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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상세정보
14세기의 동 아시아 국제 정세와 왜구-공민왕15년(1366)의 금왜 사절의 파견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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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명 |
한일관계사연구
(ISSN : 1229-3687)
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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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정보 |
2007년 04월 01일
/
Vol.26
No.0
/ pp. 95 ~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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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학회 |
한일관계사학회 |
주저자 |
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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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수 |
1 |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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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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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이 15년(1366)에 일본에 왜구의 금압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한 외교 사절은 왜구가 발생한 지 무려 17년이나 뒤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려 조정이 17년 동안이나 사절 파견을 자제한 것은 원명 교체기의 혼란과 연동된 국내외의 혼란을 보이지 않기 위해 취해 ...
고려 공민왕이 15년(1366)에 일본에 왜구의 금압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한 외교 사절은 왜구가 발생한 지 무려 17년이나 뒤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려 조정이 17년 동안이나 사절 파견을 자제한 것은 원명 교체기의 혼란과 연동된 국내외의 혼란을 보이지 않기 위해 취해진 일관된 외교 정책에 입각한 것이었다.
또한 그 사절 파견은 원나라의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고려 조정의 단독적인 의지에 따른 것으로, 고려는 거짓으로 원나라 황제의 존재를 이용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고려의 의도는 적중해 당시 일본 조정은 약 1세기 전에 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나 침공해 온 사실을 떠올려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그 결과 일본은 그때까지 소극적이었던 규슈 지역에 대한 군사 개입에 적극성을 디기 시작했다. 새로운 규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슌의 파견과 그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공민왕 15년(1366)의 사절 파견은 소강상태에 있었던 남북조 내란을 단숨에 급진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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