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과제 검색 > 연구과제 상세정보

연구과제 상세정보

外交와 經濟: 朝鮮後期 通信使外交와 經濟시스템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협동연구지원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4-042-A00009
선정년도 2004 년
연구기간 1 년 (2004년 12월 01일 ~ 2005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정성일
연구수행기관 광주여자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공동연구원 현황 변광석(울산대학교)
김덕진(광주교육대학교)
이케우치사토시(名古屋大學)
이훈(한국외국어대학교)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는 '外交와 經濟'라는 주제를 가지고 17∼19세기 朝·日 양국의 通信使 파견과 접대에 투입되었던 財政과 그 과정에서 행해졌던 經濟的 交換을 분석하려는 것이다. '外交'와 '經濟'는 일견 서로 무관한 별개의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외교란 정치적인 것, 그리고 '경제'라고 하면 물자의 교환만을 연상시키게 되어, 양자가 서로 상관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의 기존 연구가 그렇듯이 '외교'와 '경제'가 따로따로 분석되기 일쑤였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政治史(혹은 外交史), 經濟史(貿易史·財政史) 그리고 (韓日)關係史 연구자들이 서로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들의 고유 영역을 중시하는 동시에, 인접 영역의 연구 성과를 주고받아 서로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학문연구의 수준을 제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교환의 이득'(gains from trade)이 학문의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것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통신사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적·문화적 관점에서만 접근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통신사연구의 이러한 편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經濟的 관점에서의 어프로치가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통신사외교에 투입된 양국의 재정 규모라든지 외교 일정과 인원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환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때만이 조선후기(일본의 江戶時代) 양국 외교사와 관계사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통신사 문제는 현재 한국과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각각 실릴 정도로 양국의 학계는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관심이 높은 연구테마이다. 그렇지만 통신사 문제에 관한 양국의 인식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다. 이러한 역사적 인식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實證的 분석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韓·日 양국의 學者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같은 주제를 놓고 양국의 史料를 동시에 綜合的으로 조사·수집·분석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라든지 역사 왜곡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일 양국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동연구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기대효과
  • 첫째, 한·일 양국 학계의 통신사연구가 앞으로 균형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외교'와 '경제'가 본디 밀접한 것이라고 한다면 通信使 문제도 정치적·문화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어프로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번 韓·日 共同硏究에 의하여 경제적 측면의 접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한·일 양국의 통신사연구가 잃어버렸던 균형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 분야의 연구 수준을 한층 높여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둘째, 통신사기록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해 통신사외교의 전모가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남아 있는 통신사기록은 종류도 매우 다양하며 양국의 여러 기관이나 개인 등에 의하여 분산 소장되어 있다. 따라서 개별 연구자가 그 기록을 낱낱이 들여다보면서 내용을 추적해 가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다양한 사료를 종합적으로 조사·수집·분석하여 그 결과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게 된다면 통신사연구의 수준이 전보다 크게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일 학자들에 의한 공동연구 결과는 양국의 학계는 물론 교육계에도 매우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른 주제와 달리 通信使 문제는 한·일 양국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테마이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에서는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通信使와 財政」「通信使와 貿易」이라고 하는 경제적 측면의 어프로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번 공동연구의 결과가 궁극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21세기 주역들을 위한 敎育資料로 활용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넷째, 지역의 문화산업 개발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歷史 등 傳統文化를 활용한 '文化産業'의 진흥을 통하여 지역주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려는 이른바 地域活性化戰略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도, 통신사외교의 역사는 결코 단순히 지나가 버린 옛일로만 돌릴 일은 아닌 것이다.
    다섯째, 지역간 교류협력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연구과제가 일회성 조사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情報와 經驗을 共有하고 交流를 擴大해 나간다면, 한국과 일본의 양국간 민간교류의 활성화를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이 공동연구는 시기적으로 볼 때 17세기 초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는 약 200년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임진·정유왜란이 종결되어 전후처리가 시도되고 그 결과 양국이 國交를 再開하는 1607년을 분석의 상한으로 하며, 대마도(藩)에서 마지막 使行이 거행되는 1811년을 분석의 하한으로 잡고자 한다. 그리고 이번 공동연구의 분석대상은 '通信使外交'이다. '통신사외교'란 통신사의 왕래를 통한 조선후기(일본의 江戶時代) 한·일 양국의 외교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通信使는 三使·軍官·譯官·醫官·畵員·沙工·奴僕 등 400∼5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행단이었다. 이들 일행은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입하고 많은 수의 인력과 말을 동원하여 盤纏 및 公私禮單에 소요되는 각종 물품을 준비한 후 서울을 출발 부산으로 이동하였고, 그 경유지에서는 각종 연회가 베풀어졌다. 따라서 이들의 행차에는 대규모의 財政과 物種·人力이 소요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조선은 中央財政뿐만 아니라 地方財政도 크게 압박을 받고 있었는데, 그것은 결국 沿路住民들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특히 경상도 지역의 부담은 민폐의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한편 통신사 일행은 경상도의 선박을 이용하여 대마도 사신의 안내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통신사 일행은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各藩의 향응을 받으면서 海路를 통해 오사카(大坂)로 들어간다. 그 이후는 陸路를 이용하여 교토(京都)를 거쳐 쇼군(將軍)이 있는 에도(江戶)로 들어가게 되는데, 통신사 일행은 6∼12개월만에 서울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통신사 일행에 대한 일본측의 융숭한 접대는 日本의 財政을 압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에 보내는 禮物과 銀貨를 마련하는 것도 일본 정부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1711년에는 접대 규정을 일시 개정하기도 하였는데(1719년에 다시 환원), 일본 정부가 부담한 經費는 대략 銀 100만냥, 동원된 人夫 33만 명, 馬 7600필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정부에서는 後金(淸)을 방어하는 데에 시급한 軍需品(조총, 유황 등)을 통신사를 통하여 일본에서 조달해 오도록 하였다. 使行員으로 일본에 건너간 인사들 중에는 일본 안에서 密貿易을 하다가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또한 일본 정부로부터 禮單으로 지급 받은 物資나 銀貨가 통신사외교의 비용을 충당하는 데 긴요하게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으로 흘러 들어온 銀貨는 다시 對淸貿易을 위해 사용되기도 있었으며, 對日貿易의 결제대금을 충당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요컨대 通信使는 본디 조선 정부가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에 파견한 사절이었지만, 그것은 經濟的인 측면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통신사연구는 조선이 일본에 미친 학술·사상·예술·의학 등 문화교류 측면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통신사의 파견·접대가 한·일 양국의 經濟構造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검토·분석·고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통신사외교가 조선과 일본 양국의 재정 상황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양국의 경제시스템 운용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적 행위는 단순히 외교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여러 가지 經濟問題들을 풀어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通信使外交를 經濟的 觀點에서 접근·분석하고자 하는 이번 공동연구는 2개년도 사업으로 기획되었다. 우선 제1차 연도에는 「通信使와 財政―構造的 어프로치(Structural Approach)」라는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通信使의 派遣·接待와 관련하여 한·일 양국이 지출하고 부담한 財貨를 전체적인 財政構造 틀 속에서 고찰하였다. 제2차 연도에는 연도에는 「通信使와 貿易―實際的 어프로치(Practical Approach)」라고 하는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通信使行을 통한 양국의 貿易活動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조선에서 파견되어 건너간 일행들이 일본에서 몇 개월씩 체류하는 동안 양국민 사이에는 정해진 외교의식과 절차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物資交換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통신사 일행의 일본 왕래를 계기로 하여 양국간에는 불법적 형태의 私的去來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는데, 이에 종합적 분석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朝鮮의 通信使 派遣과 禮物의 調達」
    일본측은 朝鮮의 禮單을 늘려주길 바랬으나 朝鮮 政府는 반대로 줄이려 하였다. 예단의 수량은 시기에 따라 증감이 있지만, 재정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후대로 갈수록 줄어드는
  • 한글키워드
  • 통신사 조선통신사 회답겸쇄환사 조선시대 조선후기 에도시대 한일관계 외교 경제 재정 대일외교 대일무역 삼사 정사 부사 종사관 국서 별폭 호조 경상도 동래부 왜관 대마도 쓰시마 도쿠가와바쿠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공동연구는 통신사외교에 관한 것이다. 통신사는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최고위급 사행이었다. 통신사는 일본에 갈 때 조선 국왕의 국서(외교문서)와 함께 외교선물을 가지고 갔다. 그것을 일본의 막부 장군을 비롯하여 주요 인사들에게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조선의 사신들은 그에 상응하는 답례를 받았다. 일본의 막부 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비롯하여, 답례로 주는 선물을 받아와서 귀국 후 조선 정부에 보고하였다. 이렇듯 두 나라가 禮單 즉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총액, 수급자, 물목, 수량)는 전례를 토대로 정해진 절차에 의해 단행된 外交儀禮의 표현이었다. 전통시대 禮單의 授受는 국제관계 질서의 한 표현이자 국제관계의 예법이었다. 따라서 通信使의 禮單을 통해 朝日外交의 성격과 그 변화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핵심이다.
    이 연구의 분석 시기는 주로 17세기 초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는 약 2백 년 간이다. 임진.정유왜란이 끝나고 전후처리가 시도되는 과정에서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1607년을 상한으로 하고, 대마도에서 통신사외교가 거행되는 1811년 마지막 사행을 하한으로 했다. 총 12회에 걸친 사행의 기록물을 정리하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였다. 이 가운데는 사행에 참가한 일행과 여정 그리고 그들에 의해 교환된 재화 등이 포함되어 있다.
    통신사기록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게다가 한국과 일본의 여러 기관이나 개인에 의해 분산 소장되어 있어서 자료의 이용에 많은 불편이 따른다. 그러므로 다양한 사료를 종합적으로 조사.수집.정리하여 그것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한다면 연구자는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통신사기록 데이터베이스에는 통신사행에 참가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의 인적사항은 물론이고, 그들이 휴대했던 외교문서와 예물이 적혀 있으며, 그들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정보가 담겨 있다. 따라서 통신사외교에 투입된 조선과 일본의 재정 규모라든지 외교 일정과 인원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환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면, 양국 외교사와 관계사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통신사 문제는 현재 한국과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각각 실릴 정도로 양국의 학계는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관심이 높은 연구테마이다. 그렇지만 통신사 문제에 관한 양국의 인식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다. 이러한 역사적 인식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실증적 분석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통신사가 일본에 증급한 예단의 규모는 年例3使가 淸에 헌납한 方物을 능가할 정도로 적지 않은 것이었다. 交隣과 誠信을 위한 對日外交가 對中外交 못지않게 경제적인 면에서 부담스러운 사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朝鮮前期에는 통신사의 예단 규모가 일정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불규칙하였는데, 이는 對日外交 관계가 불안정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에 後期에는 꾸준하게 일정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양국 간의 안정된 外交關係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후대로 갈수록 예단 규모가 줄어들고 있었던 점도 주목된다. 즉 후기에는 전기보다 예단 규모가 줄어들었고, 그것마저 18세기에 접어들어 축소일로에 있다가 급기야 19세기에는 평균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양국 재정악화가 그 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영문
  • This co-work research is on the Korean embassies to Japan. By the way, there are numerous varieties of historical documents related to the Korean embassies that visited Japan from 1607 to 1811. Further, those materials are held by numerous institutions and in private collections in both South Korea and Japan. Accordingly, it is an exhausting task for an individual researcher to examine each and every document while also analyzing the information that each presents. It is thus necessary to comprehensively search for, collect, and analyze a broad range of sources, and then to compose a database based upon those documents. For example, if researchers can use a database of Korean embassies, they can know the names of Koreans who served in a particular embassy and their individual backgrounds as well as the activities in Japan of those Koreans. In addition, it also should be possible to compare and analyze the differences between and among embassies. In short, if a database of Korean embassies is constructed and utilized for research, scholars will be able to readily grasp such core data regarding the embassies as the individuals who participated directly and indirectly in Korean foreign relations through the embassies, the itineraries and sizes of the embassies, and the objects exchanged between Koreans and Japanese during the embassi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조선시대 최고위급 對日使行은 通信使였다. 통신사는 일본에 갈 때 조선 국왕의 국서(외교문서)와 함께 외교선물을 가지고 갔다. 그것을 일본의 막부 장군을 비롯하여 주요 인사들에게 제공하였다. 물론 그 답례로 일본의 막부 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회답)국서를 비롯하여, 답례로 주는 선물을 받아와서 귀국 후 조선 정부에 보고하였다. 이렇듯 두 나라가 禮單 즉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총액, 수급자, 물목, 수량)는 전례를 토대로 정해진 절차에 의해 단행된 外交儀禮의 표현이었다. 전통시대 禮單의 授受는 국제관계 질서의 한 표현이자 국제관계의 예법이었다. 따라서 通信使의 禮單을 통해 朝日外交의 성격과 그 변화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핵심이다.
    通信使가 日本에 증급한 禮單의 규모는 年例3使가 淸에 헌납한 方物을 능가할 정도로 적지 않은 것이었다. 交隣과 誠信을 위한 對日外交가 對中外交 못지않게 경제적인 면에서 부담스러운 사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朝鮮前期에는 통신사의 예단 규모가 일정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불규칙하였는데, 이는 對日外交 관계가 불안정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에 後期에는 꾸준하게 일정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양국 간의 안정된 外交關係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후대로 갈수록 예단 규모가 줄어들고 있었던 점도 주목된다. 즉 후기에는 전기보다 예단 규모가 줄어들었고, 그것마저 18세기에 접어들어 축소일로에 있다가 급기야 19세기에는 평균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양국 재정악화가 그 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공동연구는 통신사외교에 관한 것이다. 통신사는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최고위급 사행이었다. 통신사는 일본에 갈 때 조선 국왕의 국서(외교문서)와 함께 외교선물을 가지고 갔다. 그것을 일본의 막부 장군을 비롯하여 주요 인사들에게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조선의 사신들은 그에 상응하는 답례를 받았다. 일본의 막부 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비롯하여, 답례로 주는 선물을 받아와서 귀국 후 조선 정부에 보고하였다. 이렇듯 두 나라가 禮單 즉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총액, 수급자, 물목, 수량)는 전례를 토대로 정해진 절차에 의해 단행된 外交儀禮의 표현이었다. 전통시대 禮單의 授受는 국제관계 질서의 한 표현이자 국제관계의 예법이었다. 따라서 通信使의 禮單을 통해 朝日外交의 성격과 그 변화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핵심이다.
    이 연구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주로 17세기 초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는 약 2백 년 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임진․정유왜란이 끝나고 전후처리가 시도되는 과정에서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1607년을 상한으로 하고, 대마도에서 통신사외교가 거행되는 1811년 마지막 사행을 하한으로 했다. 이른바 조선후기 통신사외교를 경제시스템과의 관련 속에서 분석한 것이다. 1607년을 상한으로 하고 1811년을 하한으로 하여 총 12회에 걸친 사행의 기록물을 정리하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였다. 이 가운데는 사행에 참가한 일행과 여정 그리고 그들에 의해 교환된 재화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그 결과를 학술논문으로 작성하여 한일관계사학회 등 관련 학회에 발표함은 물론, 최종 연구결과를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이러한 연구성과가 중․고등학생을 위한 국사 또는 사회 수업에 참고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전문가는 물론 일반 대중들을 위한 한일관계사 자료로서 이용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文化가 강조되는 요즘 通信使記錄의 데이터베이스가 문화컨텐츠 개발의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수 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색인어
  • 외교, 경제, 통신사, 조선후기, 에도시대, 바쿠후, 막부, 도쿠가와, 대마도, 대마번, 쓰시마, 한일관계, 국서, 서계, 별폭, 예단, 예물, 삼사, 정사, 부사, 종사관, 역관
  • 연구성과물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