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과제 검색 > 연구과제 상세정보

연구과제 상세정보

한국의 祭天 전통속에서 바라본 正祖代의 天祭·地祭 정비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교수연구지원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4-003-A00007
선정년도 2004 년
연구기간 1 년 (2004년 07월 01일 ~ 2005년 07월 01일)
연구책임자 정경희
연구수행기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한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 문화의 원형중 하나가 바로 祭天의 전통이다. 종래 제천 전통의 흐름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제천이 행해지던 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제천이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던 시기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儒敎禮 吉禮의 본격적 도입과 함께 제천 의례가 폐기된 조선초 이후 다시 제천 의례가 부활되는 대한제국기 이전 시기의 제천 전통에 대한 연구는 더욱 부족한 형편이다. 제천 의례를 폐기하게 만든 유교례 길례의 中華主義的 배타성으로 인해 당시에는 제천의 존재가 까마득히 잊혀졌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천이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다고 하더라도 후대에 다시 복구되는 등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고 어떠한 식으로든 그 여맥이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제천의례가 중지된 시기에 대한 연구는 제천의례가 행해지던 시기에 대한 연구와 마찬가지로 꼭같이 중요하다.
    대한제국기 제천의례의 부활이 백지에서 솟아난 조처가 아닐 진데 비록 공식적 기록은 별로 없지만 간접적으로 제천의례와 관련된 기록, 역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사건 등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 공백기 동안 제천의례에 대한 조선왕실의 입장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던 사실은 주목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공식적 면에서는 조선초 제천의례를 폐기할 때의 입장이 한결같이 표방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선왕실의 입장 또한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초 이후부터 대한제국기 이전까지의 시기에 제천의례의 여맥을 확인하고자 할 때 가장 주목되는 것이 바로 18세기 正祖代의 天祭 및 地祭 정비이다.
    요컨대 필자는 이 연구를 통해 조선 중·후기의 시기에 祭天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제천 전통이 완전히 단절되었던 것이 아니라 유교례의 틀내에서나마 제천의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오랜 제천의 전통을 이으며 더 나아가 조선의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려 하였던 시도가 있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주지하듯 우리나라는 고대 이래로 오랜 祭天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 유구한 시간 동안 제천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한 이해는 한국사의 특색을 밝히는 주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제천의식은 한국 고대 이래의 고유의 사상을 담은 종교 의례였을 뿐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지배층이 국가를 유지해나가는데 있어 매우 효과적인 통치 이념일 수 있었다. 종교사상적인 측면에서든 아니면 역사적인 측면에서든 한국의 제천 전통에 대한 연구는 제천 의례가 실제로 행해졌던 시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곧 고대 이래 조선초에 이르는 시기, 또 대한제국기의 제천 의례 및 그 종교사상적, 역사적 의미에 대한 연구가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하므로 조선초 제천의례가 폐기된 시점부터 대한제국기 제천의례가 부활하기전까지의 시기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시기 국가의 공식적인 제천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드러나는 제천 관련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연구가 당연히 저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와중에서도 제천의례의 회복과 관련한 일부 논자들의 주장들, 또 이를 儒敎禮 吉禮의 틀에서나마 회복시켜보려는 시도 등이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 18세기에 이르러 유교례의 한계내에서나마 제천의례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정조의 天祭 및 地祭 정비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는 정치사상적인 면에서 조선왕실이 조선의 자주성 회복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뜻이며 이러한 입장이 누적된 결과 고종대 제천의례가 부활되고 또 조선의 國體가 격상되는 극적인 조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필자는 이 연구를 통해 한국의 제천 전통사에서 누락되어 있는 조선 중·후기 제천에 대한 조선왕실의 입장 및 유교례 내에서 제천의례를 회복해내려는 시도 등을 밝혀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기대되는 효과는 첫째, 한국 제천 전통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해 넣음으로써 한국 제천 전통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내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둘째, 조선왕실이 유교의 틀 내에서나마 조선의 자주성을 지켜내려 하였던 면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국 제천의 전통이 갖고 있는 국가적 자주성에 대한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한국사속에 드러난 제천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 연구요약
  • 유교의 중화주의적 명분론을 수용, 吉禮 부분에서 제천 의례를 포기한 후 조선왕실은 단지 제후국으로서 地祭 이하의 길례만을 지낼 수 있었는데, 정조대 이전까지 조선왕실은 이러한 체제에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 사정은 달라지게 되었다. 이는 당시 강력한 집권력을 추구하는 탕평군주의 등장 및 이에 따른 조선예학 경향의 변화와 연관되고 있다. 영·정조대 탕평군주의 예학 경향은 기존의 주자예학 일변도의 경향에 대해 왕실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것이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五禮가 새롭게 정비되었다.
    이처럼 五禮의 재정비 과정에서 당연히 오례중 가장 비중이 높은 吉禮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초 천제가 폐기된 이래 지제 이하의 길례 만이 행해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반성이 생겨나게 되었다.
    왕권강화를 통해 왕조의 집권력을 강화하겠다는 탕평군주의 통치 성향에서 바라볼 때 기존의 길례 체제는 매우 부담스러운 부분이었다. 유교국가에서 길례는 왕실의 위상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의례인데, 이것이 반쪽의 절름발이 형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이는 분명히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정조는 기존의 길례 체제를 개정하고자 하였는데, 물론 고려시대나 선초와 같은 방식으로 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조선의 입국 이념이자 이미 수백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祖宗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유교례의 기본 입장을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하였으므로 정조는 유교례의 한계내에서 천제를 회복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곧 기존의 길례 체제 내에서 天祭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길례 하나를 찾아 내어 이에 천제의 속성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정조대 천제 및 지제 정비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이는 유교례 길례 체제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조선이 중심이 되는 자주적 길례 체제를 확보하기 위한 묘책이었다. 곧 정조가 유교례 길례 중의 천제(圓丘祭)를 복구하고자 할 때 짊어져야 할 부담과 위험성 - 곧 중국은 천자국이며 조선은 제후국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정치적 의미에 대한 말문막힘-을 피하면서도 조선 길례의 불구성, 더 나아가 조선왕조의 상처입은 자존감을 바로잡을 수 있는 차선의 방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는 기존의 吉禮 체제 중에서 천제에 상응하는 것으랜월?R珣儀??주목하게 된다. 풍운뇌우제의 격을 높여 천제에 비긴 것이다. 풍운뇌우제의 정비와 함께 祈穀祭 체제도 재정비하였다. 천제에 상응하는 지제로서의 위상을 부여하고 그 형식을 더욱 정비한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실의 길례는 형식적인 면에서는 물론 유교례 길례의 명실상부한 천제·지제 형식을 취하지는 못하였지만 실제 내용적인 면에서는 천제·지제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는 대한제국기 고종대에 이르러 조선이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모두 유교례 길례의 천제·지제의 형식을 회복하기 위한 과도적인 조처로서 평가할 수 있다.
  • 한글키워드
  • 원구제,기곡제,풍운뇌우제,길례,제천 의례,유교례,지제,주자예학,예학,제천,천제,탕평군주
  • 연구성과물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