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의 목적은 19세기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역사적 위상을 근대 도시의 이미지 정치라는 시각에서 살펴본 것이다. 먼저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관한 기존의 해석들은 세 가지 지점에서 의견이 서로 다르다. 첫째, 이 공공사업을 ...
이 연구의 목적은 19세기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역사적 위상을 근대 도시의 이미지 정치라는 시각에서 살펴본 것이다. 먼저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에 관한 기존의 해석들은 세 가지 지점에서 의견이 서로 다르다. 첫째, 이 공공사업을 발의한 요제프 황제의 정체성, 둘째, 이 공공사업의 기본 성격, 셋째, 이 공공사업에 의해 세워진 공공건축물의 상징성. 그런데 기존의 입장은 모두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가지고 이 공공사업의 역사적 의의를 쉽게 단정해 버렸다. 따라서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와 도시 건축물에 나타난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화 정치의 역학을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장에서는 링슈트라세 프로젝트가 과연 어떤 시대적 배경 하에서 발의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이 공공사업은 우선 19세기 초엽 나폴레옹 군대의 공략 이후, 성벽 전체를 헐고 도심지와 외곽지역을 하나로 통합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이 공공사업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제국 정부는 상당히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1848년, 비엔나 시민들은 한층 더 진보적인 새로운 도시법령을 제정하자는 주장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혁명 직후 즉위한 요제프 황제가 이 도시법령을 수용하였다. 즉 1857년 12월 20일, 프란츠 황제가 비엔나 도시 확장 계획에 관한 교서를 공포하라고 지시하였다. 결국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를 직접 발의하는 형식을 띤 이 황제의 칙서는 도시 확장 계획의 필요성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 결과 대단위의 비엔나 도시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3장에서는 링슈트라세 프로젝트가 어떤 과정을 통해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한편, 황제 교서가 발표된 직후, 내무부 장관 폰 바하 남작은 비엔나 도시 개발 사업을 전담하는 정부 기구를 신설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이 건축 위원회는 통상부의 모리츠 뢰어(Moritz Löhr)에게 설계도를 맡겼다. 그의 기본 설계도가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져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기본 계획이 확정되었다. 이 기본 설계도의 기본 골자는, 첫째, 군사적 고려, 둘째, 도나우 운하와 부도 시설의 정돈, 셋째, 링슈트라세 건설, 넷째, 신축 건물의 모둠 배치, 다섯째, 도심지의 정돈이었다. 다른 한편, 제국 정부는 재정 업무 전담 기구를 신설하였다. 이 기구는 새로운 도시 확장 기금(Stadterweiterungsfond)을 조성하고 시민들에게 건축 부지를 매각함으로써 공사비용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제국 정부의 건축 경기 부양책이 발표되자, 특히 부유한 비엔나 유대인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정부는 유대인들의 토지구입 금지법을 철회하여 주었다. 그 결과, 비엔나 도시 개발을 위한 기본 설계도와 필요한 재정을 확보한 제국 정부는 대대적인 공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고, 성벽 철거와 공터 정지 작업, 그리고 대로 건설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4장에서는 링슈트라세 도시 개발 사업에 따라 세워진 건축물들이 어떤 것이며, 그리고 그러한 도시 건축물들이 갖는 상징 정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석하였다. 이 공공사업에 의해 세워진 대표적인 공공건축물은 황제 포럼과 시민 포럼, 그리고 군사 포럼 공공건축물로 나뉜다. 먼저 바로크 양식에 따라 만들어진 신궁전과 자연사 박물관, 그리고 예술사 박물관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황제의 위엄을 건축적으로 미화시킨 작품이고, 둘째, 중세 고딕식과 르네상스식으로 지어진 비엔나 시청과 비엔나 대학교, 그리고 국회의사당은 비엔나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포부를 미학적으로 승화시켜낸 부르주아지 예술의 걸작이었다. 마지막으로 군사 포럼에 속하는 병영 건물들은 막강한 반혁명적인 군사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결론적으로, 이처럼 세기말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는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불편한 공존 관계 속에서 구상, 발의, 기획, 실행, 그리고 마무리된 불안한 근대의 공공사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