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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베드카르와 독립운동 -간디의 독립운동과 비교를 중심으로- Ambedkar and independence movement -Compare to Gandhis independence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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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보호학문강의지원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5-043-A00010
선정년도 2005 년
연구기간 1 년 (2005년 09월 01일 ~ 2006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박금표
연구수행기관 한국외국어대학교& #40;글로벌캠퍼스& #41;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932년 런던의 원탁회의에서 국민회의 대표로 참석한 간디와 불가촉민들의 대표로 참석한 암베드카르. 상층 카스트 힌두로서의 간디는 아프리카에 도착하면서 차별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그 차별의 주체인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자유와 독립을 획득하기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암베드카르는 태어나면서부터 ‘차별’, ‘억압’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자랐다. 일상생활, 학교생활 모든 영역에서 차별의 압박을 체험한 그가 어렵게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했을 때, 어디서나 물을 마음대로 마실 수 있고, 누구와도 함께 식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자유를 왜 인도에서는 누릴 수 없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암베드카르의 남은 생을 투자했던 것이다.
    간디와 국민회의 역시 불가촉천민의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간디와 국민회의가 불가촉천민에게 관심을 기울인 근본적 이유는 불가촉천민들이 카스트 힌두와 협력하여 반영 투쟁에 참여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하드(Mahad)투쟁, 뿌나협정으로 인한 선거제, 하리잔 운동들도 불가촉천민들의 차별철폐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리독립했고, 간디는 무슬림과 힌두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극파 힌두교도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암베드카르는 독립노동당을 전인도지정카스트연맹으로 전환시켰으며, 국민교육회를 설립하는 등 사회 운동을 계속하면서 ‘국민회의와 간디는 불가촉민에게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수드라 그들은 누구인가’ 등의 강한 어조의 소논문들을 출판했지만 힌두교 안에서의 차별을 극복하는 것을 포기하고 불교로 개종했다.
    간디가 추구한 진정한 독립의 의미는 무엇이고 자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암베드카르가 추구한 불가촉천민으로 대표되는 피억업 계급의 독립과 자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간디 역시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을 이겨내야 진정한 자유가 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내부의 적은 개인의 영혼과 정신에 치중된 것이었던 것이다. 암베드카르 역시 진정한 독립은 내부의 적을 이겨내야 한다고 보았으나 그 내부의 적은 계급 갈등 특히 카스트 힌두에 의한 불가촉천민을 비롯한 하층민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간디와 암베드카르 두 사람 모두 진정한 독립과 자유를 갈구했던 인물이었지만, 간디는 외부의 적인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만을 쟁취한 채, 내부의 적에 의해 암살되었고, 암베드카르는 진정한 독립과 자유를 찾아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유’를 추구하고 ‘독립’을 추구했던 간디와 암베드카르 그 두 인물들에게 진정한 ‘독립과 자유’의 의미는 무엇이었고 그것이 오늘날 남기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것의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보는 것이 이 논문의 목표이다.
  • 기대효과
  • 암베드카르에 대한 연구는 하층민 연구 혹은 피억업 계급문제를 다루는 측면을 중심으로 외국에서는 많은 연구 성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몇 개의 연구 논문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 생소한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암베드카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야마자끼 겐니찌(山崎元一)의 『インド社會と新佛敎』이 번역(김재성, 허우성 번역. 한길사.1983) 출판되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암베드카르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최근 암베드카르의 사회 개혁과 달리트(dalit)운동, ‘만달 정책’ 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타후진계급’ 등과 같은 차별 받는 집단에 대한 논문이 한편 발표되었고, 불가촉천민들이 힌두 내에서의 차별을 극복하지 못하고 평등사상을 주장하는 불교로 개종한 것에 대한 관심으로 ‘암베드카르의 불교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암베드카르의 저서 ‘붓다 다르마’가 번역되기도 했다.
    또한 간디의 연구가 간디의 비폭력, 독립운동에 국한되어 있는 경향이 있는데 당시의 여러 사회 문제와 간디의 독립투쟁 혹은 비폭력 운동을 견주어 보는 시도도 필요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불가촉천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의 입장에서 독립을 추구하고 자유를 추구했던 암베드카르의 활동과 사상을 검토해보고, 간디의 불가촉천민에 대한 의식과 그 실행 과정에서의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20세기 중반의 인도 사회문제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간디와 네루 그리고 진나로 이어지는 힌두 무슬림의 갈등만이 당시의 주요 문제로 부각되고 있지만 그 외에도 중요한 사회문제 특히 하층의 다양한 계층의 문제들이 독립과정에서 얼마나 수용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가 독립 이후 어느 정도 개혁되고 있는지 하는 점으로 연구의 범주를 확대시킴으로써, 암베드카르의 불가촉천민 해방운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간디에 대한 연구의 시야를 넓히는데 기여할 수 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인도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종파 갈등 문제를 이해하는 단서도 제공 될 것이고, 인도 관련 연구자들의 근대사 연구범위도 확대될 수 있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필자를 비롯한 인도 역사 관련 강좌의 수업자료로도 활용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 연구요약
  • 암베드카르와 간디는 모두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을 인식했지만 그 대상을 달리 했기 때문에, 정치적 여정에서 혹은 사회 개혁 운동에서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추구한 자유와 독립의 의미가 달랐던 것은 두 사람의 삶의 여정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 근본 요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논문의 목표인 간디와 암베드카르 그 두 인물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독립’은 무엇이었고 그것이 오늘날 남기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의 해답을 찾아보기 위해서, 간디와 암베드카르의 삶의 여정을 비교 해볼 것이다. 그리고 1931년 9월 7일에 런던에서 열린 두 번째 원탁회의와 그 결과로 나타난 간디와 암베드카르의 주장을 검토해 보고, 1932년 8월 16일의 <커뮤날 재정(The Communal Award)>과 뿌나 협정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독립을 즈음한 간디와 암베드카르의 행보를 짚어봄으로써 그들이 추구했던, 자유와 독립에 대한 두 인물의 생각과 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암살과 개종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지향점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항목을 본론에서 다룰 것이다.

    (1)삶의 여정 비교-암베드카르와 간디의 삶
    인도인들이 마하트마(위대한 영혼), 바푸(아버지) 등으로 부르는 간디는 영국에서 유학하여 변호사 자격증을 얻고, 1893년부터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비폭력과 무저항운동을 시작으로 그의 사티야그라하(Satyagraha) 운동의 이론적 터전을 마련한다.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로울라트(Rowlatt) 법안이 발표되자 이에 반대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1919-1920)을 전개하면서 정치적 중심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1928년 인도 통치법 개정을 위해 구성된 사이먼(Simon)위원회에 인도인 대표가 한 명도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먼 위원회를 보이코트 하고, 국민회의와 무슬림 연맹은 각기 다른 그들의 제안서인 ‘네루보고서’와 ‘진나 14개조’를 제출하여 소수종파의 문제가 인도의 자치정부 구성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을 때, 영국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탁회의를 런던에서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1930년, 간디는 영국정부의 염세 전매에 대한 비폭력운동으로 ‘소금행진’을 국내외로 엄청난 심리적 파장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인도 자치운동의 주도권을 잡은 국민회의 측은 1차 원탁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1차 원탁회의 후, 영국 정부는 간디를 석방하고 회담을 시도했으며, 간디도 이에 응하여 1931년 3월 5일에 어윈-간디 협약(Irwin-Gandhi Pact)이 이루어지면서, 국민회의는 시민불복종운동 종결하고 2차 원탁회의에 참여했다. 1931년 9월 7일에 런던에서 열린 두 번째 원탁회의에서 종파문제 특히 연방정부에서의 선거권문제가 논의되었고, 1932년 8월 16일에 발표된 커뮤날 재정(裁定)에서 무슬림에게 부여되었던 분리선거권이 피억압 계급과 불가촉천민에게 확대되자 간디는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권은 힌두의 분열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불가촉민들의 분리선거를 철회시키기 위한 단식을 감행하며 불가촉천민의 대표로 참석한 암베드카르와 충돌하게 되었다.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는 불가촉천민 카스트의 하나인 마하르(Mahar) 출신이다. 차별의 고통을 받으며 학교 교육을 받은 암베드카르는 1908년 봄베이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고, 4년 후에 콜롬비아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는 유학생활 동안 서구의 자유와 평등을 체험하면서 불가촉민들에게 주어진 차별과 굴레의 실체를 확연히 깨닫고 그가 체험한 불가촉천민의로서의 굴레를 벗겨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1923년 4월 암베드카르가 인도로 돌아왔을 때는 독립 요구가 고양되어가던 때였다. 간디는 암베드카르가 인도로 돌아오기 바로 1년 전에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암베드카르 역시 정치적 독립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간디와 국민회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만약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를 지배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계급도 다른 계급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암베드카르는 그가 추진했던 피압박 계급의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 법적 무능력상태를 영국의 통치가 제거해줄 것이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분리선거권의 획득을 통해서 더욱 굳게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2년의 2차 원탁회의를 통하여 커뮤날 재정이 발표되고 여기에 불가촉천민의 분리 선거권이 인정되었으나, 간디는 무슬림과 시크교는 어찌 할 수 없다하더라도 힌두 내의 불가촉천민까지 분리 선거를 인정하는 것은 영국의 분할통치의 일환이며 인도인들의 단결을 막으려는 것으로 인식하여 죽음에 이르는 단식을 감행함으로써, 결국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권을 철회하는 뿌나협정(Poona Pact)이 1932년 9월 24일에 간디와
  • 한글키워드
  • 사이먼위원회,수드라,원탁회의,전인도지정카스트연맹,국민교육회,개종,간디-어윈 협약,간디,힌두교,해방,하리잔,커뮤날재정,진나,불교,불가촉천민,바르도리계획,마하드투쟁,로울라트법안,독립운동,달리트,단식,네루,기타후진계급,암베드카르,소금행진,사티야그라하
  • 영문키워드
  • Mahad,Mahatma Gandhi,Non-violence,Partition of India,People's Education Society,Ahimsa,Badori,Buddhism,untouchables,The salt march,The Communal Award,Shudra(sudra),Simon Commission,Scheduled Castes,Satyagraha,Round Table Conferences,Irwin-Gandhi Pact,Fasting,Dalits,Congress,Chaudar,Caste,Bhimrao Ramji Ambedkar,All-India Scheduled Caste Federation,Rowlatt Act,Pandit Nehru,Pakistan,Other Backward Classes,Non-cooperation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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