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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智島郡叢瑣錄』을 통해 본 19세기 서남해 도서지역의 위상변화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기초연구지원인문사회& #40;창의주제연구& #41;
연구과제번호 2006-321-A01251
선정년도 2006 년
연구기간 1 년 (2006년 11월 01일 ~ 2007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김경옥
연구수행기관 국립목포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도서연구는 그동안 역사학자들로부터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대체로 기존의 섬은 고고학이나 민속학분야에서 유적․유물의 분포를 파악하거나, 한국민속 종합조사를 실시하는 수준이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학 분야에서도 섬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긴 했지만, 여전히 미미한 형편에 있다. 이처럼 역사학 분야에서 도서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주된 요인은 첫째, 연구자들의 관심 부족 때문이고, 둘째, 섬에 대한 당대 자료의 취약점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지금까지 역사학자의 연구소재는 역사변동의 중심인 중앙 혹은 육지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의 역사연구는 대부분 내륙지역 향촌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고, 변방에 해당하는 섬은 연구자들로부터 소외되어 왔다.
    그런데 도서지역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해당 지역에 대한 기초 자료의 수집이 필수적이다. 필자는 그동안 문헌자료와 현지답사를 접목시켜 時期別․島嶼別 사례연구를 시도해 왔다. 또 본 연구도 19세기 도서지역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智島郡叢瑣錄』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도서지역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밝혀 보기 위한 것이다. 특히『智島郡叢瑣錄』은 오늘날 우리나라 섬의 40%를 점유하고 있는 新安郡의 전신인 智島郡에 관한 기록이고, 또 무엇보다도 이 자료를 정리한 인물이 智島郡의 初代郡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조선시기 500년 동안 섬은 육지의 부속 도서로 편제되어 왔기 때문에 독립된 행정단위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17~18세기에 도서지역으로 인구가 유입되고, 점차 증가하게 되면서 도서지역의 사회경제적 변화가 수반되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섬을 육지로부터 분리시켜 독립된 행정체제로 개편함과 동시에 도서지역 주민들을 세금대상자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1896년에 전라도 서남해 도서지역의 무수히 많은 섬들을 권역별로 묶어서 智島郡․莞島郡․突山郡이 設郡되었다.
    본 연구는『智島郡叢瑣錄』을 분석하여 19세기 도서지역의 위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본 자료는 추상적인 섬을 보다 구체적인 섬으로 그려내는데 기본 텍스트로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통해 19세기 서남해 도서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초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에서 분석하려고 하는『智島郡叢瑣錄』은 19세기 말엽에 작성된 日錄類 가운데 아직까지 학계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않은 자료이다. 그 이유는 이 자료가 지닌 내용 때문이라기보다 도서지역에 대한 연구자들의 지역적 관심이나 이해가 부족했던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본 자료의 書誌學的 검토에 주력하면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분석하여 19세기 도서지역의 위상변화를 검출하고자 한다.
    본고의 연구대상은 1896년에 섬만을 단위로 하여 設郡된 智島郡이고, 분석 자료는 1896년에 지도군의 초대군수 오횡묵이 작성한 정무일기이다. 이 정무일기에는 勅命․官報․甘結․牒報 등 도서지역에 관한 각종 문건들이 수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본 연구의 주된 내용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본 연구에 이용한 자료소개이다. 자료는 官撰資料 가운데 謄錄類․鎭營誌․戶籍資料․成冊類․地理誌, 현지 주민들이 소장하고 있는 文集․日記․紀行文․漂海錄․私撰邑面誌․門中資料․洞契․村契․漁村契․松契․喪布契,『智島郡叢瑣錄』에 수록된 내용을 분석한다. 이 책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內題는『全羅道智島郡叢瑣錄』이며, 총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책은 1895년 2월 11일부터 1896년 9월 29일까지, 제2책에는 1896년 10월 1일부터 1897년 5월 17일까지 수록되어 있다.
    둘째, 서남해 도서지역의 設郡論議와 智島郡의 창설을 검토하려고 한다. 조선후기 도서지역의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기반이 변화하자, 조선정부는 섬을 관망만 하지 않았다. 즉 섬을 때로는 통제하고 때로는 포섭하여 통치에 편리한 방향으로 장악하고자 했다. 조선후기 중앙정부가 제시한 서남해 도서정책은 영조대의 設郡論議이다. 설군논의는 누대로 내륙에 영속되어 왔던 서남해 도서지역에 독립된 郡邑을 설치하자는 것인데, 설군논의의 전개과정과 지도군이 창설된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水陸一視之至意”에 입각한 도서지역 지배방식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 지도군 창설이후 萬頃에서부터 靈巖에 이르는 海路와 附屬 島嶼, 섬 주민들을 내륙지역 주민과 동일하게 국가의 통제권 안에 포함하기 위한 제도 마련, 지도군 관내 各面의 인구조사와 각종 賦稅 등 도서지역의 사회․경제․제도적 위상변화를 검출하고자 한다.
  • 한글키워드
  • 위상변화,智島郡叢瑣錄,서남해 도서지역,設邑
  • 영문키워드
  • Jido-gunchongswaelok,Status Changes,Southwestern Islands, County Establishment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논문은 19세기 設郡으로 인한 서남해 도서지역의 위상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智島郡叢瑣錄』을 분석한 사례연구이다.
    서남해 도서지역에 독립된 邑을 설치하자는 논의는 18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영조 때 중앙관료들은 섬에 住民과 田結이 많으니 수령을 파견하여 관리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관리들의 設邑論議에 대해 그 타당성을 인정하였지만 선뜻 수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선후기 도서지역의 경제기반이 대부분 왕실세력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정조대에 설읍논의는 「湖南御使事目」에 반영될 만큼, 그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정조 역시 영조와 마찬가지로 도서지역 설읍의 필요성과 한계점만 인식한 채 논의를 중단하였다. 영조~정조대에 걸쳐 논의되었던 設邑論爭은 19세기 말엽 섬에 독립된 읍이 설치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고종 32년(1895)에 행정편제를 단행할 때 서남해 도서지역에 3개 郡이 설치되었다. 이 때 智島郡이 설치되었고, 초대군수로 吳宖黙이 임명되었다. 그는 지도군의 행정업무를 수행하면서 도서지역의 실태를 日記 형식으로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智島郡叢瑣錄』이다. 『智島郡叢瑣錄』에는 지도군의 설치 배경, 관할 범주, 規約과 鄕約, 頭民과 任掌, 鄕會와 里會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다.
    19세기 중앙정부는 도서지역의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 첫 번째 작업은 官民으로서 준수해야 할 規約을 만들어 시행하는 일이었다. 1896년 6월, 지도군수는 규약 41조를 마련하여 섬주민들에게 선포하였다. 규약의 요지는 官屬들에 대한 규제 조치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公錢에 대한 문제였다. 세부규칙은 섬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頭民과 任掌에 의해 실시되었다. 두민과 임장은 도서지역 제반 행정업무를 里會에서 의결하고, 리회에서 결의된 사안은 문건으로 작성되어 鄕會에 보고되었다. 이것을 鄕會에서 다시 官에 보고하면, 최종적으로 郡會에서 해당 사안을 결정하였다. 즉 중앙정부의 도서지역에 대한 통제는 <郡守-任掌-頭民>으로 연결되는 인적구조와 <郡會-鄕會-里會>로 연결되는 지배구조를 통해 가능하였다.
    결국 19세기 도서지역에 대한 設郡의 의미는 ‘水陸一觀’의 원칙에 입각하여 육지의 횡포로부터 섬주민을 보호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지만, 중앙정부가 추구한 본질적인 목적은 섬을 육지의 부속도서가 아닌 독립된 단위로써 행정편제에 포함시켜 국가가 직접 섬을 관리하겠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섬주민들도 육지의 착취자들로부터 행해졌던 이중 과세의 폐단에서 벗어나기 위해 設郡을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 영문
  • This is a case study analysing 󰡔Jidogunchongshalok󰡕 to understand phase changes of the islands area in the southwest sea by establishing counties in the 19th century.
    The discussion to establish independent towns in the islands area in the southwest sea was started at the beginning of the 18th century. Central government officials suggested that local governors should be dispatched and manage the islands because there were a lot of residents and fields. Youngcho(英祖), however, did not readily accept it though he admitted its validity. Because almost all the basis of the economy of the islands area in the late Chosun Period was occupied by a Royal family. After that, the necessity of the discussion to establish towns was raised enough to be reflected in 󰡔Jidogunchongshalok󰡕. But Jungcho(正祖) as well as Yungcho gave up the discussion with recognizing necessity and limitation of that. The argument to establish towns that had discussed from Youngcho to Jungcho was discontinued by establishing independent towns in the islands in the late of the 19th century. Three counties was established in the islands area in the southwest sea when administrative formation was carried out in Gojong(高宗) 32th year(1895). Jidogun(智島郡) was established at that time, and Oh Wheng-Muk(吳宖黙) was appointed as the first county governor. He wrote the situation of the islands area as a diary when he accomplished administrative affairs at Jidogun, which is 󰡔Jidogunchongshalok󰡕. There are the background of the establishment, the sphere of jurisdiction, rules and regulations, representatives and officials, and town and provincial meeting at Jidogun in the 󰡔Jidogunchongshalok󰡕.
    The system of the islands area was consolidated by the central government in 19th century. The first work was to lay down and enforce rules to be observed by the residents. The county governor promulgated 41 rules to the residents in June 1896. The most point of rules was to impose restriction on officials, and the next thing was the problems of the public funds. The details was put in force by representatives and officials elected by residents in the islands. Representatives and officials passed on resolution of general administrative affairs in the village meeting, and then the case decided by that was reported to the town meeting. When it was reported to the government, it was finally decided in the county meeting. In other words, it was possible to control the islands area through the personal structure linked by <county governor(郡守)-officials(任掌)-representatives(頭民)> and the ruling structure linked by <county meeting(郡會)-town meeting(鄕會)-village meeting(里會)>.
    After all, the meaning of establishing counties in the islands area in the 19th century was to express the intention of the government to protect the residents in the islands from the arrogance of the land on the principle, "looking at the sea and land at once", but the essential points of the government contained the intention to control the islands directly including them among the administrative system not as affiliated islands to the land but as independent units. The residents, too, in the islands took a welcoming position about establishing counties to avoid abuses of double taxation from exploiters in the lan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논문은 19세기 設郡으로 인한 서남해 도서지역의 위상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智島郡叢瑣錄』을 분석한 사례연구이다.
    서남해 도서지역에 독립된 邑을 설치하자는 논의는 18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영조 때 중앙관료들은 섬에 住民과 田結이 많으니 수령을 파견하여 관리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관리들의 設邑論議에 대해 그 타당성을 인정하였지만 선뜻 수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선후기 도서지역의 경제기반이 대부분 왕실세력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정조대에 설읍논의는 「湖南御使事目」에 반영될 만큼, 그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정조 역시 영조와 마찬가지로 도서지역 설읍의 필요성과 한계점만 인식한 채 논의를 중단하였다. 영조~정조대에 걸쳐 논의되었던 設邑論爭은 19세기 말엽 섬에 독립된 읍이 설치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고종 32년(1895)에 행정편제를 단행할 때 서남해 도서지역에 3개 郡이 설치되었다. 이 때 智島郡이 설치되었고, 초대군수로 吳宖黙이 임명되었다. 그는 지도군의 행정업무를 수행하면서 도서지역의 실태를 日記 형식으로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智島郡叢瑣錄』이다. 『智島郡叢瑣錄』에는 지도군의 설치 배경, 관할 범주, 規約과 鄕約, 頭民과 任掌, 鄕會와 里會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다. 19세기 중앙정부는 도서지역의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 첫 번째 작업은 官民으로서 준수해야 할 規約을 만들어 시행하는 일이었다. 1896년 6월, 지도군수는 규약 41조를 마련하여 섬주민들에게 선포하였다. 규약의 요지는 官屬들에 대한 규제 조치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公錢에 대한 문제였다. 세부규칙은 섬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頭民과 任掌에 의해 실시되었다. 두민과 임장은 도서지역 제반 행정업무를 里會에서 의결하고, 리회에서 결의된 사안은 문건으로 작성되어 鄕會에 보고되었다. 이것을 鄕會에서 다시 官에 보고하면, 최종적으로 郡會에서 해당 사안을 결정하였다. 즉 중앙정부의 도서지역에 대한 통제는 <郡守-任掌-頭民>으로 연결되는 인적구조와 <郡會-鄕會-里會>로 연결되는 지배구조를 통해 가능하였다. 결국 19세기 도서지역에 대한 設郡의 의미는 ‘水陸一觀’의 원칙에 입각하여 육지의 횡포로부터 섬주민을 보호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지만, 중앙정부가 추구한 본질적인 목적은 섬을 육지의 부속도서가 아닌 독립된 단위로써 행정편제에 포함시켜 국가가 직접 섬을 관리하겠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섬주민들도 육지의 착취자들로부터 행해졌던 이중 과세의 폐단에서 벗어나기 위해 設郡을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연구결과의 학문적 기여도

    (1)‘지역사연구’로써 학문적 가치와 균형발전
    본 과제는 문헌자료와 현장답사를 접목시킨 연구로 추진한다는 점에서 도서문화 연구방법론의 모델이 될 것이다. 또 현장답사를 통한 인문학 연구영역의 확대를 꾀하였다는 점에서 학문적 기여도가 높이 평가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문화연구자들은 물론 다양한 인문사회 연구자들에게 도서문화의 필요성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육지 위주의 질서 속에서 역사․문화를 다루어왔다. 섬과 바다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도서문화에 대한 심화연구가 요구된다.

    (2) 서남해 도서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초자료 제공
    지금까지 역사연구가 대부분 내륙지역 향촌사회를 중심으로 연구되어왔다고 한다면, 본 연구는 섬과 바다, 섬주민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그동안 도서연구는 역사학계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 교통의 불편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섬 관련 자료의 한계점 때문이었다. 이에 필자는 문헌자료와 현장답사를 접목시킨 사례연구를 통해 도서문화를 재구성하고 있다. 즉 문헌자료에서 발취한 島嶼文化, 도서 이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마을, 그 땅에서 누대로 삶을 영위해 온 섬주민들의 생활문화는 그대로 도서지역의 원형문화에 해당된다.

    2) 연구결과의 사회적 활용방안

    (1) 지역주민․대학생․청소년을 위한 교육 자료로 활용
    현재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연구자들은 이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지역 활성화를 꾀하기 위해‘지역사연구’(혹은‘지방사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또 연구 성과는 학생과 일반인들을 위한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대학의 교양 및 전공강의, 시민강좌, 박물관 대학, 대학 평생교육원, 전라남도 지역문화해설사 양성교육, 도서지역 청소년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 등이 그것이다. 이런 유형의 교양강의를 진행할 때, 필자의 경우 지역답사를 통해 얻은 연구결과물을 지역민에게 전달하고, 나아가 지역문화를 정립할 수 있도록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2) 매력 있는 도서문화콘텐츠의 소재 발굴
    도서문화는 문화콘텐츠의 최고 매력 소재이다. 우리나라는 IT 강국으로 도약했지만 IT 기술로 개발해야할 문화콘텐츠(CT)의 원천 소스의 확보에는 미미한 수준이다. 도서문화는 매력적인 CT 제작을 위한 무한한 원천 소스의 공급원이다. 본 연구에서 활용한 관찬 사찬의 古文獻, 지역 주민이 소장하고 있는 古文書, 현지답사 시 수집한 구술자료와 역사유적․유물에 관한 기초 자료는 도서문화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한 원형문화로 제공할 수 있다.
  • 색인어
  • 『지도군총쇄록』, 오횡묵, 설읍논의, 두민, 임장, 향회, 리회
  • 이 연구과제의 신청시 심사신청분야(최대 3순위까지 신청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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