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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中國 魏晋南北朝시기 西南方 諸民族의 種族的 整體性과 그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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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선도연구자지원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3-041-A20040
선정년도 2003 년
연구기간 1 년 (2003년 12월 01일 ~ 2004년 12월 01일)
연구책임자 김유철
연구수행기관 연세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중국 위진남북조시기 호북과 호남, 그리고 운귀와 사천일대에 널리 나타나는 제민족의 종족적 정체성과 그의 활동을 단순히 소수민족의 차원에서 漢化되어가거나 통치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인 활동을 통하여 위진남북조시대 역사의 한축을 형성해 가는 역사적 주체로서 조망한다. 이들은 漢族의 입장에서 蠻 俚 越 등의 비하적이고 분화되지 않은 명칭으로 불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들의 사회조직과 이동 분포 등을 통하여 각각이 갖는 사회적성격이나 문화요소 그리고 공동체적 결집력 등의 층차를 분석하여 그들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규명한다. 아울러 그들의 한족과의 관계에서의 활동을 통하여 위진남북조시기의 역사적 위상을 재정립하도록 한다. 본연구는 광동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越族, 荊州와 豫州 등 양자강중류와 淮水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蠻族, 그리고 四川 雲南 貴州일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료족'으로 표현되어 있는 종족 등 3부류를 나눌 수 있는데, 2년차의 연구에서는 마지막의 료족을 대상으로 한다. 료족은 특히 분포지역이 비교적 넓게 나타나면서도 중심 거주지이 서남 오지로서 중국의 사서에 기록이 많지 않아, 그 종족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러나 기왕에 진행된 蠻族과 越族의 종족적 특징을 기준으로 료족의 정체성을 추출하고 그들의 활동을 추적하면서, 그 역사적 확인하는 것이 본연구의 목표이다. 연구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작업은 북방의 羌族과 남동방의 越族의 관계와 비교에 관한 부분, 그리고 소수집단 단위로의 이동에 의한 산재된 분포상황의 실상을 복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기대효과
  • 중국 민족사상 가장 활발한 분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실상을 규명함으로서, 현재 중국 소수민족의 기원과 정체성에 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중국사에서 한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의 인식과 中華관념이라는 의미부여에 대한 실상과 본질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중요한 고리를 확인하는 의의를 갖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단순히 한족사회의 내부구조의 특징과 변화과정으로만 이해되던 위진남북조라는 분열기의 역사적 성격을 남방민족과의 관계에서도 규명할 수 있는 근거를 추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본 연구에서 강조되는 종족 이동과 南北朝와의 정치외교적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남북분열이라는 정치적 상황이나 분열적 사회구조, 예술 의술 등 다양한 문화의 혼재라는 위진남북조 수당시대의 특징이 상당부분 남방의 제민족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측면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현재 티벳족의 원류인 唐代 '토번' '토욕혼'의 종족 형성과 그 사회구조의 기원에 대한 해명에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연구요약
  • 이시기 중국 西南지역의 대표적인 민족은 '료'라고 할 수 있지만, 이외에 蠻과 羌의 일부가 나타나기도 하고, 극히 소수 몇개의 명칭이 드러난다. 본연구는 지역별로는 서남지역에 중점을 두지만, 이 시대 이지역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료'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연구의 기본적인 대상은 '료'로 설정하고, 이와 관련된 설명과정에서 羌과 蠻 이나 기타 종족 등을 보조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구체적인 연구내용은 먼저 '료'에 대한 종족적 실체의 규명이다. 당시 료종족의 형성은 기본적으로 移住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료가 분포되어 있는 대표적인 지역은 사천 운남 귀주이다. 나머지 호북이나 때로는 강소 광주지역에서도 료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 蠻이나 越과 합해져 대체로 이민족의 통칭으로 사용된 경우를 제외하고 종족적 정체성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1년차의 연구에서 蠻 특히 豫州蠻이 형주일대에서 북천한 경우로서 그만큼 한족사회와의 유사성이 강하고 종족적 정체성이 약하다는 것은 밝혔는데, 강소 광주의 료도 바로 이러한 예주만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한족을 비롯하여 다른 종족과의 접촉이 확대되면서 흡수과정을 거쳐 쉽게 종족적 정체성이 상실되어 버린다. 당대에 이들지역에 요족이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은 이러한 흡수과정의 결과이다.
    이주의 대표적인 현상은 사천북부 섬서일대 과거 양주 익주에 집중된 료에서 찾을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 한대에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던 료가 위진남북조에서 분명한 종족적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은 바로 사천 북부로의 이주에서 비롯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원래 광주의 越이나 호남의 만과 구분이 모호하던 漢代以前과는 달리 독자적인 종족성이 드러나게 되는 과정으로서, 가장 중요한 계기는 蜀漢시기 諸葛亮의 南蠻征伐이었다. 정벌은 곧바로 강제적인 이주를 동반하게 되고 이어 자발적인 이주가 확대되는데, 한족의 입장에서는 이 과정에서 호남의 蠻과 이들 료족이 구분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남방민족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는 蠻이라는 칭호가 위진남북조 시기 호남북의 종족으로 한정되어, 운남 귀주와 사천지역의 료와 분화된 것이다.
    이들의 이주로 인해 당시 양주와 익주지역에서 과거의 羌族과 종족적 혼합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요소와 사회적 특징이 료사회에 흡수되게 된다. 또한 이주의 결과 종족적 통합이 이루어질 경우 양주와 익주지역에 정착하면서 한족의 국가권력과 연계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종족갈등으로 발전하면서 동쪽 강회지역을 따라 더 많은 이주가 행해져 강소와 광주까지 분포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즉 료족은 여러지역의 종족이 통합되어 형성되는 측면이 강한 것으로, 위진남북조 사서에 蠻과는 달리 토템이나 사회구성상의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종족적 주체성에 입각한 지도자가 확인되지 않는다. 혼거하는 한족에 의해 사회통합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左郡이나 左縣과 같이 국가권력에 의한 별도의 지배기구도 발달하지 않았다. 그만큼 종족적 문화적 혼합성이 많았던 것이다. 당대 이 지역에서 별도의 민족이 확인되지 않은 것은 이처럼 미약한 종족성이나마 해체되고 중국사회에 편입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양주와 익주에 정착하여 종족적 기반을 확보한 료족은 남북조말기 남조와 북조의 각국가권력으로부터 치열한 회유경쟁의 벌어지게 되는데, 이시기 이 지역에서 州의 확대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회유과정에서는 북조정권이 우세를 점하게 되고 결국 남북조 대립에서 북조우세의 결과는 부분적으로 료족 사회에 대한 회유경쟁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료족과 만족과 마찬가지로, 위진남북조라는 독특한 정세속에서 민족적 정체성이 형성된 것으로 가장 중요한 동인은 '이주'였다. 아울러 이러한 료의 존재는 남북대립과정이 장기화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료족은 남북의 상호 경쟁에 있어서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함으로서 종족적 정체성을 유지하였지만, 남북조 말기 급격한 북조편향을 보이면서 남북대립의 구도해소에 일정 정도 의 요인이 되었다.
  • 한글키워드
  • 소수민족,남북대립,梁州,南渡,北遷,民族問題,益州,티벳,羌,蠻,료 俚,種族的 整體性,魏晋南北朝,漢族共同體,蠻漢關係,南中國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獠는 주로 四川地域에서 출현하여 그 기원을 西方의 羌族과 南方의 蠻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주로 蠻이 거주하였던 湖北省과 俚가 거주하던 廣東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다. 이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獠의 지역적 분포의 시기적 변화를 정리하는 작업과 姓氏別 활동상황의 지역과 시기별 분포 및 각 姓氏에서 나타나는 특징에 관한 정리를 진행하였다. 특히 蠻이나 俚와 겸칭되는 경우 즉 ‘蠻獠’와 ‘俚獠’라는 표현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夷獠’라는 표현도 魏晋南北朝 이후 唐代에 걸쳐 광범하게 나타나는데, 시기적으로 약간 뒤에 나타나는 ‘夷獠’의 의미를 확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獠는 四川 西北部 羌族이 蜀지역으로 이전하면서 南方에서 北上해온 漢代의 南蠻집단과 혼합되어 새로운 종족적 특성으로 파악되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種族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蠻이나 俚와 유사하지만, 서로다른 종족이 혼재되면서 새로운 종족으로 파악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종족과는 다른 獠만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이동성은 매우 활발한 편으로 위진남북조시기 중국대륙이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다양한 루트를 통하여 東進하면서 확장되는 특성을 갖는다. 漢中地域을 통하여 湖北지방으로 확장되기도 하고, 長江 三峽을 통하여 東進한 집단은 이들 지역에 산재하는 蠻과 충돌하기도 하고 혼합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일부는 다시 廣東地域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魏晋南北朝 말기에는 廣東지역과 현재의 越南北部에서 俚와 獠가 혼재되어 있는 상황이 나타난다.
    결국 蠻이나 俚에 비해 종족적 정체성이 가장 약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魏晋南北朝末부터 唐代에 이르기까지 ‘夷獠’라는 명칭으로 자주 나타난다. 당말에 와서는 남방민족의 범칭적 범주로 ‘夷獠’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종족적 정체성과는 별도로 명칭으로만 보면 그 생명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種族名으로 蠻이나 ‘俚’가 唐末에는 해소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獠’만은 宋元시대까지 계속 나타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종족적 정체성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느냐는 별 문제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남방 소수민족의 정체성이 주로 明代에 확립되는데, 수많은 민족이 ‘獠’에서 기원을 찾는 경우가 많은 것은 바로 불확실한 정체성과 광범한 범주를 포괄하는 종족명이라는 이유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영문
  • Having their origin in the Qiang of west China and the Man of south China, the Liao inhabit mostly in the Sichuan region. But the unique feature of this people lies in the fact that they are also found in the Hubei Province, the habitat of the Man, and the Guangdong Province, that of the Li . In order to illuminate the characteristics of this people, I have examined the changes over time in their regional distribution, regional and temporal difference in their activities according to the different family names they assumed, and the characteristics of each group of varying family names. I focused my attention particularly on the occasions on which the term Liao appeared combined together with the Man and the Li like "Manliao " or "Liliao " and tried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such expressions. In addition, I also aimed to demonstrate the meaning of the term "Yiliao ", which began to appear a bit later than "Manliao" and "Liliao" since the Six dynasties and was widely found in the Tang sources.

    Through my research, I have discovered that the Liao came to be identified as a new ethnic group, when the Qiang, who used to live in the southwest of the Sichuan Province, migrated to the Shu region and became intermingled there with the southern Man of the Han dynasty, moving up from the south. Their experience of ethnic migration was the same as that of the Man and the Li. They were different from the other two groups, however, in that they became mixed with other ethnic groups and came to be identified as a new ethnicity. The unique feature in their great territorial mobility is that they expanded their habitat moving eastward via various routes in the political turmoil of the Six Dynasties: some found their way to the Hubei region through the Hanzhong basin; others, moving further east crossing the Three gorges, clashed with and sometimes were intermingled with the Man, who were scattered through this region; some of them moved again down to the Guangdong region. By the end of the Six Dynasties the Li and the Liao were found, mixed together, in the Guangdong Province and in the northern part of today's Vietnam.

    In this sense, we can say that the ethnic identity of the Liao was weaker than that of the Man or the Li. For this reason, they often appeared in the sources as "Yiliao " from the Six Dynasties through the Tang.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by the end of the Tang the term "Yiliao" came to be used as a generic name for the southern ethnic minorities. Moreover, "Liao"continued to appear in the Song-Yuan sources whereas "Man" and "Li" lost their meaning as the name of specific ethnic groups by the end of the Tang. This strong continuity and persistence of the term "Liao"does not mean, however, that the ethnic identity of the Liao was preserved intact. Today, many of the southern ethnic minorities, whose identities were formed in the Ming, claim their origins in the Liao. It is precisely because the term "Liao" indicated rather porous, vague ethnic identity and covered broad categori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中國 魏晋南北朝 時期 西南地域의 민족상황은 전시기인 漢代나 이후 唐代와는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다양한 名稱의 종족이 이 시기에만 등장하였다가 사라지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대표적인 것이 ‘蠻’ ‘俚’ ‘료’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지역적으로 구분되는 특성을 보이면서도 때로는 혼재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漢代에서는 종족명은 물론 魏晋南北朝時期의 거주지역에서 독자적인 종족이 거주하고 있었던 상황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唐代에서는 이들 종족명이 현격히 줄어들다가 唐宋연간에는 사라지면서, 이들의 後裔를 분명히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들 자료 중 종족명으로 료는 正史에 400여건이 확인된다. 그렇지만 다른 종족에 비해 正史이외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이는 獠가 실제의 종족적 정체성에 입각한 구체적인 종족을 가리키기보다는 중앙조정에서 파악하고 있는 관념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江南지역의 민족문제에서 獠는 단순히 하나의 종족으로서의 범위를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이 시기에 나타났던 많은 종족이 唐朝에 들어 쇠퇴하였다가 唐末에 들어 거의 소멸되어 버린 것과는 달리 獠는 당말부터 ‘夷獠’라는 범칭의 이름으로 여전히 광범하게 존재하면서 宋元시대까지 계속되었던 것은 하나의 종족으로의 獠와 南方民族 일반에 대한 파악의 의미로서의 獠가 혼재하였던 특성을 잘 보여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번 연구의 종결은 위진남북조시기 종족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목적으로 하였던 장기적인 연구과제에 대한 종결의 의미를 갖는다. 필자는 본 연구와 함께 기왕 蠻과 俚에 대한 연구와 江南文化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여, 魏晋南北朝를 전후한 시기의 남방종족문제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서를 출판하려고 한다.
    그에 앞서 본 논문을 중국어로 발표하여 중국학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고자 한다. 물론 이전에도 俚에 관한 연구를 중국의 학술지에 발표하여 그 평가를 받은 적도 있는데, 그 성과가 적지 않아 이번에도 같은 과정을 거칠려고 한다.
    하나의 저서로서 출판할 때 기존에 발표하였던 논문을 한데 모으는 방식을 탈피하여,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시대적 특징을 찾는 방식의 편제를 취하려고 한다. 따라서 기왕에 발표한 논문을 전면 해체하여 새로운 체제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시일이 요구된다.
  • 색인어
  • 少數民族, 蠻, 民族移動, 魏晉南北朝, 夷, 俚, 리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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