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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통신사 길'에 나타난 지방공연문화의 양상과 의미고찰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 #40;박사후국내연수&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8-354-A00298
선정년도 2008 년
연구기간 1 년 (2008년 09월 01일 ~ 2009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정영문
연구수행기관 단국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조선과 조선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사행을 통해 표출되었다. 그 중에서 일본과의 관계는 조선의 육로, 바닷길, 일본의 육로로 이어지는 '통신사 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통신사'는 외교사절이라는 1차적 의미이외에 문화사절이라는 2차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까닭에 '통신사' 연구는 한ㆍ일간의 외교와 문화적 관계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통신사를 매개로 일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통신사 길'을 따라 사행이 이루어지면서, 국내에서도 지방문화에 미친 영향이 상당히 컸다. 우리는 이 부분을 간과하고 지나갈 수는 없다.
    '통신사 길'을 따라 중앙과 지방의 문화가 교류하였고, 통신사행원과 지방문화인이 교류하였다.
    ‘통신사’와 ‘지방 문예인’과 교류는 세 갈래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삼사를 중심으로 하는 통신사(양반계층)와 지방의 관료 또는 문인간의 한시수창, 둘째, ‘의례향연’에서 교방에 소속된 ‘기녀’와 ‘악공’이 통신사를 위로해주기 위해 행한 ‘공연’, 셋째는 통신사의 일원으로 파견되는 중앙의 ‘마상재인’이 지역민을 위해 행한 ‘공연’이다.
    본 연구에서는 통신사와 지방 공연문화의 관계를 중심으로 당시 지방공연문화의 양상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이 연구는 세 가지 면에서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통신사 길’의 변화에 따른 지방도시의 지리적, 문화사적 기능과 의미 변화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둘째는 ‘통신사 길’을 따라 행해졌던 의례의 양상과 연향에서의 공연유형을 찾아내는 것이며, 셋째는 공연유형의 비교를 통하여 ‘통신사 길’과 지방공연문화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통신사 길’에 대한 이해는 통신사와 문화적 교감을 나누었던 지방도시가 지니는 정치적, 지리적, 문화적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본 연구는 통신사를 맞이하는 의례와 연향의 무대를 확인하는 동시에, 의례절차와 연향의 양상을 확인할 기회가 될 수 있다. ‘통신사 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상황에서, 이 연구는 통신사의 국내 사행로인 서울 종묘에서 부산 영가대에 이르는 ‘문화의 길’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는 일환이 될 것으로 본다.
    연향의 핵심이었던 지방의 문화가 각기 다른 형태로 공연되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공연문화의 상호비교는 ‘통신사 길’과 ‘지방공연문화’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 연구요약
  • 연구의 목적은 ‘의례연향’이 행해진 충주, 안동, 경주, 부산 등을 중심으로, ‘통신사의 길’이 변모하는 요인과 이 ‘길’을 따라 이루어지는 공연문화의 양상을 밝혀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통신사행이 지방문화, 특히 공연문화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를 밝혀보려고 한다.
    연구방법으로는 첫째, 통신사행의 노정으로 충주-안동-경주-부산으로 이어지는 우회로를 결정하게 된 요인과 이러한 결정이 지니는 문화사적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한양에서 부산에 이르는 우회로가 사행노정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이 노정은 단순한 ‘이동의 통로’가 아니다. 이 노정을 따라서 ‘의례향연’이 베풀어졌고, 지방 공연문화가 형성, 발전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이 통로는 문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노정을 선정하게 된 배경과 작용하고 있는 요인들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여 살펴볼 것이다.
    둘째, 통신사행의 중요 거점인 충주, 안동, 경주, 부산 등지의 교방을 중심으로 ‘의례연향’에서 공연된 유형을 조사하고, 시간적, 공간적 차이에 따른 공연문화의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통신사행원의 기록을 살펴보면, 시간적, 공간적 차이에 따라 공연물의 명칭과 양상이 각기 달리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비교한다면, 각 지방의 공연문화가 지니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키워드
  • 조선,통신사
  • 영문키워드
  • chosun,tongsinsa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국내 '통신사 길'에 나타난 지방 공연문화의 양상과 의미고찰]에 대한 연구
    1. 한국과 일본에 걸쳐 통신사가 사행한 ‘통신사 길’은 양국의 오랜 갈등을 개선할 수 있는 ‘문화교류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한일양국의 우호를 도모했던 이 ‘길’을 중심으로 조선과 일본의 문화가 교류하였고, 중앙의 문화와 지방의 문화가 교류하였다.
    그런데 ‘통신사 길’은 관도로 인정되던 ‘영남대로’와는 다른 길이었다. 이 길을 중심으로 ‘전별연’이 행해졌으며, 이 연회의 중심에는 기생, 악공, 전악, 무동 등의 공연문화가 있었다. 1607년 재개된 통신사 사행에 있어서 국가의 공식적인 전별연은 ‘충주’, ‘안동’, ‘경주’, ‘부산’ 4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1682년까지 ‘전별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잦은 병란으로 인해 ‘의례연향’을 감당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통신사행에서 ‘전별연’의 중심지로 선택된 지역은 ‘충주’, ‘안동’, ‘경주’, ‘부산’ 4지역에 ‘영천’을 포함하여 5곳이다. ‘영천’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경상도 관찰사가 개인적으로 ‘전별연’을 성대하게 행하였다. 비록 이 지역이 공식적인 전별연의 장소는 아니었지만, 통신사행원들의 ‘집결지’였기에 경상도 감사가 직접 위로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자리에서 ‘마상재공연’이 시행되었다는 점은 다른 지역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문화공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으로 떠나는 장소로 선택된 ‘부산’은 외교적, 지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흉년으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전별연’을 멈출 수 없었다. 이런 까닭에 ‘부산’은 지방문예의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충주’, ‘안동’, ‘경주’에서는 1655년 이후 전별연이 폐지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통신사행에 있어서 전별연의 ‘의례’와 ‘연향’을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역은 ‘영천’과 ‘부산’뿐이다.
    2. ‘통신사 길’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행이 이루어지던 시기의 정치ㆍ경제ㆍ사회적 요인들이 결합되어 결정된 길이었고, 이 길을 따라가면서 통신사는 지방의 다양한 문예인들과 만났다. 이런 까닭에 통신사가 사행한 국내의 ‘통신사 길’은 지방문화를 확인하고 일본으로 전파하는 길이 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문화교류는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1682년 이전에는 구체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없다. 이는 전란으로 인해 물력을 탕진하였고, 계속된 흉년으로 인해 회복할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조선이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안정을 찾았고, 그 이후 통신사를 매개로 중앙과 지방의 문화가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통신사’와 ‘지방문예인’의 교류는 교방에 소속된 ‘기녀’와 ‘악공’이 통신사를 위로해주기 위해 행한 ‘전별연’에서의 ‘공연’과 통신사의 일원으로 파견되는 ‘마상재인’이 통신사와 지방민 앞에서 행한 ‘공연’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교류는 통신사의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흔적이 지워질수록 통신사는 지방민을 위로하려는 사명감에서 벗어나 중앙과 지방의 문화교류,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류를 선도할 수 있었다.
  • 영문
  • 1. ‘Envoys' roads' used at the time of envoys' visit from Korea to Japan for communicative purpose can be referred to as 'roads for cultural exchange' to improve long time conflicts between two countries. Centering on these 'roads', Joseon and Japan had cultural exchanges and there were exchanges between local culture and central culture. Exchanges with 'local literary men' centered on these roads appeared in two phases.
    'Envoys' roads' were different roads from 'Youngnam Daero (big road)' that was recognized as governmental road. Centering on this road, 'Jeonbyeolyeon' was held and in the center of this banquet, there were performances done by official dancing girls, court musicians, Jeonak, and boy dancers. At the envoys' visit to Japan resumed in 1607, official Jeonbyeolyeon was held at 4 regions such as 'Chungju', 'Andong', 'Kyungju' and 'Busan'. However, there aren't any detailed records of 'Jeonbyeolyeon' by 1682. This is because of the impossibility of having 'Euiryeyeonhyang' due to frequent wars. Because of such reasons, it is difficult to find detailed records of banquets in the 'records of envoys' visit to Japan' before the 18th century.
    Regions selected as places for 'Jeonbyeolyeon' were 5. Therefore, roads for envoys' visit to Japan for communicative purpose were not direct paths but remote roundabout ways. Unlikely as other regions, at the third place, 'Youngcheon', the governor of Kyungsang province held prosperous 'Jeonbyeolyeon' personally. Although it was not an official place for 'Jeonbyeolyeon', it was the assembling place of the members of envoys, so he prepared for a consoling place. At this place, 'Masangjae Gongyeon (performance)' was played, in which aspect, 'cultural performance' of this region can be more emphasized than other regions. The places where we can actually confirm 'ceremony' and 'banquet' of Jeonbyeolyeon are only 'Youngcheon' and 'Busan'. For at regions such as 'Chungju', 'Andong' and 'Kyungju', Jeonbyeolyeon was abolished after 1655. 'Busan' that was selected as a departure for Japan because of diplomatic and geographical reasons couldn't stop Jeonbyeolyeon even under difficulty from bad harvest. Because of such reasons, 'Busan' was the place where we could confirm changes of local literary arts.

    2. The roads between the Tongshinsa departure from Hanyang to Kangho in Japan that was Japanese politicalㆍeconomicalㆍcultural center of those days are called 'envoys' roads'. According to the roads, there were cultural exchanges between Joseon and Japan and also between cultures of Hanyang and countryside. Cultural exchanges in Joseon were centered on the 'Gaek-sa' around the 'government offices'.
    Cultural exchanges between the 'Tongshinsa' and 'local literary men' can be divided into two phases in the aspect of the 'subject' and 'object' of the performance culture. First is 'performance' to console envoys at 'Euiryeyeonhyang (ceremonial banquet)' by 'official dancing girls' belonging to Kyobang and 'court musicians'. Second is local 'performance' for the countryside people held by 'Musangjaein' to be dispatched as members of envoys.
    These two phases' exchanges were made mainly by means of banquets to console the Tongshinsa. But in these performances, local literary men, intellectuals and the people of those days participated, and thereby they became sites for exchanging central culture centering on 'the Tongshinsa' from the central region and local cultur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통신사가 한양을 출발하여 당시 일본의 정치ㆍ경제ㆍ문화의 중심지였던 江戶에 이르는 길을 ‘통신사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을 따라서 조선과 일본의 문화가 교류하였고, 한양의 문화와 지방의 문화가 교류하였다. 조선에서의 교류는 ‘관아’ 주변에 위치한 ‘객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통신사’와 ‘지방 문예인’과 교류를 공연문화의 ‘주체’와 ‘대상’의 측면에서 구분하면 ‘의례연향’에서 교방에 소속된 ‘기녀’와 ‘악공’이 통신사를 위로해주기 위해 행한 ‘공연’과 통신사의 일원으로 파견되는 중앙의 ‘馬上才人’이 지방에서 지방민들을 향해 행한 ‘공연’이 있다. 이러한 공연은 통신사를 위로하는 연회에서 이루어졌지만, 이 공연에 당시의 지방 문예인과 지식인, 백성들이 참여함으로써 중앙에서 내려온 ‘통신사’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의 문화와 지방의 문화가 교류하는 場이 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국내 '통신사 길'에 나타난 지방공연문화의 양상과 의미고찰]에 대한 연구는 세 가지 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통신사 길’의 변화에 따른 지방도시의 지리적, 문화사적 기능과 의미 변화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사행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행사였지만, 임진왜란을 계기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감정적 대립이 강하였던 시기에 사행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지만, 통신사를 파견하면서 전란으로 인해 고통을 가장 크게 받았던 충주, 안동, 경주, 울산 등을 지나가면서 그 지역민들을 위무할 수 있었기에 이들의 사행은 외교적 의미를 넘어 문화적 교류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지방도시 예인의 문화적 역할을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통신사 길’을 따라 행해졌던 의례의 양상과 연향에서의 공연유형을 찾아내는 것이다. 통신사가 사행하던 여정을 '통신사 길'이라 명명할 때, 통신사행은 단순한 여정의 결과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통신사가 거쳐 간 거점지역은 전별연을 중심으로 의례를 강화하였고, 이는 일본과의 외교에 있어서 조선의 자긍심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의례는 연향을 동반하였고, 연향에 교방에 소속된 지방의 예인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의 기예를 중심으로 지방문예가 변화하였다. 비록 지방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으로 인해 궁중에서의 정재보다 간략화 되었지만 궁중의 다양한 기예가 공연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여기에 중앙에서 파견된 마상재인을 중심으로 마상재가 공연되었다. 이 공연에는 지방의 수많은 관람객을 불러 모았고, 이들에게 새로운 문화적 체험을 가능하도록 도와주었다. 셋째는 공연유형의 비교를 통하여 ‘통신사 길’과 지방공연문화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통신사 길을 중심으로 중앙의 마상재인이 지방민들에게 공연하였고, 지방의 관속음악인들의 기예를 중앙과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 앞에서 공연하였다. 이러한 상호관계를 통하여 마상재와 지방의 기예는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본 연구에서 대상으로 삼고 있는 '통신사 길'은 일본까지의 최단거리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지리적, 문화사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통신사 길’과 여기에서 공연된 기예에 대한 이해는 통신사와 문화적 교감을 나누었던 지방도시가 지니는 정치적, 지리적, 문화적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영천 지방은 지금은 비록 한적한 지역에 불과하지만 수 백 년에 걸쳐 진행된 통신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거점도시로 기능하였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의 통신사와 관련된 문화행사는 과거의 문화를 현대에 재구성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통신사를 맞이하는 지방 관리는 ‘의례연향’을 행하였다. 이러한 행사는 일정한 무대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 졌으니, 각 지방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무대와 격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례와 연향의 무대를 재구성한다면 현재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통신사 노정을 중심으로 과거의 의례와 연향을 재구성한다면 세계적인 문화중심지로 자리함은 물론 사라져가는 우리의 공연문화가 새롭게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지방의 공연문화에 대한 정보구축과 콘텐츠문화의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 색인어
  • 통신사 길, 조선, 통신사, 교방, 지방공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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