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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의 학문세계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이수광의 학문세계 | 2003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이현희(서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59
선정년도 2003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5년 03월 0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5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 󰡔芝峰類說󰡕에 나타난 李睟光의 對外認識
    - 대외인식 형성의 배경과 평가 문제를 중심으로 (한명기)
    이수광의 서양에 대한 인식과 대외관은 분명 선진적인 것이었다. 그는 평소의 부지런한 독서, 임진왜란의 체험, 그리고 세 차례의 중국 使行을 통해 다른 지식인들보다 외국 문물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 체험은 이후 그가 중국, 일본, 여진 등 주변국을 인식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수광은 특히 왜란 이후 국방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장차 일본과 여진에 대한 방어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수광의 대외인식은 동아시아 전체의 수준에서 보면 선진적이지 못했다. 17세기 초반 당시 조선의 대외 접촉 빈도가 中日에 비해 적었고, 이민족과 이문화에 대한 인식의 폭이 상대적으로 협소했고 특히 임진왜란을 통해 일부에서 對外通商, 重商論 등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면서도 그것을 현실에서 정책으로 실현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2. 이수광의 자아인식과 타자인식 (김문식)
    이수광은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중화문화라는 기준에서 판단했고, 조선은 고려에 비해 진전된 중화문화, 유교문화를 가진 것으로 이해했다. 중화문화라는 기준에서 볼 때, 명은 각종 제도의 모범이 되는 국가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구원병을 파견하여 조선의 위기를 구해준 은혜의 나라였다. 그러나 명이 조선에 과도한 은을 요구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수광은 일본이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안긴 원수의 나라이고, 무예를 중시하고 사람을 쉽게 죽이는 이적의 나라로 보았다. 그러나 이수광은 일본의 제도에 장점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수광은 주로 중국의 서적을 통해 아시아 및 서양 국가를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서양 지도를 보았지만, 세계가 5대주로 구성되고 중국이 아시아 대륙의 동쪽에 위치하는 서양의 지리체계를 수용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 실재를 인정할 수 있는 세계는 언제든 수용하겠다는 개방적 태도를 가졌다.

    3. 󰡔지봉유설(芝峰類說)󰡕의 한문학적 업적 (최 웅)
    󰡔지봉유설󰡕은 문학비평서로서 사실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문학의 위상을 도학과 대등한 것으로 논리화함으로써 문학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여 문풍 쇄신의 토대를 마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중 한문학사 정리를 통해 자국 문학이 중국문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등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자국문학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였음을 살펴 볼 수 있었고, 따라서 󰡔지봉유설󰡕이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이론서나 비평서로서 귀중한 문학유산임을 밝힐 수 있었다.

    4. 李睟光의 󰡔芝峰類說󰡕과 조선 후기 名物考證學의 전통 (안대회)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17세기의 학문전통에서 어떻게 출현하여, 이후 18, 19세기의 조선 학술과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나아가 명대의 학술동향과 맺는 관계망 속에서 저술의 의의를 분석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우선 󰡔지봉유설󰡕의 성격을 분석하여 이 책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高麗 이래 筆記類 저술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類書라는 새로운 저술 형태를 도입한 저작으로서, 필기류에서 유서의 형태를 취한 최초의 저술임을 밝혔다.


    5. 이수광의 국어학적 인식에 대하여 (이현희)
    이 글은 芝峰 李睟光의 󰡔芝峰類說󰡕에 담겨 있는 국어학적 인식에 대하여 살피고자 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芝峰類說󰡕이라는 텍스트의 온전한 이해의 관점에서 그에 포함되어 있는 국어학적 기술들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기존의 업적에서 정음기원론과 관련하여 주목된, 권 18의 ‘我國諺書字樣, 全倣梵字’라는 기사는 우리 문자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글자체의 유사성에 대한 언급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어원론은 대체로 타당한 것이 많았으나, 한자나 한문의 쓰임새에 이끌린 견해도 많았다. 五行의 배정은 易理에 따른 것이 아니라 樂理에 따른 것임이 밝혀졌다. 이것은 󰡔訓民正音󰡕의 <制字解>가 易理의 五行으로 논의한 사실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 영문
  • Lee Su-kwang's recognitions of external world in Chibongryuseol

    Han, Myung-gi

    Lee Su-kwang's knowledges of overseas and western world in 17th centuries are clearly advanced. He came to have many chances to meet foreign things through diligent readings, the experiences of Japanese invasion in 1592, the three round formal visits to Ming dynasty. He also had the opportunity to meet the Vietnamese diplomat, during his stay in Beijing and to come into contact the western books and maps which the Jesuit mission had brought. Those encounters and experiences enabled him to have more knowledges and broader understandings of external world than any other contemporary intellectuals had.
    In 15th centuries, Korean intellectuals had much knowledges of western world, which were brought to Yuan dynasty by Arabian merchants and crews. In spite of having that knowledges, most intellectuals were obsessed with the China-centered world order. In 16th centuries, Portuguese and Spanish have made inroads into East Asian areas, which served as a another momentum to have the Chinese and Japanese intellectuals' understanding of world changed. The Portuguese merchants and the Jesuit missionaries introduced western style bird guns and Roman Catholicism, which was encountered by Korean intellectuals like Lee Su-kwang who were staying in Beijing.
    Lee Su-kwang's experiences of Japanese invasion in 1592 was a paradoxical opportunity for him to have keen senses of China, Japan, and Jurchen Manchus. After war Lee Su-kwang laid great emphasis on taking a proper steps to prepare against another possible invasions from Japan and Manchus.
    Considering the frequencies and widths of contemporary Chinese and Japanese contacts with external world, it is inadequate for us to regard Lee Su-kwang's knowledges of overseas and western world in 17th centuries as being advanced. The Korean intellectuals's external recognitions were smaller and narrower than those of Chinese and Japanese's.
    There had been an atmosphere to put a high value on mercantilism, circulation of money, foreign trade, and the use of commerc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but the trend was not succeeded to postwar period. In contrast to Choseon Korea, Tokugawa Japan made much efforts to increase foreign trade and by which she came to contact more and more countries and obtain much more informations about external world. Under the such circumstances, it was impossible for Koreans to be able to abolish the gap of foreign informations.
    In short, I think it is necessary for us to revaluate Lee Su-kwang's recognitions of external world in view of the whole East Asian perspectives.

    Key Words : Lee Su-kwang's recognitions of external world, Chibongryuseol, Japanese invasion in 1592, The Jesuit missionaries, Senses of China, Japan, and Jurchen Manchus, Mercantilism, Matteo Ricci, China-centered world order, Kim Man-seong, The gap of foreign information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 󰡔芝峰類說󰡕에 나타난 李睟光의 對外認識
    - 대외인식 형성의 배경과 평가 문제를 중심으로 (한명기)
    이수광의 서양에 대한 인식과 대외관은 분명 선진적인 것이었다. 그는 평소의 부지런한 독서, 임진왜란의 체험, 그리고 세 차례의 중국 使行을 통해 다른 지식인들보다 외국 문물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 체험은 이후 그가 중국, 일본, 여진 등 주변국을 인식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수광은 특히 왜란 이후 국방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장차 일본과 여진에 대한 방어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수광의 대외인식은 동아시아 전체의 수준에서 보면 선진적이지 못했다. 17세기 초반 당시 조선의 대외 접촉 빈도가 中日에 비해 적었고, 이민족과 이문화에 대한 인식의 폭이 상대적으로 협소했고 특히 임진왜란을 통해 일부에서 對外通商, 重商論 등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면서도 그것을 현실에서 정책으로 실현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2. 이수광의 자아인식과 타자인식 (김문식)
    이수광은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중화문화라는 기준에서 판단했고, 조선은 고려에 비해 진전된 중화문화, 유교문화를 가진 것으로 이해했다. 중화문화라는 기준에서 볼 때, 명은 각종 제도의 모범이 되는 국가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구원병을 파견하여 조선의 위기를 구해준 은혜의 나라였다. 그러나 명이 조선에 과도한 은을 요구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수광은 일본이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안긴 원수의 나라이고, 무예를 중시하고 사람을 쉽게 죽이는 이적의 나라로 보았다. 그러나 이수광은 일본의 제도에 장점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수광은 주로 중국의 서적을 통해 아시아 및 서양 국가를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서양 지도를 보았지만, 세계가 5대주로 구성되고 중국이 아시아 대륙의 동쪽에 위치하는 서양의 지리체계를 수용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 실재를 인정할 수 있는 세계는 언제든 수용하겠다는 개방적 태도를 가졌다.

    3. 󰡔지봉유설(芝峰類說)󰡕의 한문학적 업적 (최 웅)
    󰡔지봉유설󰡕은 문학비평서로서 사실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문학의 위상을 도학과 대등한 것으로 논리화함으로써 문학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여 문풍 쇄신의 토대를 마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중 한문학사 정리를 통해 자국 문학이 중국문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등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자국문학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였음을 살펴 볼 수 있었고, 따라서 󰡔지봉유설󰡕이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이론서나 비평서로서 귀중한 문학유산임을 밝힐 수 있었다.

    4. 李睟光의 󰡔芝峰類說󰡕과 조선 후기 名物考證學의 전통 (안대회)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17세기의 학문전통에서 어떻게 출현하여, 이후 18, 19세기의 조선 학술과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나아가 명대의 학술동향과 맺는 관계망 속에서 저술의 의의를 분석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우선 󰡔지봉유설󰡕의 성격을 분석하여 이 책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高麗 이래 筆記類 저술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類書라는 새로운 저술 형태를 도입한 저작으로서, 필기류에서 유서의 형태를 취한 최초의 저술임을 밝혔다.


    5. 이수광의 국어학적 인식에 대하여 (이현희)
    이 글은 芝峰 李睟光의 󰡔芝峰類說󰡕에 담겨 있는 국어학적 인식에 대하여 살피고자 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芝峰類說󰡕이라는 텍스트의 온전한 이해의 관점에서 그에 포함되어 있는 국어학적 기술들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기존의 업적에서 정음기원론과 관련하여 주목된, 권 18의 ‘我國諺書字樣, 全倣梵字’라는 기사는 우리 문자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글자체의 유사성에 대한 언급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어원론은 대체로 타당한 것이 많았으나, 한자나 한문의 쓰임새에 이끌린 견해도 많았다. 五行의 배정은 易理에 따른 것이 아니라 樂理에 따른 것임이 밝혀졌다. 이것은 󰡔訓民正音󰡕의 <制字解>가 易理의 五行으로 논의한 사실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芝峰 李睟光(1563~1628)은 務實을 강조하는 학풍을 진작시킨 인물로 그동안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아 왔다. 사실상 그는 實學의 선구자였다. 또한 그의 저서 ≪芝峰類說≫은 조선시대 실학의 단초를 연 매우 중요한 업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광의 학문과 ≪지봉유설≫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는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수광의 학문적 업적과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 대한 총체적 · 종합적 연구의 필요성이 절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수광이 살았던 시대는 임진왜란이 남긴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정묘호란이라는 또 다른 전란이 닥친 동아시아의 격변기였거니와 동시에 西勢의 東漸이 가시화되고 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 같은 시대적 환경 속에서 이수광은 당시 조선에서는 보기 드문 國際人이었다. 宣祖 연간부터 光海君 연간을 거쳐 仁祖 연간에 이르는 시기에 이루어진 이수광의 仕宦과 중국으로의 使行을 통해 얻은 견문과 식견은 그가 국제인으로서의 대외감각을 지니고, 나아가 훗날 ≪지봉유설≫을 쓰는 데 기본적인 바탕이 되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百科全書的 내용을 담고 있는 저서로서, 조선 후기 실학의 시초라고 일컬어진다. 이 저술은 매우 다양한 성격과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조선 후기의 주요한 학술사상의 하나인 考證學, 당시의 용어로 말하자면, 名物度數之學의 가장 중요한 시초를 연 저작이다. 주자성리학의 사고체계로부터 이탈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물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관심사를 드러내고, 그의 사실진위 여부를 밝힘으로써 올바른 지식을 알리려는 계몽적 의도를 보인 최초의 저작인 것이다. ≪지봉유설≫은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널리 이용하고, 많은 저술에서 인용되면서 우리 학문의 발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고증적 학풍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봉 이수광의 학문적 업적을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지봉유설≫을 면밀하게 검토함으로써 학제간 협동연구의 장점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을 것인바,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대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실학시대의 국어관과 국어학적 연구성과를 종합하되, 특히 ≪지봉유설≫에 반영되어 있는 국어학적 연구를 면밀하게 검토함으로써 실학자들이 행하였던 국어학적 연구태도를 곱씹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지봉유설≫은 실학시대 類書의 효시라고 할 만하다. 실학시대부터 조선조 후기까지 편찬되어 나온 類書 편찬의 역사를 더듬어 살핌으로써 현대의 목록학 · 분류학적인 연구에 큰 시사점을 던질 수 있다. 이미 조선 중기부터 ≪訓蒙字會≫ 등의 분류서가 없지 않았으나, 이러한 것은 초학자를 위한 字書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한계를 보인다. 구체적인 분류의 방법을 제시하고 그것을 학문적인 성과로 끌어올린 것은 ≪지봉유설≫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봉유설≫은 현대의 어휘 분류 작업에도 방법론적인 시사점을 충분히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셋째, ≪지봉유설≫에 포함되어 있는 이수광의 문학적 성과에 대해서도 다각적인 접근을 꾀할 수 있다. 이수광의 한문학적 성과와 일화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는 그의 국문학사상 위치 매김을 분명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지봉유설≫과 이수광의 문집류에 들어 있는 經學思想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실학에서 차지하는 이수광의 위상과 ≪지봉유설≫이 가지는 실학에서의 위상을 여러 각도에서 재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지봉유설≫에는 외교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증언들이 많이 담겨 있다. 외교사 연구가 부족한 현 상황에서 볼 때, ≪지봉유설≫에 대한 외교사적 검토는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 색인어
  • 이수광, 지봉유설, 대외인식, 예수회 선교사, 대항해 시대, 중국인식, 일본인식, 여진인식, 풍극관, 김만상, 동아시아, 중화문화, 유교문화, 명, 일본, 서양, 재도지기 문학관, 실사구시, 성정, 신(神), 변증작업, 원류비평, 비교비평, 교정비평, 심미비평, 사실주의 문학세계, 類書, 叢書, 백과사전, 考證學, 名物度數, 筆記, 텍스트의 온전한 이해, 정음기원론, 어원설, 五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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