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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포로가 된 시베리아지역 한인의 귀환
이 논문은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해방후 해외한인의 귀환문제 연구 | 2002 년 인문사회분야지원한국근현대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장석흥(국민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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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명 한국독립운동사연구 - 등재후보 (ISSN : 1225702815)
발행정보 2003년 08월 01일 / Vol.20 No.0 / pp. 1 ~ 26
발행처/학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자수 1
초록
  • 국문
  •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되어 만주 관동군에 편입되어 있던 한인들은 1945년 8월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과 더불어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그해 9월 일본군 포로들과 함께 시베리아 각지에 수용되어 강제노역을 당하였다. 소련에 포로로 억류된 일본인의 수는 64만명에 달하며, 그 가운데 한인으로 소련에 억류된 포로는 1만명에서 1만 5천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한인 포로들은 주로 시베리아철도 연선지대에 산재한 포로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인 포로들은 주로 북만주 黑河에 집결하여 아무르강을 건너 블라고베시첸스크로 끌려갔으며, 이곳에서 시베리아 각지의 수용소로 흩어져 강제노역에 종사해야만 했던 것이다.
    한인 포로들은 기아와 혹독한 추위, 그리고 강제노역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강제노역은 주로 벌목작업과 감자수확, 시멘트 등의 하역작업, 제분소 작업, 건축 및 토목공사 등 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시베리아 억류 한인 포로들은 1948년 5월부터 일본인의 본국 송환에 편승하여 일본을 통하여 간혹 귀환하는 사례가 있었다. 대부분의 억류 한인들은 1948년 12월 나홋카 항구에 집결한 뒤 소련 화물선을 타고 흥남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1948년 12월 20일 흥남으로 귀환한 한인 포로는 2천 1백 61명이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남한 출신자 5백여명은 다시 38선을 통과하여 인천 국립수용소에 일정 기간 수용된 후 각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산발적인 귀환은 계속되었으며, 끝내 귀환하지 못한 채 소련에 남게 되는 한인 포로들도 있었다.
    일본군의 신분으로 시베리아지역에 강제로 끌려갔던 한인 포로들은 패전국 일본과 승전국 소련, 그리고 연합군사령부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에 철저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해방을 맞이한 상황에서도 시베리아 포로 수용소에서 3~4년간 인권을 유린당하며 잔혹한 강제노역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귀환 후에도 남북분단이라는 이데올로기 대치상황에서 상당한 기간에 걸쳐 정치적 상황이 고려된 여러 가지 제약이 가해짐으로써 중첩되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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