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일제하를 살았던 재일 한국인으로 문학운동과 사회운동을 동시에 펼친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즉, 당시의 반제국주의 문학운동과 사회운동을 각각 떼어서 개별적인 사항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된 토대 위에서 전 ...
이 연구는 일제하를 살았던 재일 한국인으로 문학운동과 사회운동을 동시에 펼친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즉, 당시의 반제국주의 문학운동과 사회운동을 각각 떼어서 개별적인 사항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된 토대 위에서 전개된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하 문학운동과 사회운동을 함께 펼치면서 반제국주의 활동을 전개한 재일 한국인은 그렇게 많지 않다. 강문석(姜文錫), 김두용(金斗鏞), 김용제(金龍濟), 김희명(金熙明), 이북만(李北滿) 등이 이에 해당하는 인물들이다. 여기서 반제국주의의 문학운동과 사회운동이 비교적 충분한 자료 근거를 통해 뚜렷히 드러나는 인물로, 그동안의 문학 연구나 역사 연구 분야에서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인물들이 김희명, 김두용, 이북만이다. 그런데 이북만은 김두용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인물로 김두용의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포괄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는 김희명과 김두용을 논의의 중심 인물로 삼아, 이들의 문학운동과 사회운동의 구체적 내용과 상호 연관성을 집중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김희명은 한국문학이나 역사학, 또는 사회학 분야에서 거의 생소한 인물이나 다름이 없다. 아직 그의 생애에 관한 사실을 충분히 밝혀내지 못한 단계에 있지만, 그가 쓴 『興宣大院君と閔妃』(東京: 洋洋社, 1967)에서 밝힌 자신의 이력과 자신이 발표한 글들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충남 논산읍에서 태어나 1920년대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를 다니게 된다. 그후 일본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인 나프(NAPF)에 가담하여 활동하면서 반제국주의 문학운동을 활발하게 하는 한편, 당시 한국과 일본에서 이루어진 제국주의의 폭력에 대하여 강하게 저항하는 사회평론 등을 발표했다. 이는 그가 문학작품이나 사회평론을 발표했던 중요 매체가 《野獸群》,《文藝市場》, 《文藝戰線》, 《文藝鬪爭》, 《前衛》《進め》 등으로 당시 사회주의 문학단체나 사회단체의 중요 기관지일 뿐만 아니라, 이들 기관지의 편집동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는 데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1930년대에 들어서 김희명은 동경부의 직원으로 사회사업 분야에 근무하게 되고, 한때 김광사랑(金光史朗)으로 창씨개명하여 친일의 길에 들어선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후에는 한국재일거류민단 중앙총본부 부단장, 한국신문 부사장과 편집국장, 재일한국인펜클럽회장 등을 역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최근 그가 1905년 3월 18일생이며, 1977년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 연구를 통해 김희명의 이력과 행적을 소상하게 밝혀야 하는 과제가 부여되어 있지만, 그는 1920년대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재일 한국인으로, 즉 일본의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로서 계속 일본에 거주하면서 상당한 문학활동과 사회활동을 펼친 인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1920년대 일본에서 일본어로 시, 소설, 희곡, 평론 등 여러 장르에 걸친 문학활동을 폭넓게 펼쳤을 뿐만 아니라 반제국주의 사회운동을 위한 사회평론을 꾸준히 발표했으며, 1930년대에는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을 위한 사회사업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운동이나 사회운동의 성과가 거의 대부분 일본어로 일본에 남아 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계속 일본에 체류하면서 지냈다는 점 등으로 말미암아 그가 남긴 문학운동과 사회운동의 기록들은 한일 양국의 문학 연구와 역사 연구에서 오랫동안 사각지대로 밀려나 방치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김두용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주로 문학활동과 사회운동을 병행한 인물이다. 그는 1903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와서 동경제삼고보(東京第三高普)를 거쳐 동경제대(東京帝大) 미학과를 중퇴했다. 이 이후 그는 1927년 3월 동경에서 결성된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의 계몽 단체인 ‘제삼전선사(第三戰線社)’의 결성에 가담한 바 있고, 그해 10월 카프 동경지부의 결성에 재정부 상임으로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9년에는 ‘재건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한편, 별도로 당재건을 위한 ‘무산자사(無産者社)’를 설립하고 그 기관지를 발행하는 일을 이북만과 함께 주도했다. 1930년대 들어서는 ‘동지사(同志社)’의 결성, 1929년 가입한 재일조선노동총동맹의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의 해소 주도, 1935년 조선예술좌 창립, 1936년 1월 동경예술좌의 결성(위원장: 김두용) 등을 통해 민족적, 계급적 의식의 고양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유인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일련의 반제국주의 정치투쟁을 위한 문학운동과 사회운동의 과정에서 3차례나 피검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