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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와 근대 도시의 이미지 정치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9-327-A00094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1 년 (2009년 11월 01일 ~ 2010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최용찬
연구수행기관 연세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의 목적은 1857년 12월 20일,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 의해 발의된 비엔나 신시가지 개발 사업, 곧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성격을 분석하는 것이다.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는 19세기 중반 파리의 오스망 프로젝트와 함께 잘 알려진 유럽의 대표적인 근대 도시 프로젝트이다. 이처럼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이 도시 프로젝트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대한 기존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입장은 전통적, 절대주의적 해석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는 윌리엄 존스턴이다. 그의 논지는 1976년에 출간된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는 한 마디로 ‘비더마이어 시대의 건축 전통의 답습’이다. 즉 이 입장은 전제 군주-보수적 기획-전통적 건축물이라는 식의 ‘위로부터의 시각’을 가지고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전통적, 보수적, 절대주의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이와는 달리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근대적, 진보적, 시민주의적 성격을 주장하는 두 번째 입장은 미국의 역사학자 칼 쇼르스케에 의해 제출되었다. 1961년에 출간되어 세기말 비엔나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탁월한 연구서로 인정받은 『세기말 비엔나』에서 그는 링슈트라세(의 기념비적 건축물)는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들의 ‘문화적 자기 선언’이라고 역설했다. 즉 이 입장은 개혁 군주-진보적 기획-근대적 건축물이라는 식의 ‘아래로부터의 시각’을 가지고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개혁적, 진보적, 시민주의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두 입장은 모두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를 가지고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역사적 성격을 단정하려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의해 드러난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도시 개발 사업, 그리고 근대 도시의 이미지 정치는 역사가들의 분석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와 도시 건축물에 나타난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화 정치적 동학을 어떻게 밝혀낼 수 있을까? 만약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가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불안한 공생 관계 속에서 구상, 발의, 기획, 실행, 그리고 완성된 사업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프로젝트의 기본 성격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양자의 불안한 균형점(e)이 그려가는 포물선을 정확히 포착할 때, 그 윤곽선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의식에 출발한 이 연구는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이른바 ‘제3의 입장’을 제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에 따라 먼저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발의 배경과 황제 칙서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이 프로젝트를 발의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정체성이 재조명될 것이다. 2장에서는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기본 계획서와 구체적인 실행 국면을 살펴봄으로써 비엔나 도시 개발 사업이 간단히 일회적인 성격을 갖는 단기 사업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장기간의 실행 과정을 통해 점차 진화해간 근대적 도시 기획이라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셋째, 새로 조성된 링슈트라세 건축물의 특성을 건축가와 건축양식, 그리고 상징성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건축 매체에 의한 비엔나 도시의 미학 정치가 지닌 상징성이 분석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관한 당대 언론의 반응을 중심으로 근대 도시의 이미지 정치의 지형도를 더욱 선명하게 그려보고자 한다. 당대의 언론은 ‘링슈트라세 신화’의 모태였다. 마지막으로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와 근대 도시의 이미지 정치의 역사적 성격과 의미, 그리고 계급적 한계까지도 지적하게 될 것이다.
  • 기대효과
  • 이 연구는 학술 연구적인 측면에서 기대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대략 세 가지 관점 - 오스트리아의 자국사적인 관점, 유럽사적인 관점, 세계사적인 관점 - 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이 연구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학문적인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 세기말 비엔나의 ‘문화적 르네상스’의 물적 토대에 관한 구조적 이해를 가능케 해 준다. 그야말로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의한 도시 근대화가 없었다면, 세기말 비엔나의 문화적 휘광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 연구는 세기말 비엔나가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의해 탄생된 근대적 산물이라 논리의 연속선상에서 도시사적인 관점에서 오스트리아의 근대성에 관한 역사적 분석의 초석이 될 수 있다. 둘째, 이 연구는 오스트리아의 근대성뿐만 아니라 유럽의 근대성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근대화 모델은 영국식 모델과 독일식 모델로 나뉜다. 전자가 자유민주주의적 발전 모델이라고 말한다면, 후자는 보수주의적 발전 모델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이 연구가 밝혔듯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근대화의 길은 위의 두 가지와는 상이한 궤적을 그리기 때문에 '제3의 근대' 모델로 자리 매김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제3의 시각에서 근대 유럽의 정체성을 분석하고자 하는 후속 연구를 가능케 한다. 더 나아가 셋째, 이 연구는 유럽의 근대성 연구를 넘어서 아시아, 특히 대한제국의 근대성 연구를 위한 비교 모델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의 근대성 연구 또한 전통주의적 입장과 근대주의적 입장으로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형편인데, 이 상황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독특한 근대화 과정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밑바탕으로 제3의 근대 모델과 같은 새로운 근대성 연구에 박차를 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다음으로 이 연구 결과물은 시민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큰 유용성을 갖는다. 이 연구 결과물은 대학 내 정규 교육과 시민을 위한 인문학 강좌에서 적극 활용될 수 있다. 첫째, 이 연구의 결과물은 도시사 관련 대학교 강의를 위한 중요한 교육 내용을 제공해 준다. 이 과목이 특히 세계 각지의 주요 도시의 근대성 문제에 주안점을 두는 과목일 경우라면, 이 연구 결과물은 대단히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파리의 오스망 프로젝트(파리 도심지 개발 사업)와는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연구 논문은 하나도 없다. 특히 세기말 비엔나의 근대화 과정은 다른 유럽 국가의 주요 도시들과는 달리 독특한 유형으로 구별되는 바, 심도 깊은 논의를 위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기대된다. 둘째, 이 연구의 결과물은 시민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위한 중요한 교육 콘텐츠를 제공해 준다. 오늘날 인문학에 대한 일반 시민 대중들의 관심이 크게 진작되고 있는 시점에서 세계 각국의 수도에 관한 도시사 강좌는 그들의 교육적 열망을 더욱 배가시켜 주는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될 것이다. 특히 도시의 공간과 도시 건축, 그리고 도시 축제를 중심으로 근대 도시 인문학에 관한 시민 강좌는 시민들의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 연구요약
  • 이 연구는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는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민사회의 적대적인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적 전략에 따른 특이한 담합의 근대 기획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담합은 동일한 목적을 가진 집단들의 이상적 결합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적 비전을 가진 집단들이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맺어진 공생관계 속에서 연주되는 불편한 이중주(二重奏)로 이해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링슈트라세의 기념비적 건축물은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그리고 국가와 시민사회적 이상들을 실어 나르는 도시적 매체이다. 이 글의 주요 내용에서는 주로 이러한 가정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될 것이다.
    1장에서는 링슈트라세 프로젝트가 탄생되는 역사적 배경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게 된다. 여기서는 대략 세 가지 사항이 중심에 놓여 있다. 첫째, 19세기에 제국과 시민사회 간의 불편한 공생관계가 탄생되는 과정. 이것은 오스트리아 근대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데, 왜냐하면 이 문제를 통해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체성과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들의 정체성이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의 도시화 현상. 여기서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수도의 근대화 과정과 비엔나의 도시화 과정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비엔나만의 독특한 도시화 과정이 검토될 것이다. 셋째, 제국과 시민사회의 공생관계와 비엔나의 도시화 현상과의 상관성. 이 문제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시민사회의 불편한 공생관계가 제국의 수도 비엔나의 도시화 과정에 어떤 흔적을 남겨 두었는지를 밝힐 것이다.
    2장에서는 링슈트라세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실행되기 전의 준비 과정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여기서도 대략 세 가지 지점이 지적될 것이다. 첫째,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1857년의 링슈트라세 칙령. 여기서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링슈트라세 칙령을 발의하게 되었는지를 칙령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 밝히고자 한다. 이 분석을 통해 요제프 황제의 이중적 성격과 그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기본 성격이 드러날 것이다. 둘째,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와 공모전. 제국의 수도를 미화하려는 국가적인 사업을 위해서 공모전이라는 근대적 선정 방식을 채택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는 대단히 근대적인 기획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선정 위원회에 참여하는 인적 구성이 이 기획의 근본적인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분석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셋째,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와 건축가 루트비히 푀어스트(Ludwig Förster). 여기서는 링슈르타세의 설계자인 루트비히 푀어스트의 건축 미학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이 점은 링슈트라세 기념비적 건축물의 시민적 도상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3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링슈트라세 기념비적 건축물과 도시의 이미지 정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주요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네 가지이다. 즉 의사당 건물, 시청사, 대학, 부르크극장. 여기서는 주로 각각의 건축물이 도상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분석될 것인데, 각각의 건축물이 갖는 기호학적인 의미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서 살펴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전통성이 강조되는 ‘역사주의 건축’이 특히 도시 이미지 정치와 관련해서 아주 색다른 의미로 읽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링슈트라세 건축물은 전통과 현대, 진보와 보수, 국가와 시민주의적 이상이 묘한 방식으로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물이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관한 당대의 여론과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행한 도시화 프로젝트가 후대의 평가자가 아닌 당대인들에 의해서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가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서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특히 세기말 비엔나의 여론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몇몇 주요 일간지를 분석할 것이다. 이에 대한 분석은 결국 링슈트라세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통한 도시 이미지 정치의 영향력과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을 가능케 할 것이다.
  • 한글키워드
  • 상징 정치.,도시확장기금,기본 계획서,이미지 정치,링슈트라세,비엔나 도시법,링슈트라세 프로젝트,세기말 비엔나,근대 도시,근대 도시 건축의 미학
  • 영문키워드
  • Vienna City Law,City development fund,Image Politics,Ringstrasse Project,Fin-de-Siecle Vienna,asthetics of modern urban architecture,symbol politics.,Ringstrasse,Modern City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의 목적은 19세기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역사적 위상을 근대 도시의 이미지 정치라는 시각에서 살펴본 것이다. 먼저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관한 기존의 해석들은 세 가지 지점에서 의견이 서로 다르다. 첫째, 이 공공사업을 발의한 요제프 황제의 정체성, 둘째, 이 공공사업의 기본 성격, 셋째, 이 공공사업에 의해 세워진 공공건축물의 상징성. 그런데 기존의 입장은 모두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가지고 이 공공사업의 역사적 의의를 쉽게 단정해 버렸다. 따라서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와 도시 건축물에 나타난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화 정치의 역학을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장에서는 링슈트라세 프로젝트가 과연 어떤 시대적 배경 하에서 발의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이 공공사업은 우선 19세기 초엽 나폴레옹 군대의 공략 이후, 성벽 전체를 헐고 도심지와 외곽지역을 하나로 통합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이 공공사업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제국 정부는 상당히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1848년, 비엔나 시민들은 한층 더 진보적인 새로운 도시법령을 제정하자는 주장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혁명 직후 즉위한 요제프 황제가 이 도시법령을 수용하였다. 즉 1857년 12월 20일, 프란츠 황제가 비엔나 도시 확장 계획에 관한 교서를 공포하라고 지시하였다. 결국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를 직접 발의하는 형식을 띤 이 황제의 칙서는 도시 확장 계획의 필요성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 결과 대단위의 비엔나 도시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3장에서는 링슈트라세 프로젝트가 어떤 과정을 통해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한편, 황제 교서가 발표된 직후, 내무부 장관 폰 바하 남작은 비엔나 도시 개발 사업을 전담하는 정부 기구를 신설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이 건축 위원회는 통상부의 모리츠 뢰어(Moritz Löhr)에게 설계도를 맡겼다. 그의 기본 설계도가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져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기본 계획이 확정되었다. 이 기본 설계도의 기본 골자는, 첫째, 군사적 고려, 둘째, 도나우 운하와 부도 시설의 정돈, 셋째, 링슈트라세 건설, 넷째, 신축 건물의 모둠 배치, 다섯째, 도심지의 정돈이었다. 다른 한편, 제국 정부는 재정 업무 전담 기구를 신설하였다. 이 기구는 새로운 도시 확장 기금(Stadterweiterungsfond)을 조성하고 시민들에게 건축 부지를 매각함으로써 공사비용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제국 정부의 건축 경기 부양책이 발표되자, 특히 부유한 비엔나 유대인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정부는 유대인들의 토지구입 금지법을 철회하여 주었다. 그 결과, 비엔나 도시 개발을 위한 기본 설계도와 필요한 재정을 확보한 제국 정부는 대대적인 공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고, 성벽 철거와 공터 정지 작업, 그리고 대로 건설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4장에서는 링슈트라세 도시 개발 사업에 따라 세워진 건축물들이 어떤 것이며, 그리고 그러한 도시 건축물들이 갖는 상징 정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석하였다. 이 공공사업에 의해 세워진 대표적인 공공건축물은 황제 포럼과 시민 포럼, 그리고 군사 포럼 공공건축물로 나뉜다. 먼저 바로크 양식에 따라 만들어진 신궁전과 자연사 박물관, 그리고 예술사 박물관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황제의 위엄을 건축적으로 미화시킨 작품이고, 둘째, 중세 고딕식과 르네상스식으로 지어진 비엔나 시청과 비엔나 대학교, 그리고 국회의사당은 비엔나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포부를 미학적으로 승화시켜낸 부르주아지 예술의 걸작이었다. 마지막으로 군사 포럼에 속하는 병영 건물들은 막강한 반혁명적인 군사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결론적으로, 이처럼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는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불편한 공존 관계 속에서 구상, 발의, 기획, 실행, 그리고 마무리된 불안한 근대의 공공사업이었다.
  • 영문
  • This paper examines the historical status of the Ring street project in Vienna in the late 19th century through lighting up the image politics of the modern city with it. Most of the existing interpretations all look upon the urban development project simply as a dichotomy between traditional and modern, between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between the state and the civil society. Beyond this simple dichotomy it is now necessary to closely consider the dynamics of the cultural politics of Habsburg Reich which could be materialized into the public buildings on this splendid boulevard.
    The second chapter looks deeper the question, on which historical backgrounds could be openly proposed and proclaimed the Ring street project. After the twice crashes by the Napoleon troops, man began to discuss carefully about the new redevelopment of the city wall and the surrounding empty space. According to the strong public opinion, the outskirts of the city should be integrated into the urban center inside the wall. But the Reich government was reluctant to allow the urban redevelopment because it should require enormous financial investments. In 1848, many revolutionary peoples demanded the urban planning and zoning act, but its daring trial failed. Immediately after the abortive revolution, the new emperor surprisingly accepted the demands for the radical reform from the civil society. On 20 December 1857, he ordered to promulgate the new redevelopment project of expanding the capital city. From that time the urban redevelopment project started in earnest.
    The third chapter sees into the problem how successfully the Ring street project carried out. On the one hand, the new established architectural committee of the Secretary of Interior Baron von Bach ultimately assigned the task of preparing a general drawing to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nd Trade, Moritz Löhr after much meandering. The main contents of his general drawing were as follows: the military consideration, the grand arrangement of Donau canal and dock facilities, thr construction of the Ring street, the group placement of the public buildings, the street arrangement of the city center etc. On the other hand, the Reich government founded another organ to have full charge of all financial tasks. This organ founded a new Urban Development Fond, which had a important aim not only to sell building sites, but also to collect the cost for the urban development project. Consequently, the Reich government had prepared clear supply for construction finance with it.
    The fourth chapter analysed the conflicting issue which symbolic meaning had the public building in the political term. The public buildings on the Ring street could be divided into three architectural modes. First, the baroque building such as the new palace, the natural history museum, and the art history museum had the intention to glorify greatness authority of the Habsburg Reich and Emperor; second, the gothic and renaissance styled building such as the Vienna city hall, the Vienna University, and the National Assembly Building were the cultural symbol to realize the political will of the liberals in Vienna. And third, military buildings was the authoritarian architecture symbolizing counter-revolutionary military power.
    Lastly, the Ring street project of the fin-de-sicle Vienna was the modern urban development scheme of the capital city of Habsburg Reich that was conceptualized, proposed, devised and practiced in the uncomfortable relationship between the traditional and the modern, the consevative and the progressive, and the state and the civil socie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857년 12월 20일자의 황제 요제프의 교서에 의해 공식 발의된 이른바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입장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입장은 전제 군주-보수적 기획-전통적 건축물이라는 식의 ‘위로부터의 시각’을 가지고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전통적, 보수적, 절대주의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입장은 개혁 군주-진보적 기획-근대적 건축물이라는 식의 ‘아래로부터의 시각’을 가지고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개혁적, 진보적, 시민주의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유심히 관찰해 보면, 이러한 입장들은 대략 세 가지 지점에서 대립된다. 첫째,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를 발의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정체성(전제 군주 대(對) 개혁 군주), 둘째, 원래 링슈트라세의 도시 확장 공사라고 명명된 이 프로젝트의 기본 성격(보수적 기획 대(對) 진보적 기획), 셋째,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의해 조성된 도시 건축물의 상징성(절대주의 정치의 상징 대(對) 시민정치의 상징)이다.
    그런데 사실 이들 입장들은 각각의 역사적 사실들과 조응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입장이 공유하고 있는 기본 인식이다. 두 입장은 모두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를 가지고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역사적 성격을 단정하려는 경향성을 지닌다. 그 과정에서 다른 쪽의 입장은 간단히 비역사로 부정된다. 그러나 19세기 말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의해 드러난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도시 개발 사업, 그리고 근대 도시의 이미지 정치는 역사가들의 낡은 사고방식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와 도시 건축물에 나타난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화정치적 동학을 어떻게 밝혀낼 수 있을까? 만약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는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불안한 공생 관계 속에서 구상, 발의, 기획, 실행, 그리고 완성된 사업이라고 말한다면, 이 프로젝트의 기본 성격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양자의 불안한 균형점(e)이 그려가는 포물선을 따라가다 보면 고스란히 드러나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 논문은 2장에서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발의 배경과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이 프로젝트를 발의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정체성을 재조명하였다. 3장에서는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기본 계획서와 실행 국면을 살펴봄으로써 비엔나 도시 개발 사업이 간단히 일회적인 성격을 갖는 단기 사업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장기간의 실행 과정을 통해 점차 진화되어간 근대적 기획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셋째, 새로 조성된 링슈트라세 건축물의 특성을 건축가와 건축양식, 그리고 상징성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건축 매체에 의한 비엔나 도시의 미학정치가 지닌 상징성의 이중적 실체를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의 결과,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대로변에 자리 잡은 건축물들은 각각 제국정치와 시민정치, 그리고 군부통치의 상징성을 대변하면서도 상호 긴장 관계 속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는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민사회의 적대적인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적 전략에 따른 특이한 담합의 근대 기획이었다. 하지만 이 담합도 동일한 목적을 가진 집단들의 이상적 결합이기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적 비전을 가진 집단들이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맺은 불편한 관계 속에서 연주된 이중주(二重奏)였다. 이런 점에서 링슈트라세의 기념비적 건축물들은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그리고 국가와 시민사회적 이상들을 실어 나르는 도시적 매체였다. 즉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는 근대 도시의 이미지 정치에 개입한 두 세력, 곧 신절대주의와 부르주아지 간의 ‘불안한 균형’의 결과물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근대적인 도시 프로젝트에 의해 건설된 새로운 도시 공간은 점차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민적인 도시 문화의 산실로 변해가는 것은 막을 수는 없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연구의 결과물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활용될 수 있다. 우선 이 근대 도시사 연구는 학술적인 측면에서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를 크게 세 가지 측면, 즉 오스트리아의 자국사, 유럽사, 그리고 세계사적 측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도 꾸준히 학문적인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 세기말 비엔나의 ‘문화적 르네상스’의 물적 토대에 관한 구조적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야말로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의한 도시 근대화가 없었다면, 세기말 비엔나의 문화적 휘광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연구는 세기말 비엔나가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의해 탄생된 (전)근대적 산물이라는 주장에 대한 색다른 인식을 위한 튼튼한 초석을 놓았다. 둘째, 이 연구는 오스트리아의 근대성뿐만 아니라 유럽의 근대성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근대화 모델은 영국식 모델과 독일식 모델로 나뉜다. 전자가 자유민주주의적 발전 모델이라고 말한다면, 후자는 보수주의적 발전 모델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이 연구가 밝혔듯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근대화의 길은 위의 두 가지와는 상이한 궤적을 그리기 때문에 제3의 근대성 모델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제3의 근대’ 모델은 근대 유럽의 문화적 정체성을 재조명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셋째, 이 연구는 유럽의 근대성 연구를 넘어서 아시아, 특히 대한제국의 근대성 연구를 위해 비교해 볼만한 서구 모델을 제공해 준다.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의 근대성 연구 또한 전통주의적 입장과 근대주의적 입장으로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형편인데, 이 상황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독특한 근대화 과정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밑바탕으로 제3의 근대 모델과 같은 새로운 근대성 연구에 박차를 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다음으로 이 연구 결과는 세계 도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시민들을 위한 교양 교육적 측면에서 기여할 수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방식, 즉 대학 내 정규 교육에서, 그리고 대학 이외의 시민을 위한 도시 인문학 강좌에서 적극 활용될 수 있다. 첫째, 이 연구의 결과물은 도시사 관련 대학교 강의를 위한 중요한 교육 내용을 제공해 준다. 이 과목이 특히 세계 각지의 주요 도시의 근대성 문제에 주안점을 두는 과목일 경우라면, 이 연구 결과물은 대단히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파리의 오스망 프로젝트(파리 도심지 개발 사업)와는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연구 논문은 하나도 없다. 특히 세기말 비엔나의 근대화 과정은 다른 유럽 국가의 주요 도시들과는 달리 독특한 유형으로 구별되는 바, 심도 깊은 논의를 위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기대된다. 둘째, 이 연구의 결과물은 시민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위한 중요한 교육 콘텐츠를 제공해 준다. 오늘날 인문학에 대한 일반 시민 대중들의 관심이 크게 진작되고 있는 시점에서 세계 각국의 수도에 관한 도시사 강좌는 그들의 교육적 열망을 더욱 배가시켜 주는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될 것이다. 특히 도시의 공간과 도시 건축, 그리고 도시 축제를 중심으로 근대 도시 인문학에 관한 시민 강좌는 시민들의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덧붙여, 점점 더 늘어가는 비엔나 여행객을 위한 좋은 길라잡이용으로 적극 활용될 수 있다. 비엔나 수도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의 시선은 도시의 외적 경관에 주안점을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바, 비엔나 도시 문화의 역사적 뿌리를 사전 학습한다면, 유럽 여행이 단순한 관광으로 전락하지 않고 유럽 도시의 문화 산책이라는 격조 높은 역사 체험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럽의 근대 도시의 문화에 대한 연구들은 21세기형 여행 문화를 직조하는 유용한 문화적 지도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연구결과의 효용 가치는 매우 크다.
  • 색인어
  • 세기말 비엔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 비엔나 도시법, 황제 프란츠 요세프, 황제 포럼, 시민 포럼, 군사포럼, 근대 도시의 이미지 정치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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