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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祭天 전통에서 바라본 正祖代 天祭 기능의 회복
이 논문은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한국의 祭天 전통속에서 바라본 正祖代의 天祭·地祭 정비 | 2004 년 신진교수연구지원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정경희(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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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명 조선시대사학보 - 등재 - A
발행정보 2005년 09월 30일 / Vol.34 No.0 / pp. 159 ~ 200
발행처/학회 조선시대사학회
주저자 정경희
저자수 1
초록
  • 국문
  • 한국 고대 이래 고유의 仙道사상에서 연원하는 仙道 祭天의 전통이 존재하였는데, 고려에 이르러 이와는 계열을 달리하는 儒敎 祭天儀禮 및 道敎 祭天儀禮(醮祭)가 등장하였다. 특히 成宗代 유교 天祭儀禮가 도입되었고 실제 거행되기도 하였지만, 仙·佛 이념에 근간한 고려사회에서 제한적인 의미를 지녔다. 조선에 이르러 儒敎禮의 위상이 확고부동해지면서 儒敎 吉禮의 서열적, 수직적 성향이 더욱 전형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유교 길례의 大·中·小祀, 天·地·人祭로 분리하는 방식이 국가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면서 제후는 天에 제사할 수 없다는 인식이 더욱 분명해졌고, 그 결과 仙道 제천의례, 儒敎 제천의례, 道敎 제천의례 할 것 없이 天과 관련된 모든 제례가 폐지되었다. 조선인들에게는 한국 고대 이래의 선도 제천 전통이 이미 체질화되어 있었으며, 더하여 고려 이래 비록 계보는 다르지만 중국에서 도입된 새로운 유교식, 도교식의 제천 전통에도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각종 제천의례가 사라지고 난 빈자리가 극히 허전하게 다가왔다. 역사와 전통이 가장 오랜 선도 제천의례의 빈자리에 대한 상실감이 가장 컸으나, 왕실을 위시한 유교 지식인들에게는 선?? 제천의례에 대한 상실감은 잠재적인 것이었으며 선초까지 지속되던 유교 제천의례에 대한 상실감이 컸다. 유교 제천의례인 圓丘祭는 태조 즉위초 혁파론이 제기된 이래 성격이 바뀌고 폐치가 번복되는 등 지속적으로 약화되다가 세조대에 이르러 완전히 혁파되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무엇보다 사라진 원구의 기능을 대신할 대안을 찾아야 했다. 이에 원구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조선왕실의 권위를 담보하는 기능 및 기우의 기능은 조선이 지낼 수 있는 최고의 大祀인 社稷으로 이관되었고, 원구의 정월 祈穀 기능은 先農祭로 이관되?駭?. 社稷과 先農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원구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었겠지만 한계 또한 분명하였다. 天祭의 기능을 地祭인 社稷祭, 人祭인 先農祭가 대신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天祭·地祭·人祭 중에서 가장 존귀한 天祭의 빈자리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또 현실적으로는 농경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였던 ‘祈雨’나 ‘祈穀’ 문제가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전형적인 천제인 원구제는 지낼 수 없지만 제후례 속에 허용된 천제 유형의 제례에 관심을 기울여, 결국 유교 ‘天神祭’로서 제후례에도 허용되어 ?獵? ‘風雲雷雨祭’에 주목하였다. 고려시대 유교 吉禮 小祀로서의 風師·雨師·雷神祭는 한국인들에게 별로 의미가 없는 미미한 예제였지만 조선에 들어 세조대 원구제가 폐지된 이후 점진적으로 풍운뇌우제에 원구제의 의미가 부여되어 갔다.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으로 자처하고 있는 상황에서 풍운뇌우제의 남다른 의미가 공공연하게 표방되지는 않았고, 또 예제상으로도 풍운뇌우제는 여전히 中祀에 머물렀지만, 풍운뇌우제에는 ‘제천의례처로서의 南郊’의 의미까지 부여되고 있었다. 선초 원구제의 폐치 과정에서 風雲雷雨祭는 원구제의 대안으로서 주목되었으나, 점차 조선후기로 가면서 주자예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로 제후는 祭天할 수 없다는 유교례 원칙이 더욱 강조되면서 풍운뇌우제의 의미가 약화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전기 왕실이 풍운뇌우제에 부여했던 의미는 어느덧 잊혀지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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