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과제 검색 > 연구과제 상세정보

연구과제 상세정보

맥아더의 도쿄재판 처리와 전후 한일관계의 굴절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8-327-A00083
선정년도 2008 년
연구기간 1 년 (2008년 11월 01일 ~ 2009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이상호
연구수행기관 한국학중앙연구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좌우익의 치열한 이념대립으로 인해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미군정시기를 거쳐, 남북한이 각각 단독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특히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한의 경쟁과 이후 벌어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한 당사자들은 일본에 대한 전범처리에 대해 어떠한 발언권도 행사할 수 없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당사국이 되지도 못하였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1945년 8월 30일 미군이 일본에 진주했다. 1945년 9월 11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맥아더는 도조 히데키 등의 39명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1946년 1월 19일 전쟁범죄를 심리 · 처벌하기 위해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설립에 관한 명령’을 공표했다. 이 명령에 따라 극동국제군사재판소(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ar East, IMTFE)가 설립되어, 1946년 5월 3일 재판이 개시되었다.
    일명 도쿄재판이라 불리우는 전후 극동지역에서의 전범재판은 A, B, C 급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A급 전범은 국제조약을 위반하고 침략전쟁을 기획, 준비, 수행한 자들이고, B급 전범은 전쟁법과 전쟁관습법을 위반한 자들이며, C급 전범은 상급자의 명령에 의하여 고문과 살인을 직접행한 사람들로 분류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이 재판은 실제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을 집행하기 보다는 전후 미국의 대일 정책의 변화에 따라 철저한 심리를 개진하지 못했고, 2년 반의 심리를 거친 끝에 1948년 11월 12일에 판결이 내려져 A급 전범 가운데에서는 7명의 피고만이 처형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범들은 몇 차례에 걸쳐 석방되어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전후 처리는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이 재판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전후 한일관계의 굴절이 이 재판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 때문이다. 도쿄재판은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므로 이에 대한 최종 결과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도쿄재판에서 가장 주목할 사실은 일본 전범들의 행위를 1928년부터 1945년까지로 한정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 대한 불법 침략 및 식민지 예속화 등 한국과 관련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는 전쟁 책임을 둘러싸고 매우 미흡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한국이 참여하지 못한 관계로 전후 한일관계에서 한국의 발언권이 상당히 축소되어 나타나게 되었고 이는 현재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독도 영유권이나 강제동원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쟁의 단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맥아더와 워싱턴 당국 사이의 전문을 통해 재판의 처리절차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1) 학문적 기여도
    본 연구는 현재 다양한 연구결과를 생산해 내고 있는 한국현대사의 연구범위를 넓히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즉 전후 일본에 대한 전범재판에 대한 연구는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뿐만이 아니라 한일관계의 역사를 좀 더 세밀히 분석한다는 측면에서 일정정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현재 재일동포 문제를 포함하여, 한일간에 쟁점이 되고 있는 독도 영유권문제와, 태평양전쟁기 이루어졌던 한국인 강제동원 등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연구 경향에 새로운 연구 영역을 확장한다는 연구사적 기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새로운 한일관계의 정립을 위해서라도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해 치밀하고 정확한 연구야말로 우리의 대일관을 어떻게 구축해 나갈 수 있는가를 평가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며 향후 전개될 한일 역사 경쟁에서도 일정한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한다.
    2) 사회적 기여도
    현재 한일간에 벌어지고 있는 독도영유권 갈등문제를 포함한 역사 분쟁은 국내에서 전후처리에 대한 학문적 연구결과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에 일부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한 부분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에서 요구되고 있는 한일관계의 역사적 인식을 폭넓게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본 연구 결과가 전후 한일관계의 굴곡과 변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재조명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의 논문개요는 다음과 같이 5장으로 구성된다.

    1. 서 론
    2. 맥아더의 일본진주와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설치
    1) 맥아더의 일본진주와 전범처리를 위한 준비
    2) 전범의 체포와 맥아더사령부의 주도적 활동
    3. 도쿄재판의 진행과 문제점
    1)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운영과 종료
    2) 도쿄재판에 대한 평가 - 미완의 재판
    4. 도쿄재판과 한일관계의 실타래
    1) 한국의 강화조약 참여 배제와 식민지 청산 기회의 좌절
    2) 강기(强記)와 치매(癡呆)의 평행선
    5. 결론

    본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시기적으로는 역사적 접근방법(Historical Approach)을 기본으로 하고 공간적으로는 비교사적 접근방법을 통해 문제해결을 도모한다. 역사적 접근방법을 위해서는 당시에 공간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시기에 따라 편년체적 해석을 통해 분석할 것이다. 우선 맥아더사령부를 중심으로 당시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등 워싱턴 당국 사이에 주고받은 전문철이 그 대상이 된다.
    맥아더기념관 문서철은 그 시기와 대상에 따라 약 100여개의 문서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본 연구를 위해 가장 중요한 문서철로 평가되는 것은 RG 9 문서철이다. RG-9의 공식 명칭은 전문철(Collection of Messages)로 1945년부터 1951년까지의 전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군에는 일본항복에 따른 작전보고서와 일본점령정책 및 주한미군과 맥아더사령부와의 전문철이 포함되어 있다.
    총 164Box로 구성된 이 자료는 해방 직후 정부 수립기까지의 한국 내정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뿐만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점령 정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본 논문에 사용되는 Blue Binder Series는 하드커버로 둘러싸인 진한 청색 바인더로 묶여 있는데 61개의 Binders에 총 9500여장의 문서가 수록되어 있고, 기본적으로 전문뿐만이 아니라 편지, 비망록 등 맥아더와 그의 부관들이 가장 중요한 문서로 취급한 것을 모아놓았다. 보안등급은 최고기밀부터 기밀해제가 되지 않은 것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 문서철은 당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본 연구에서 분석할 문서철은 바로 이 Blue Binder Series 가운데 주제별 분류로 War Crimes라는 폴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문서철은 1945년 9월 12일부터 1950년 5월 29일까지 약 320여종의 문서로 구성되어있다.
    또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에 보관된 RG 226을 중심으로 워싱턴 당국, 특히 국무부내의 정보조사국(Office of Intellegence Research) 의 문서철을 보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정보조사국은 미 국무부내의 산하기구로 중요사안에 대해 산학협동 연구로 중요한 연구보고서를 생산해 내는 연구기관이다. 본 연구를 위해 이 정보조사국에서 작성한 OIR Report를 활용하여 맥아더사령부라는 현지관할부대와 워싱턴 당국 사이에 도쿄재판을 둘러싼 입장 차이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본다.
    각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우선 서론에서는 본 논문과 관련한 연구사정리를 통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자료와 연구방법론을 소개한다.
    2장에서는 맥아더기념관 자료를 기초로 맥아더의 일본점령정책의 진행과정과 전쟁범죄 처벌에 대한 준비과정을 살펴본다. 또한 일본전범의 분류에서 ‘일본천황’은 어떻게 검거 대상에서 제외되는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전범체포와 관련하여 당시 남북한의 우리 민족의 반응은 어떠했는지도 알아본다.
    3장에서는 도쿄재판을 둘러싼 각 제 세력들의 대응과 정책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본다. 특히 미 워싱턴 고위 당국의 정책이 현지사령부인 맥아더사령부에 전달되었을 때 어떤 방식으로 확대 및 축소 적용되었는지를 분석한다. 또한 왜 전쟁범죄의 소추대상자의 범죄행위 기간이 1928년으로 기산되었는지를 통해 한반도에서 벌인 일본의 비인도적 범죄가 어떻게 면제되었고, 그것이 향후 전후 한일관계에서 어떤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를 평가해 본다.
    4장에서는 도쿄재판이 마무리 된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진행과정과 한국이 조약 당사국으로 배제된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이에 따라 한일협상이 진행되던 당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지를 살펴본다. 또한 이러한 결과가 식민지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어떠한 장애가 되었으며, 결국 전후 한일관계의 굴절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평가한다.
    결론에서는 서론에서 언급한 문제제기와 연구내용을 요약 정리하며 역사적 평가를 지적한다.
  • 한글키워드
  • 전쟁범죄국,전쟁범죄,한일관계,도쿄재판,맥아더,극동국제군사재판,연합국최고사령부,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영문키워드
  • San Francisco Conference,U. S. War Crimes Office,Douglas MacArthur,Tokyo War Crimes Trial,GHQ/SCAP,Korea-Japan Foreign Relations,War Crimes,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ar East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2차 대전 후 전범재판의 필요성이 연합국 사이에 대두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였다. 1943년 런던에서 설립된 연합국전범위원회는 아시아-태평양 국가로 중국, 호주, 미국, 뉴질랜드, 인도를 포함하여 17개국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일본과 독일의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재판은 1943년 10월 모스크바 선언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1945년 8월 16일 일본인 전범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일본에 대한 항복조인식이 거행된 지 10일이 지난 1945년 9월 12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에게 일본인 전쟁범죄자의 처벌을 위한 군사법정이나 재판을 준비하라고 지시하며, 유럽에서 적용될 절차에 따라 포괄적인 지시사항을 전달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1945년 9월 22일 전쟁부는 맥아더에게 전범재판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1946년 2월 1일 극동국제군사재판소(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ar East)가 개정되었다. 일명 도쿄 재판이라고 불리는 전후 극동지역에서의 전범재판은 A, B, C급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맥아더는 천황을 기소하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소련, 네덜란드, 중국 등의 주장을 초기부터 거부했다. 맥아더의 입장은 일본천황을 전범재판에 기소할 시 일본인 사이에 소요가 발생할 위험성이 있다는 논리였다. 특히 1947년부터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반소정책의 보루로서 활용할 의도를 드러냄으로써 일본인에 대한 전범처리는 그 강도가 약화되었고, 결국 1948년 12월 7명만을 교수형에 처하는 것으로 종결지었다.
    태평양전쟁 종결 이후 맥아더는 일본통치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푸른 눈의 대군’으로 일컬어지던 맥아더는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을 통해 일본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조했다. 맥아더의 일본점령정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이 혼재해 있지만, 대체적으로 맥아더의 초기 점령정책은 군국주의를 일소하고, 일본사회내부에 민주화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냉전이 시작되며 일본이 공산주의의 상징적 방어 지역으로 전환된 1947년 이후 이러한 개혁 정책도 보수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보수화정책 가운데에는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을 적용하는 데 있어 그 범위와 강도를 축소한 맥아더의 입장이 크게 반영되어 있었다. 결국 맥아더의 전범재판에 대한 대응은 향후 한일관계의 중요한 시금석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즉 이러한 도쿄재판의 처리는 향후 한일관계에 있어 과거사에 대한 반성,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적절한 보상 등 양국사이의 문제해결을 위한 기초를 뒤엎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게 도쿄재판의 조기 종결을 통해 일본의 부흥을 주장했던 맥아더와 미국의 결정은 이후 15년 동안 진행되는 한일협상에서 일본 측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제공해 주었고, 그 그림자는 현재의 독도문제 및 문화재 반환문제 등 한일관계의 파열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 영문
  • In September 11th, 1945, Douglas MacArthur as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issued an order of arrest for the Pre-Prime Minister of Imperial Japan Tojo Hideki and 39 persons. Thereafter, in January 19th, 1946, Instruction was promulgated ‘Establishing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ar East’, and the trial started from May 3rd, 1946.
    But it was not realized that war criminal was not strictly punished. On the contrary, they were relieved by means of transformation of American policy toward the Japan. Finally, only 7 of the defendants of war crime were executed going through inquiry of over 2 years in December 23th, 1948.
    Because it affected to the Korea-Japan relations after Korea's Liberation of 1945, this IMFTE case was important to the Korean contemporary history. In this essay, we investigated IMFTE processing through telegram which exchanged between MacArthur and Washington over the Tokyo Trial.
    If MacArthur and Washington deal with the Tokyo Trial severely, Korea-Japan Relation is cordial relations - reconciliation of oppression and resistance between two nations, the correct view of history and cooperation for future success.
    After all, Korea-Japan foreign relation was distorted because it was lenient treatment of criminal of Japanese Imperialism.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2차 대전후 전범재판의 필요성이 연합국 사이에 대두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였다. 1943년 런던에서 설립된 연합국전범위원회는 아시아-태평양 국가로 중국, 호주, 미국, 뉴질랜드, 인도를 포함하여 17개국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일본과 독일의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재판은 1943년 10월 모스크바 선언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1945년 8월 16일 일본인 전범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46년 2월 1일 극동국제군사재판소가 개정되었다. 일명 도쿄 재판이라고 불리우는 전후 극동지역에서의 전범재판은 A, B, C급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맥아더는 천황을 기소하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소련, 네덜란드, 중국 등의 주장을 초기부터 거부했다. 맥아더의 입장은 일본천황을 전범재판에 기소할 시 일본인 사이에 소요가 발생할 위험성이 있다는 논리였다. 특히 1947년부터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반소정책의 보루로서 활용할 의도를 드러냄으로써 일본인에 대한 전범처리는 그 강도가 약화되었고, 결국 1948년 12월 7명만을 교수형에 처하는 것으로 종결지었다. 이러한 도쿄재판의 처리는 향후 한일관계에 있어 과거사에 대한 반성,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적절한 보상 등 양국사이의 문제해결을 위한 기초를 뒤엎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게 도쿄재판의 조기 종결을 통해 일본의 부흥을 주장했던 맥아더와 미국의 결정은 이후 15년동안 진행되는 한일협상에서 일본측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제공해 주었고, 그 그림자는 현재의 독도문제 및 문화재 반환문제 등 한일관계의 파열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현재 다양한 연구결과를 생산해 내고 있는 한국현대사의 연구범위를 넓히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즉 전후 일본에 대한 전범재판에 대한 연구는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뿐만이 아니라 한일관계의 역사를 좀 더 세밀히 분석한다는 측면에서 일정정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현재 재일동포 문제를 포함하여, 한일간에 쟁점이 되고 있는 독도 영유권문제와, 태평양전쟁기 이루어졌던 한국인 강제동원 등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연구 경향에 새로운 연구 영역을 확장한다는 연구사적 기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새로운 한일관계의 정립을 위해서라도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해 치밀하고 정확한 연구야말로 우리의 대일관을 어떻게 구축해 나갈 수 있는가를 평가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며 향후 전개될 한일 역사 경쟁에서도 일정한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본 연구는 현재 한일간에 벌어지고 있는 독도영유권 갈등문제를 포함한 역사 분쟁은 국내에서 전후처리에 대한 학문적 연구결과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에 일부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한 부분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에서 요구되고 있는 한일관계의 역사적 인식을 폭넓게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본 연구 결과가 전후 한일관계의 굴곡과 변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재조명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 색인어
  • 맥아더, 도쿄재판, 극동국제군사재판, 한일관계, 연합국최고사령부, 전쟁범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전쟁범죄국
  • 연구성과물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