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물질의 분리, 사유와 과학, 사유와 물질의 분리는 사유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그 분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체, 우리의 언어, 우리의 호흡을 몇 개의 세계들로 분할하는 결과를 낳는다. 창세기에 의하면 신은 공간을 창조한 후, 시간을 창조했다. 칸트에 의하 ...
정신과 물질의 분리, 사유와 과학, 사유와 물질의 분리는 사유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그 분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체, 우리의 언어, 우리의 호흡을 몇 개의 세계들로 분할하는 결과를 낳는다. 창세기에 의하면 신은 공간을 창조한 후, 시간을 창조했다. 칸트에 의하면 시간은 주체 내적인 것이요, 공간은 주체 외적인 것으로, 이는 주체가 세계를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인 선험적 주체의 형식들이다. 주체는 이런 선험적 형식을 통해 공간을 분할하고, 자신의 용도에 맞게 공간을 구성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세계를 구성해왔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그 자체로 반쪽만의 세상이 된다. 물질, 그리고 물질로 구성된 우리의 육체, 그리고 물질과 동일시되는 자연, ‘자연’이나 ‘동물성’의 이름으로 종종 포괄되는 ‘여성’과 ‘유색인’, ‘원주민,’ ‘괴물’, ‘외계인’ 그리고 유령들, 차이들, 환영들, 시뮬라크르들, 이 모든 것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남을 ‘순수한 진리’를 위해 사라진다. 플라톤이 물질을 한갓 정신의 그림자로 간주하여, 정신만의 ‘에로스’를 설파한 것도, 곧 죽어 없어질 육체나 물질에 대한 경멸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주체에 의해 구성된 물질성의 범주는 그 자체로 부동의 상태가 아니며, 그 자체로 하나의 단일한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인간 역사의 닫혀진 본질을 위협하고, 열어젖힌다. 에로스가 육체와 ‘아직-아닌-존재’인 물질성을 초월할 때, 풍요의 신인 포로스와 궁핍의 여신인 페니아 사이에서 태어난 에로스의 태생 자체에서부터, 에로스, 즉 사랑이란 ‘중간’(intermediacy)이요, ‘과정’(becoming)임을 잊는 것이다. 자궁에의 회귀본능, 결코 채워지지 않는 그 본능에 대한 향수 역시 우리의 삶을 몇 개의 세계로 분할한 결과이다. 수많은 동시대의 철학자들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애도하는 까닭 역시 크레온의 상징계적 질서를 위해 도시 국가의 동굴 속에서 죽어간 안티고네를 자아의 개방적 윤리성이나, 자아의 차원을 넘어서는 실재계를 억압한 결과로 읽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자신의 두뇌를 다운로드해놓을 날을 기다리는 과학자 한스 모라벡과 같은 사이버 인간에게도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가 형이상학의 역사를 세우기 위해 방어기제를 발동하여 실재계로 내려 보내버린 물질성과의 관계맺음이다. 결국 이 시대의 윤리는 이성을 초과하는 물질성과의 관계 맺음과 소통 위에서 새롭게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는 근대적 사유의 주변 혹은 심연 속으로 밀려난 다양한 차이적이고 유령적인 물질적 실체를 통해 근대를 본격적으로 반성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19세기 초반에 쓰여진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소설, 근대를 대표하는 동시에 근대의 가치를 근대 속에서 질문하는 20세기 초반의 D.H. 로렌스(D.H. Lawrence),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폴 오스터(Paul Auster), 도리스 레씽(Doris Lessing), 캐시 애커(Kathy Acker), 리처드 파워즈(Richard Powers), 데이빗 월러스(David Foster Wallace), 안젤라 카터(Angela Carter) 등의 영미 소설가들의 텍스트와 더불어, 제1세계 바깥의 물질성을 구성하고자 하는 마하스웨타 데비(Mahasweta Devi)와 레슬리 실코(Leslie Marmon Silko)의 텍스트들을 통해 정신/물질의 이분법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윤리학을 모색하고자 한다.
참고로 한 권의 학술서로 출판될 본 연구의 장별 요약은 다음과 같다.
제1장 1절의 “물질성과 언어오용”에서는 서구 형이상학의 시발을 알리는 플라톤에서 디오티마라는 한 여성을 전유하면서 물질을 삭제 하에 구성해 나가는 방식과 21세기에 원주민 정보원이 삭제 하에 씌어지는 방식을 연계하여 고찰함으로써, 환원할 수 없는 기표로서 물질의 전유방식을 모색하고자 한다. 2절의 “시뮬라크르의 물질성과 탈재현의 정치학”에서는 물질/정신, 실체/시뮬라크르, 본질/현상을 구분하여 그 중 하나에 특권을 부여해온 서구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비판하고 물질적 정신, 시뮬라크르적 실체, 현상적 본질이라는 새로운 유령적, 환상적, 시뮬라크르적 물질성을 데리다, 지젝, 들뢰즈의 이론을 중심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실체와 본질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강조해온 재현의 형이상학보다는 실체와 시뮬라크르, 본질과 현상, 물질과 정신이 서로 융합하고 결합하는 독특한 양식을 탐구하고, 특히 그것이 결합하는 시간이 일반화가 불가능한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사건의 시간이며 그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시뮬라크르의 물질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그리고 3절의 “질료, 책, 픽션: 폴 오스터 소설 읽기”에서는 들뢰즈의 의미에서 질료로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