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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고려시대 磁器所의 구조와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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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선도연구자지원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3-041-A00006
선정년도 2003 년
연구기간 1 년 (2003년 12월 01일 ~ 2004년 12월 01일)
연구책임자 이희관
연구수행기관 한국고대사학회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고려 청자가 중국인들마저도 자신들의 청자를 제쳐놓고 天下第一로 꼽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고려인들은 이러한 고려 청자 가운데 최고급 청자를 翡色靑磁로 불렀다. 이들은 하나같이 한 개의 匣鉢에 한 개의 器物을 넣어 정성스럽게 燔造한 것들이다. 비색청자의 釉는 맑은 녹청색을 띠고 있으며 半失透性이어서 깊고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宋代에 중국인들이 중국의 여러 名窯의 청자를 제쳐두고 천하제일의 명품으로 일컬은 것은 바로 그러한 翡色靑磁였음이 분명하다.
    고려의 翡色靑磁는 10세기 후반경에 康津窯에서 제작되기 시작하여 12세기 전반경에 절정기에 이른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 17대 왕인 仁宗의 長陵에서 출토된 靑磁瓜形花甁과 그 一括品으로 대표되는 가장 전형적인 비색청자의 대부분은 바로 12세기 전반경에 제작된 것들이다. 그리고 宋代에 고려에 사신으로 온 徐兢이 목격하고 자신의 저서인 ꡔ宣和奉使高麗圖經ꡕ에 남긴 고려 청자도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비색청자였다.
    비록 12세기에 접어들어 康津窯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扶安郡 柳川里窯에서도 비색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하였지만, 그 규모와 품질의 측면에서 볼 때 비색청자의 중심적인 窯는 어디까지나 강진요였다. 그리고 그러한 비색청자와 관련된 강진요의 위치는 수백 년간 지속되었다.
    비색청자가 출현할 당시 우리나라의 중서부지방과 남서부지방에는 많은 靑磁窯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에서 강진요에서 비색청자가 출현하고 아울러 한동안 그 窯에서만 비색청자를 생산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강진요가 다른 窯들과 달리 비색청자의 생산을 시작하여 그것을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지속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 단지 강진요 運營主體의 자의적인 노력의 결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보다 좀더 근본적으로 청자생산체제상의 구조적인 뒷받침에 힘입은 바 크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본 연구자는 그것이 磁器所體制라고 확신한다. 강진요에 大口所와 七陽所라는 유명한 자기소가 있었으며, 그것들이 모두 940~970년대 전반경에 설치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 시기가 강진요에서 비색청자가 출현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요컨대 강진요와 고려 비색청자와 자기소체제는 뗄 수 없는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磁器所를 중심으로 한 비색청자의 생산체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비색청자를 생산한 강진의 磁器所―大口所와 七陽所―의 구조는 어떠하였는지, 그 운영체계, 즉 生産과 貢納體系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자기소체제는 어떻게 전개되어갔는지 등, 비색청자의 생산체제와 관련된 가장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조차 거의 관심을 기울여오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므로 오랜 기간 동안 비색청자에 대한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비색청자의 명성과 세계 도자사적 위치에 걸맞지 않게 그것에 대한 이해가 거의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의 해결이 없이 비색청자에 대한 보다 심화된 이해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본 연구자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본 연구는 바로 고려 비색청자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고 아울러 강진요를 비색청자의 중심 窯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한 磁器所體制의 성격과 구조를 파악하고 아울러 그 전개과정을 추적하는 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를 통하여 강진요의 자기소체제의 성격과 구조 및 그 전개과정이 파악된다면, 우선 도자사적인 측면에서의 차후의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까지 磁器所體制에 대한 도자사적인 시각에서의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일부 학자들이 비색청자의 고향인 강진요와, 강진요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12세기경부터 비색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한 扶安郡 柳川里窯가 대표적인 지기소였으며, 자기소가 기본적으로 官窯였을 것이라거나, 국가의 監造 아래 청자를 제작했을 것이라는 주장 정도가 눈에 뜨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도 적지 않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같이 도자사적인 측면에서의 자기소에 대한 연구가 부진을 면치 못해 온 원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銘文이나 기록 자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 점에 유의하여 명문과 기록 자료들을 면밀하게 분석할 것이기 때문에 도자사적인 측면에서의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본 연구는 문헌사적인 측면에서의 자기소에 대한 연구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문헌사적인 측면에서의 연구는 주로 명문이나 기록 자료들에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소의 많은 遺構들이나 그곳에서 출토되는 많은 청자 자료들에 대한 분석을 소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명문이나 기록 자료들은 극히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자기소의 경우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를 보완해 줄 수 있는 훌륭한 자료들이 바로 遺構나 청자 자료들이다. 이것들은 특히 자기소의 생산체제와 그 변천과정 등에 대한 많은 정보를 줄 수가 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문헌사적인 연구들이 더욱 진전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여겨진다. 본 연구에서 시도하게 될, 유구들과 청자 실물자료들에 대한 다양한 분석은 문헌사적인 측면에서의 연구에도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磁器所의 문제는 도자사와 문헌사의 양쪽 모두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두 분야의 유기적인 이해 속에서 비로소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가 있다. 이제까지 자기소에 대한 연구가 부진을 면치 못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즉 도자사와 문헌사의 어느 한 쪽의 입장에서 문제에 접근할 경우 그 이해의 폭과 깊이는 그만큼 좁고 얕아질 수밖에 없다. 본 연구는 자기소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기소에 대한 연구 풍토에 신선한 자극제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에서 맨 먼저 관심을 기울여 볼 문제는 磁器所가 고려의 郡縣制上에서 차지한 위치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견해는 크게 두 개로 갈려 있다. 그 하나는 磁器所가 일반 郡縣과는 별도의 특수한 행정구역으로서 중앙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소가 일반 군현의 촌락에 설치되어 기본적으로 중앙이 아닌 군현의 지배체제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다. 전자를 따를 경우, 자기소는 그것이 위치해 있는 군현의 명령체계에서 독립하여 중앙의 직접적인 명령을 따르는, 다시 말하면 일반 군현과 同格의 행정구역이 되는 셈이다. 반면에 후자를 따를 경우는 자기소는, 수취체제상의 부담 내용이 다를 뿐, 군현의 지배를 받는 일반 촌락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는 <高麗史> 78 食貨志 1 貢賦 睿宗 3년 2월 判과 <新增東國輿地勝覽> 3 京畿道 驪州牧 古跡 登神莊條가 쥐고 있다. 이 두 기록에 대한 보다 정치한 검토는 우리를 문제의 해결로 이끌 수 있다고 믿는다.
    다음으로 검토해볼 문제는 자기소의 구조에 대한 것이다. 특히 자기소를 이끌어간 지휘기관 즉, 所司의 구성에 여기에서 살펴볼 주요한 과제이다. 본 연구자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제까지 거의 주목을 받아오지 못한 湖巖美術館 所藏 靑磁象嵌菊牡丹文「辛丑」銘벼루의 銘文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기록에는 고려시대의 가장 유명한 자기소인 大口所의 戶正을 지낸 徐敢夫라는 사람이 보이는데, 서감부의 존재야말로 대구소의 所司의 구조을 추적할 수 있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믿는 것이다.
    자기소의 전개과정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주로 비색청자의 고향인 大口所와 七陽所에 국한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본 연구자는 칠양소가 있었던 칠양면 三興里窯와 대구면의 龍雲里窯와 桂栗里窯와 沙堂里窯 등에서 출토되는 청자편의 양식과 출토상황 등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대구소와 칠양소의 생산실태의 시기적 추이를 추적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대구소와 칠양소의 부침뿐만 아니라, 자기소가 청자생산을 중지하였을 경우 그 자기소의 사회적 위치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는 자기소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에 이르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되리라 믿는다.
  • 한글키워드
  • 徐敢夫,신증동국여지승람,고려사,계율리요,所司,도자사,강진요,大口所,七陽所,자기소체제,비색청자,삼흥리요,용운리요,戶正,사당리요,군현,湖巖美術館 所藏 靑磁象嵌菊牡丹文&#65378;辛丑&#65379;銘벼루의 銘文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瓷器所의 성격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그것의 지방통치제제상의 성격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瓷器所를 포함한 所들이 일반 郡縣과는 별도의 특수한 행정구역으로서, 통치체제상 中央官司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 일반 군현의 촌락에 설치되어 기본적으로 중앙이 아닌 군현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계사료와 근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前者가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근래 瓷器所를 포함한 所에는 그 지배기구인 所司와 所吏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유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靑磁象嵌菊牡丹文⌈辛丑⌋銘벼루의 銘文 등을 통하여 볼 때, 瓷器所에 所司와 所吏가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所司의 구조는 일반 군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所長과 副所長, 그리고 司戶․司兵․司倉계열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표적인 瓷器所인 大口所의 경우는 徐氏가 所吏의 職任을 역임하면서 所司를 장악하였다.
    고려의 瓷器所의 운용은 초기에는 다수의 瓷器所로 출발하였으나 국가의 의도에 따라 점차 大口所를 제외한 瓷器所들에서 청자의 생산․공납이 중단되면서 대구소 중심의 운용체제로 귀결되었다. 청자의 생산․공납이 중단된 瓷器所들은 사실상 瓷器所의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所體制를 유지하면서 국가에 三稅를 납부하였다.

  • 영문
  • Two opinions exist regarding the characteristic of local governance system of Jagiso which is deeply concerned with proving its uniqueness. One opinion is that So including Jagiso was directly connected with the central authorities in terms of governance system as a separate administrative district from general Gunhyeon(郡縣), and the other opinion is that it was set up in the villages(村) of general Gunhyeon and thus, under the control of not the central authorities but Gunhyeon. As a result of reviewing the literatures and evidences in a critical manner, however, the former is deemed to be proper.
    Recently, an opinion is strongly rising that the headquarter of So(所) and the hereditary functionaries of So did not exist in So including Jagiso(瓷器所). However, seen from the inscription of Celadon Inkstone with 「Sinchuk(辛丑)」 inscription, there is no room for doubt that they existed in Jagiso. The headquarter of So consisted of the head and the vice head in the hereditary functionaries, Saho(司戶), Sabyeong(司兵) and Sachang(司倉) in order like general Gunhyeon. For Daeguso(大口所), a representative Jagiso, the members with family name Seo(徐) dominated the headquarter of So, successively holding official duties of the hereditary functionaries of So.
    In the Goryeo Dynasty, Jagiso had been run in multiple numbers at the early stage, while it had increasingly turned to Daeguso as the production and tribute payment of celadons were discontinued in Jagiso except Daeguso according to the government's intention at the later stage. Such Jagiso maintained the system of So and paid the three kinds of taxes(三稅) to the government even if they lost the function as Jagiso.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瓷器所의 성격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그것의 지방통치제제상의 성격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瓷器所를 포함한 所들이 일반 郡縣과는 별도의 특수한 행정구역으로서, 통치체제상 中央官司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 일반 군현의 촌락에 설치되어 기본적으로 중앙이 아닌 군현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계사료와 근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前者가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근래 瓷器所를 포함한 所에는 그 지배기구인 所司와 所吏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유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靑磁象嵌菊牡丹文<辛丑>銘벼루의 銘文 등을 통하여 볼 때, 瓷器所에 所司와 所吏가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所司의 구조는 일반 군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所長과 副所長, 그리고 司戶․司兵․司倉계열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표적인 瓷器所인 大口所의 경우는 徐氏가 所吏의 職任을 역임하면서 所司를 장악하였다.
    고려의 瓷器所의 운용은 초기에는 다수의 瓷器所로 출발하였으나 국가의 의도에 따라 점차 大口所를 제외한 瓷器所들에서 청자의 생산․공납이 중단되면서 대구소 중심의 운용체제로 귀결되었다. 청자의 생산․공납이 중단된 瓷器所들은 사실상 瓷器所의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所體制를 유지하면서 국가에 三稅를 납부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를 통하여, 瓷器所는 일반 郡縣이 아닌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있었고, 자기소에는 일반 군현의 邑司와 유사한 구조의 所司가 존재하였으며, 다수로 출발한 자기소가 大口所 중심의 운용 체제로 귀결되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본 연구는 앞으로 고려시대의 지방통치체제 가운데 논란이 많은 부곡제 문제에 대한 보다 심층적으로 고찰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고려청자의 생산체제에 대한 연구에도 이 결론을 적용할 경우 보다 내실 있는 검토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본 연구자는 이 연구가 비록 자기소라는 매우 한정된 주제에 대한 것이지만, 나아가 고려청자와 중국청자와의 실제적인 관계를 밝히는 데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색인어
  • 瓷器所, 所, 郡縣, 所司, 所吏, 大口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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