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왕비 팔수부인의 출자와 관련해서 진씨설, 왜계설, 해씨설이 있다. 진씨설은 전지왕 즉위이후 왕척으로 활동한 해씨들의 활동을 설명하기 어렵고, 왜계설은 진사왕-아신왕-전지왕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팔수부인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 ...
백제 왕비 팔수부인의 출자와 관련해서 진씨설, 왜계설, 해씨설이 있다. 진씨설은 전지왕 즉위이후 왕척으로 활동한 해씨들의 활동을 설명하기 어렵고, 왜계설은 진사왕-아신왕-전지왕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팔수부인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전지왕 즉위년에 팔수부인이 구이신을 낳고 왕척 해수와 해구가 각각 내법좌평과 병관좌평에 임명되는 것으로 보아, 팔부수인의 성씨는 해씨로 추정된다.
팔수부인은 아신왕 전지가 태자로 책봉된 394년에서 전지가 왜국에 질자로 가게되는 397년 사이에 혼인하여 태자비가 되었다. 왜국에 9년동안 체류하다가 전지와 함께 회임의 몸으로 405년 백제로 귀국한다. 그해 전지는 반대파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는데, 이 와중에 팔수부인은 구이신을 낳는다. 팔수부인은 구이신왕이 어려 섭정을 하는 등 정치에 일선에 나서기도 한다.
내법좌평의 내법은 불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선왕이 내법을 믿었다거나, 승려 혜원이 내법을 믿었다는 것에서 알 있듯이 내법은 불법을 말하고 있다. ‘法’의 의미 자체에는 예법, 불법, 법령 등의 뜻을 갖고 있지만 ‘法’이 ‘內’와 결합하면 불법의 뜻을 갖게 된다. 이러한 용법은 ‘經’, ‘典’, ‘敎’, ‘律’, ‘道’, ‘起居’도 마찬가지여서 內經은 佛經, 內典은 佛典, 內敎는 佛敎, 內律은 佛敎의 律, 內道는 佛道, 內起居는 佛敎관련 기록을 의미하게 된다.
진씨 세력의 극성기에 해씨가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된 계기는 전지왕의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데 있다. 해씨가 전지왕을 돕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드러나지 않지만, 팔수부인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전지왕 즉위년 조에 팔수부인이 구이신을 낳았다만, 이미 전지가 태자 시절에 해씨 출신의 팔수부인을 태자비로 맞이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아신왕이 해씨 출신의 팔수부인을 태자비를 받아들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사왕을 몰아내는데 해씨가 일조를 한 대가이기도 했다. 아신왕이 즉위 다음 달 내린 불교를 믿으라[숭신불법구복]는 교서는 아신왕의 통치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해씨도 이에 적극 동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씨와 불교와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어린 전지의 태자비가 된 팔수부인도 시아버지인 아신왕대의 불교적 분위기에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전지와 함께 생사를 걱정하면서 바다 건너 왜국에 갔고 그 곳에 9년 동안 머물고 임신한 몸으로 다시 귀국하게 된 그의 역정을 고려할 때 불법에 의지하여 복을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전지왕 및 팔수부인을 포함한 해씨의 불교적 분위기는 칠지도의 명문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칠지도의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태화를 동진의 연호로 보고 태화 4년에 해당하는 369년으로 보아왔다. 그런데 명문의 칠지도를 만든 일자가 5월이 아닌 11월로 판독되고, 병오정양의 정양이 黃龍으로 밝혀지면서, 병오정양이 길상구가 아닌 실제의 간지일 가능성이 높아 졌다. 따라서 칠지도의 태화는 백제의 연호로 추정되고 만든 연대는 11월 16일 병오에 해당되는 408년으로 추정된다. 칠지도의 제적목적에 대해서는 칠지도의 왕세자를 408년 구이신의 탄생과 연관을 맺기고 하지만 아신왕이 왕위계승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어린 전지(7세전후로 추정)를 태자에 책봉한 점을 고려하면 408년 구이신의 태자 책봉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칠지도의 제작을 관할했던 관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비시기의 관서이지만 22부사에 보이는 內官의 刀部의 前身이 칠지도를 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통 도부를 北周의 관제와 비교하여 夏官武藏에 대비시킨다. 그런데 왕실과 관련된 內官의 도부는 일반 무기를 생산하는 부서로 보아서는 안된다. 칠지도나 환두대도와 같은 의장용 무기를 만드는 곳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칼을 만드는 부서는 하관 소속이 아니라 예부[춘관] 소속으로 보아야 한다. 수서에는 환두대도의 여러 종류를 禮儀 鹵簿에서 설명하고 있다.
해씨 출신의 해수는 전지왕 3년(407) 내법좌평에 임명되는데 전지왕 4년(408)년에 만들어지는 칠지도의 총괄책임은 내법좌평 해수가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칠지도가 구이신과 관련된 칼이라면 구이신의 아버지인 전지왕은 물론 어머니인 팔수부인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구이신의 태자책봉을 칠지도 명문에 ‘百濟王世子寄生聖音’이라 하고 있는데, 구이신의 태자 책봉을 성음[붓다의 음성]과 연관시켜 부처의 加護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이제까지 전지왕대 불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지금까지 만들어진 바가 없는 칠지도에 ‘성음’을 새긴 것에서 전지왕대의 불교 및 해씨와 불교와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