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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파리의 변화: 국왕의 처소에서 왕국의 수도로
이 논문은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수도의 역사적 의미: 프랑스, 러시아, 독일의 사례연구 | 2003 년 인문사회분야지원국내외지역 | 최갑수(서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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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명 서양사론 - 등재 (ISSN : 1229-0289) 외부링크
발행정보 2005년 09월 01일 / Vol.86 No.0 / pp. 35 ~ 61
발행처/학회 한국서양사학회
주저자 박용진
저자수 1
초록
  • 국문
  • 수도의 첫 번째 성격은 통치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봉건제하에서 국왕의 통치는 인적 유대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므로 중세 프랑스에 있어서 수도는 곧 국왕의 처소를 의미했다. 게다가 국왕이 실질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영역이란 왕령지에 불과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파리가 통치의 중심지로서의 수도가 되는 과정은 두 과정을 포함한다. 첫째는 국왕의 처소가 되는 과정으로서 클로비스로부터 존엄왕 필립 이전까지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협소한 왕령지의 중심지였을 뿐 왕국의 수도는 아니었다. 두 번째는 인적 유대관계를 통한 통치로부터 제도와 기구를 통한 통치로 변화되고 왕령지로부터 영토적 통일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으로서 존엄왕 필립으로부터 15세기까지이다.
    중세 사회가 기독교 사회였음을 고려한다면 수도의 다른 성격은 종교의 중심지라는 점이 될 것이다. 사실 파리가 프랑스에서 주요 도시로 성장한 것은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11세기 이래 파리에는 많은 수도원들이 세워졌고, 교회에 의해 수 많은 성당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는 학문의 발전을 가져와, 파리 대학을 유럽 전체의 신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파리에는 세속의 권력과 교회의 권위가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국 전역에 걸쳐 동등하게 수도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당연하게도 파리의 흡인력은 멀어질수록 약화되었다. 왕국의 주요 도시들은 파리를 왕국의 수도이자 왕국의 중심지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지방의 소도시들은 파리와의 지리적 거리와는 상관없이 지방의 대도시를 중심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중세 말 프랑스는 “제도상으로는 집중화되어 있고, 지리적으로는 분권화”되어 있었다. 비록 파리의 영향력이 왕국 내의 모든 신민에게 똑같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파리는 인구 20만이 넘는 도시로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였다. 요컨대 중세 말에 이르러 파리는 왕국의 신민 전체에게, 그리고 모든 면에서의 수도로서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리 이외의 도시가 왕국의 중심지이자 수도가 될 수 있다는 상상 역시 불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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