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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발명과 근대역사학의 성립
이 논문은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신라의 발견 : 식민지 시기 만들어진 신라 표상의 연구 | 2005 년 인문사회분야지원심화연구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황종연(동국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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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명 신라문화 - 등재 (ISSN : 1229-0939) 외부링크
발행정보 2007년 02월 01일 / Vol.29 No.0 / pp. 125 ~ 142
발행처/학회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주저자 윤선태
저자수 1
초록
  • 국문
  • '통일신라'라는 시대구분은 신라인들의 '일통삼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근대에 들어와 발명된 것이다.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신라통일론은 백제, 고구려의 멸망에서 기점을 잡는 전통시대의 일통삼한론 또는 신라정통론이 아니라, 나당전쟁을 거쳐 당세력을 축출한 676년을 핵심적 기점으로 삼는 2단계 통일론에 입각해있다. 이러한 인식은 하야시(林泰輔)의『朝鮮史(1892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를 번역하여 갑오~광무개혁기 때 국사교과서 편찬에 활용했던 김택영, 현채 등을 통해 조선에 수용되?웜뇩?.
    하야시가 애초 나·당의 대립을 강조하는 2단계 통일론을 구상한 것은 당시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추구했던 일본의 아시아연대주의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갑오~광무개혁정권은 이러한 하야시의 조선사체계를 '국사'로서 수용하여, 청으로부터 독립한 근대 조선의 ‘국민’을 창출하려고 했다. 특히 현채는『조선사』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하야시가 강조한 ‘임나일본부설’을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청만이 아니라 일본까지도 조선민족의 타자로 의식하는 ‘국사’의 확립을 지향하고 있었다.
    현채의 시각은 이후 부여-고구려족을 주체로 한 민족사를 주창한 신채호의「독사신론(1908)」에서 크게 비판받지만, 이조차도 현채의 책이 그만큼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더욱이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이래 제국 일본이라는 타자를 통해 통일신라의 문화가 세계적 문화로 극찬되고, 곧이어 석굴암의 발견, 금관총, 서봉총의 발굴이 이어지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통일신라’는 조선문화의 근원이며, 민족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결과 황의돈의『대동청사(1909)』와 안확의『조선문명사(1923)』?엔? 남북국시대를 설정하고 있지만, 발해보다 오히려 신라의 통일을 강조하였다.
    1920~30년대를 거치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통일신라의 이미지는 민족의 형성과 민족문화의 연원으로서 확고히 자리매김 되어갔다. 문일평이 ‘朝鮮心’의 근원으로 표상한 통일신라론이나, 해방 후 손진태가 신라 통일을 민족의 결정기로 이해한 것도 그 당연한 결과였다. 일제시대에 부여-고구려족 주체설과 남북국시대론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통일론이 의연히 강화되어간 것은 민족사를 ‘발전적’으로 설명해야만 하는 ‘국사’의 본질적 속성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통일신라론’의 발명과 확립은 민족이라는 배타적 역사단위와 그 발전을 키워드로 삼는 한국 근대역사학의 성립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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