of its own, exercising tax collecting right, etc. But it should be noted that the ownerships of land holders were generally acknowledged and it was possible to sell or buy it. Analysing the Terrier of Ansan Seokjang-dun, we can find that the upper classes and common peoples joined the reclamation works in same number of households. But it also shows that their proportion of land ownership was 2:1 in size, the upper classes being superior to the common by two times. Nevertheless, the common peoples' active participation in reclamation works and acquisition of land therein need to be estimated highly as important indices proving the development of individual land ownership in late Joseon period.

    Article #2: Settlement of Land Ownership and its State-Civil Divergence, from the End of the Korean Empire to the Early Years of the Imperial Japan's Rule -- the Example of Seokjang-dun in Ansan-gun, Gyeonggi-do(Province)
    This article traces the process by which Seokjang-dun, reclaimed in 1720, came to be integrated into the modern system of land ownership after the Gabo Reform(1894). After the Gabo Reform Seokjang-dun came to be laid under the State's control like any other dun-land, which means a farm belonging to a national institution. Then nationwide official survey of state lands was performed. The object was to confirm actual cultivators and calculating land taxes to be levied. As Royal Treasury of the Korean Empire, Naejang-won pursued rigorous politics to nationalize such farm lands, regardless of their origin or history. But the case of Seokjang-dun shows that the process was not so smooth, even lacked consistency in part. By the Land Leasuring Operations of Gwangmu(光武) in 1900, Seokjang-dun was at first recognized as landowner of itself. But soon it was confirmed as private land, its presumably attributed characteristics of dun-land being denied. Yet, the question was far from being finally resolved. By the Land Research Project by Imperialist Japan, Seokjang-dun had to suffer troubles while oscillating between the state ownership and the private one. Leving of 40 dus (in rice) instead of 23 dus like ordinary civilians' paddy at the first years of that farm land, here was the root of such sufferings. Anyway, private land ownership was sanctioned from the first and selling-buying of it obviously continued to be practiced over 200 years thereafter, there arose few difficulties in officially acquiring private rights. Notwithstanding the enforcement of nationalization by the State institutions, private land ownership issued from the reclaimed land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became reconfirmed as such by the modern system of land ownership.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본 연구는 근대적 토지소유의 성립을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일거에 이식된 것으로 보지 않고, ‘장기적’ 흐름 속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조선후기에서 일제초기에 이르는 200여년 동안 토지소유권과 토지소유구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경기도 안산군의 토지변동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하여 검토하였다.
    토지소유구조에 대한 연구는 농민층분해를 위한 전제로서 또는 토지조사사업의 배경으로서 검토되기는 했지만 토지소유구조의 변동 자체를 직접 연구한 논문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조선후기에서 일제초기에 이르기까지 긴 변동을 추적한 논문은 거의 없었다. 조선후기의 토지소유구조가 어떻게 변이되며, 그것이 갑오개혁기 및 대한제국기에 어떤 변화를 겪은 뒤, 토지조사사업에서 어떻게 정리되어 가는지 추적한 논문은 찾기 어려웠다. 조선후기는 그것대로, 대한제국기 이후는 또 그것대로, 각각 연구시기별로 단절적으로 연구가 진행됨으로써 앞뒤 시기의 연속성의 의미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연구사의 현황이었다. 사회경제적 관행의 축적과 변이의 구체적 양상을 천착함으로써 장기에 걸친 토지소유구조의 변동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경기도 안산군을 사례로 택하여 그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안산의 경우에는 개간지를 양전한 石場屯量案이 있고, 광무양안과 토지조사부가 존재한 자료적 장점이 있었다.
    1720년 인천과 안산의 경계에 간척된 석장둔은 염기를 빼는 등 작답과정에 민간인을 투입하고 그에 따라 토지소유권을 부여하였다. 간척을 주관한 진휼청은 수조권을 행사하였는데 米 40두, 즉 租 100두의 수준이었다. 민전의 결세가 미 23두이고, 궁방과 아문의 소유지 즉 永作宮屯이 최소 미 80두, 즉 조 200두인 점에 비추어 보면 조 100두는 그 중간에 놓여 있다.
    최초 안산군 초산면에 간척된 석장둔과 유사한 유형의 농장은 안산의 바닷가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안산군 인화면 월입피 지역에도 설치되어 월입피둔으로 불렸다. 석장둔은 수원에 장용외영을 설치할 때 수조권이 넘어갔고, 장용영의 페지 이후 수원부 산하 총리영에 소속되었다. 이 토지 중 일부는 1866년 용동궁에서 매득하여 지주제로 경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오개혁을 맞이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전개된 일련의 궁장토, 둔토, 역토에 대한 국가의 정책은 이들 토지에 대한 국가의 소유권, 관리권을 강화하는 방향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장토의 기원에 따라 토지소유권의 소재가 다층적이었는데 갑오개혁 이후에는 그러한 기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조사과정에서 관행을 존중하여 도조책정에 반영하기는 하였으나 一物一權의 토지소유권제도에 입각하여 보면 장토를 국가의 소유로 기정사실화해 가는 방향이었다. 석장둔은 그 와중에서 선희궁, 내장원으로 소속되었는데 다른 장토와 마찬가지로 내장원으로 편입되어 갔다. 간척 당시부터 민간의 소유권을 인정해 왔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강력한 반발이 제기되었고, 그래서 광무양전사업에서도 처음에는 석장둔의 토지로 간주되었던 것이 검토과정에서 민간의 소유로 인정되었다. 궁내부 내장원과 정부의 탁지부 사이에 석장둔의 소유권에 대한 입장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을 보호국화한 일제는 재정개혁을 단행하였고, 그 대상으로 궁장토, 역토, 둔토도 포함되었다. 궁장토의 관리권이 탁지부로 넘어가 역토, 둔토에 통합되고 1908년 6월에는 이들 토지가 '역둔토' 국유지로 되었다. 1909년에는 역둔토실지조사를 실시하였고, 1910년 토지조사사업으로 이행되었다. 안산군의 토지조사는 1910년 9-12월에 토지신고서를 제출하게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석장둔은 민간의 소유지였지만 장용외영, 수원부 총리영, 선희궁, 내장원의 관리를 받으면서 공토화를 강요받았기 때문에 민간에서 완전한 소유권을 행사하는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국가가 소유권을 행사하고자 국유지로 통지한 것이다. 그렇지만 수백년간 민간의 사유지로서 매매되어 온 증거들이 명백하였기 때문에 분쟁의 결과, 민유지로 인정받지 않을 수 없었다. 1720년 탄생에서부터 시작된 토지소유권은 국가의 관리기관에 의하여 수조권이라는 형식으로 소유권 행사에 부분적 제약을 받았고,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개혁과정에서 국가적 필요에 의해 공토화를 강요받았고, 일제는 그것을 이어받아 국유지로 편입하고자 했지만, 결국 토지신고일 기준으로 근대적 토지소유권이 확정되었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첫째 이론 및 연구방법 측면으로, 전통과 근대의 연속적 이해를 위한 방법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재적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분법적 대립의 극복에도 기여할 것이다. 한국근대토지소유제도의 변화과정을 장기적인 호흡에서 연구할 필요성을 부각시켜 유사한 사례발굴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기 사례연구의 모델로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학문의 파급효과를 기대한다. 한국토지제도사 연구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광무양안과 토지조사부의 상관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광무호적과 민적부의 비교연구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토지소유권의 고유한 특성과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변질된 부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토지는 소유와 경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개발의 대상으로 변하여 극단적인 토지상품화 속에서 불로소득의 원천이 되고 있다. 바람직한 토지이용의 방향은 무엇인지 문제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 Index terms
  • 석장둔, 석장둔양안, 안산, 진휼청, 간척, 장용영, 총리영, 용동궁, 광무양안, 토지조사부, 선희궁, 내장원, 을미사판, 광무사검, 역둔토실지조사, 도장,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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