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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백제 왕비 八須夫人과 內法佐平 解須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9-327-A00017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1 년 (2009년 11월 01일 ~ 2010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조경철
연구수행기관 연세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백제의 왕실 여성으로 알려진 인물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의하면 책계왕의 왕비인 대방왕녀 寶菓, 침류왕의 어머니인 阿尒夫人, 전지왕의 왕비인 八須夫人 등 3명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무왕의 왕비 善花公主 1명이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며 성왕의 딸인 妹兄公主, 무왕의 왕비인 沙宅王后가 새롭게 왕실 여성으로 밝혀졌다. 매형공주는 능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였다. 특히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舍利奉安記에 의하면 무왕의 왕비면서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 인물은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로 밝혀져 선화공주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이번 사택왕후의 출현으로 백제 왕비가 차지하는 정치적, 사상적 위상이 생각보다 높았음을 알 수 있었다.
    사택왕후의 출현을 계기로 기존에 알려졌던 보과, 아이부인, 팔수부인 등 백제 왕비의 역할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본 주제에서 다루고 있는 팔수부인인 世界人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倭[日本]을 오가면서 전지왕의 태자비와, 전지왕의 왕비, 구이신왕의 태후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수부인에 대해선 이렇다 할 연구가 없었다. 최근 새로운 연구로 팔수부인의 출자를 眞氏나 倭 출신의 여자로 파악한 논고가 있었다.
    특히 후자의 견해인 팔수부인의 왜 출자설은 4~5세기 한일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한일관계의 밀접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왜의 영향을 과대평가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서 팔수부인의 출자가 종전의 견해대로 解氏임을 밝혔다. 또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팔수부인의 여성으로서의 역정과 그의 정치적, 사상적 경향을 밝히고자 하였다. 특히 해씨의 성장 배경을 불교와 연관시켜 보았다.
    팔수부인에 대한 기록이 한 두 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사상적 경향성을 살피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팔수부인과 같은 해씨이면서 내법좌평과 상좌평을 역임한 解須를 통해서 팔수부인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 팔수부인과 해수를 통해서 백제 한성시대 팔수부인을 중심으로 한 해씨의 정치적·사성적 역할이 부각될 것이다.
  • 기대효과
  • 八須夫人에 대한 연구는 종래 도외시되었던 고대 여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생각된다. 수동적인 여성이 아니라 전지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임신을 하고 임신한 몸으로 백제로 건너와서 아들 구이신왕을 낳을 만큼 역정의 일생을 살아간 인물이다. 이후 백제 성왕의 딸인 매형공주의 사리봉안이나, 무왕의 왕비인 사택왕후의 미륵사 창건과 사리봉안에 대한 연구나, 신라의 선덕·진덕·진성에 대한 재평가에 촉매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사실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지만 여성은 역사 주체에서 배제된 느낌이 없지 않다. 유교가 추구하고자 하는 성인이나 불교에서 추구하는 붓다는 여성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교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불교에서도 여성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卽身成佛論이 있었다. 역사상에 나타나는 여성은 수동적인 입장이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역사를 재구성하면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사택왕후를 존칭의 의미인 卽身을 붙여 王后卽身이라 하고 있다. 왕후즉신은 ‘왕후께서는’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즉신이 존칭의 의미가 된 이유는 卽身成佛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즉신성불은 『법화경』 『승만경』 등의 교설로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성불론이다. 고대사에서 여성은 불교를 통해서 자신의 사상적·정치적 역할을 해 나갔던 것이다.
    내법좌평이 맡은 임무가 불교와 관련된다면 백제의 좌평제의 전개과정이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내법좌평의 임무가 『구당서』에서 말하는 ‘掌禮儀事’라고 했지만 실은 내법좌평이 설치될 때 주요 임무는 불교였고, 이후 맡은 일이 확대되어 禮儀에 관한 일까지 맡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6[5]좌평제의 실시시기도 사비기가 아니라 한성시기로 앞당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의 한성시기 불교는 침류왕과 아신왕대 1~2개 기사가 전부이다. 본 논문에서 다루는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대에는 불교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내법좌평이 불교와 관련된 좌평이며, 해씨의 사상적 기반이 불교라면 그 동안 묻혀 있었던 한성시기 백제 불교에 대해서 이해가 깊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한일관계에 대한 이해의 방향이다. 한일관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지금까지 한국학계에서 과소평가된 면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에 대한 倭의 영향력을 예전보다 강조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이는 새로운 한일관계사를 정립하는데 고무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팔수부인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되도록 왜와 연결시키는 문제는 신중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 연구요약
  • 팔수부인의 정치·사상적 배경을 살피기 위해서 먼저 그녀의 出自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팔수부인의 출자에 대해선 解氏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으나, 이후 眞氏, 倭系라는 설이 대두되었다. 최근 제시된 왜계설이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다. 진씨, 해씨 설이 대두된 배경은 『삼국사기』 비유왕조에 비유왕의 출자가 구이신왕의 아들이라는 설과 전지왕의 庶子라는 설이 나란히 제기된데 있다. 즉 전지왕의 부인이 팔수부인 말고 비유왕의 어머니인 해씨 부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眞氏說은 전지왕의 부인이 2명 이상이라는 것에 착안을 했고, 倭系說은 여기에 덧붙여 전지왕의 渡倭 기간이 길었으므로 倭에서 倭女인 팔수부인을 태자비로 맞아들일 수도 있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진씨설에 대해서는 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으로 이어지는 백제의 정치상황을 고려하면서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백제사에서 왕비를 배출한 眞氏, 解氏, 沙宅氏는 왕척으로 정계의 일선에 활동하고 있는데, 팔수부인이 진씨라면 팔수부인이 활동한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대 진씨가 보여야 한다. 그러데 진씨는 보이지 않고 해씨가 정치일선에 등장하고 있다.
    왜계설의 근거는 앞서 제시한 渡倭 기간 이외에도 몇 가지가 있다. 백제와 왜의 結好는 혼인을 전제로 한 것이고, 팔수부인의 八須란 이름의 ‘八’이 왜계 이름이란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역사상 나타나는 結好의 의미를 살펴보고 결호가 혼인을 매개로 한 우호가 아니고 돈독한 외교의 일반적인 형태와도 관련을 맺어볼 것이다. 또한 八須란 이름도 왜계 이름이 아니고 삼국에서 자주 쓰이는 이름임을 밝히려고 한다. 일 예로 팔수의 須는 백제의 왕인 貴須王에 보이고 있다. 또한 八須는 같은 시기 활약한 백제 내법좌평 解須와 인척으로 추정되면 ‘須’자를 이름에 같은 쓰고 있다. 더구나 백제의 국내 사정을 자세히 전하고 있는 『일본서기』에 팔수부인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을 부각시킬 예정이다.
    팔수부인은 아신왕대 최초로 해씨 출신의 여자로 태자 전지의 태자비로 들어갔다. 전지가 왜에 인질로 가게 되자 팔수부인도 따라갔다. 왜에 머문 지 9년째 임신을 하였다. 아신왕이 죽자 전지를 따라 백제로 건너와서 전지의 숙부인 설례와 왕위계승을 치루는 과정에서 아들 구이신을 낳게 된다. 전지왕의 왕비가 된 팔수부인은 친척인 내법좌평 해수와, 병관좌평 해구와 더불어 정치의 일선에 나서게 되고 아들 구이신왕이 왕위에 오른 이후 섭정을 하게 된다. 팔수부인은 목만치와 더불어 국정을 농단하게 된다.
    전지왕대 내법좌평 해수는 王戚으로 비유왕대 최고 관직인 상좌평에 오르기도 한다. 같은 왕척인 解丘는 병관좌평이기도 했다. 백제의 좌평제 혹은 6[5]좌평의 성립시기와 직임이 있는 좌평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內法佐平이 맡았던 임무를 ‘禮儀’ 보다는 불교 측면에서 고찰해 볼 것이다. 內法이란 용례를 추출하여 불교와의 관련성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한 예로 북제의 문선제가 內法을 믿어 종묘에 血食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의 內法은 불교를 말한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미륵사 사리봉안기에는 法王, 正法, 法界 등의 용례가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보이는 ‘法’의 용례는 內法의 法이 불교와 연관성이 있음을 보강해 준다.
    보통 6좌평이 사비기에 만들어졌고, 그 이전에 보이는 00좌평은 소급해서 붙인 이름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禮儀를 맡은 좌평의 이름을 禮儀좌평이나 禮法좌평이라 하지 않고 內法좌평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냐하면 사비기 백제의 유교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內法이 佛法을 의미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법좌평이 후대에 소급되어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당대에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백제 왕비 팔수부인과 내법좌평 해수 등의 해씨 세력이 새롭게 백제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배경은 아신왕의 ‘불법숭신구복’이란 조서와 내법좌평의 내법이란 의미에서 사상적으로는 불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는 한성기 공백으로 남아있는 백제 불교를 이해하는데 한 단서가 될 것이다.
  • 한글키워드
  • 내법좌평,왜계,진씨,해수,비유왕,팔수부인. 전지왕,일본서기,불교,삼국사기,내법,백제,구이신왕,해씨
  • 영문키워드
  • Buddhism,Haesu,Wae,King Jeunji,Palsubuin,Baekjae,Samgukyoosa,King Guisin,KIng Biyou,Hae Family,Jin Family,Naebewpjawpyung,Naebewp,Samguksagi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백제 왕비 팔수부인의 출자와 관련해서 진씨설, 왜계설, 해씨설이 있다. 진씨설은 전지왕 즉위이후 왕척으로 활동한 해씨들의 활동을 설명하기 어렵고, 왜계설은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팔수부인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전지왕 즉위년에 팔수부인이 구이신을 낳고 왕척 해수와 해구가 각각 내법좌평과 병관좌평에 임명되는 것으로 보아, 팔부수인의 성씨는 해씨로 추정된다.
    팔수부인은 아신왕 전지가 태자로 책봉된 394년에서 전지가 왜국에 질자로 가게되는 397년 사이에 혼인하여 태자비가 되었다. 왜국에 9년동안 체류하다가 전지와 함께 회임의 몸으로 405년 백제로 귀국한다. 그해 전지는 반대파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는데, 이 와중에 팔수부인은 구이신을 낳는다. 팔수부인은 구이신왕이 어려 목만치를 조정하면서 섭정을 하는 등 정치에 일선에 나서기도 한다.
    내법좌평의 내법은 불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선왕이 내법을 믿었다거나, 승려 혜원이 내법을 믿었다는 것에서 알 있듯이 내법은 불법을 말하고 있다. ‘法’의 의미 자체에는 예법, 불법, 법령 등의 뜻을 갖고 있지만 ‘法’이 ‘內’와 결합하면 불법의 뜻을 갖게 된다.
    전지왕 및 팔수부인을 포함한 해씨의 불교적 분위기는 칠지도의 명문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칠지도의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태화를 동진의 연호로 보고 태화 4년에 해당하는 369년으로 보아왔다. 그런데 명문의 칠지도를 만든 일자가 5월이 아닌 11월로 판독되고, 병오정양의 정양이 황룡으로 밝혀지면서, 병오정양이 길상구가 아닌 실제의 간지일 가능성이 높아 졌다. 따라서 칠지도의 태화는 백제의 연호로 추정되고 만든 연대는 11월 16일 병오에 해당되는 408년으로 추정된다. 칠지도의 제적목적에 대해서는 칠지도의 왕세자를 408년 구이신의 탄생과 연관을 맺기고 하지만 아신왕이 왕위계승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어린 전지(7세전후로 추정)를 태자에 책봉한 점을 고려하면 408년 구이신의 태자 책봉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칠지도의 제작을 관할했던 관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비시기의 관서이지만 22부사에 보이는 내관의 도부의 전신이 칠지도를 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의장용 칼을 만드는 부서는 하관 소속이 아니라 예부(춘관) 소속으로 생각된다.
    해씨 출신의 해수는 전지왕 3년(407) 내법좌평에 임명되는데 전지왕 4년(408)년에 만들어지는 칠지도의 총괄책임은 내법좌평 해수가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칠지도가 구이신과 관련된 칼이라면 구이신의 아버지인 전지왕은 물론 어머니인 팔수부인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구이신의 태자책봉을 칠지도 명문에 백제왕세자기생성음이라 하고 있는데, 구이신의 태자 책봉을 성음[붓다의 음성]과 연관시켜 부처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까지 전지왕대 불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지금까지 만들어진 바가 없는 칠지도에 성음을 새긴 것에서 전지왕대의 불교 및 해씨와 불교와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 영문
  • Lady Palsu was the royal consort of King Jeunji of Baekje, which was one of the ancient kingdoms of Korea. She was a daughter-in-law of King Asin and mother of King Guisin. Though it is said that her origin is from the Jin clan or Wae, in Japan, her lineage is from the Hae clan. Palsu was born in the reign of King Asin from Hae's family. She married Crown Prince Juenji and became the Crown Prince' wife. Jeunji and Palsu have stayed during 9 years. When King Asin died in 405, Juenji and Palsu came back to Baekjae. Palsu was parturient then. At this time, Juenji's brother Seulrae usurped the throne by force. But Jeunji who was supported by Haechung and the populace of Baekjae ascended the throne. In the vortex of political strife Palsu gave birth to a son, Guisin. King Jeunji appointed Haechung the rank of Dalsol. King Jeunji appointed Haesu and Haegu rank of jwapyung. Both of them were relatives of Queen Palsu. After King Jeunji died, Guisin ascended the throne. According to Nihonshogi Mokmanchi made the power of state affairs to have a relation with Palsu. But in fact Palsu ruled as a regent and accepted him. She was a important figure standing in the center of politics. Queen Palsu was a global figure who crossed the sea for international relations in ancient time.
    Haesu was appointed to Naebewpjawpyung which took charge of diplomacy and ceremony. At that time, the important part of diplomacy and manners were diplomacy and ceremony of Buddhism. Especially the word of Naebewp in Naebewpjawpyung means Buddhism.
    According to inscription of Chiljido, Jungyang means not only Iljung, at noon, but also yellow dragon. Up to recently Taewha was viewed as the era name of Eastern Chin, China and regarded Chiljido was made in May 16, 369. But according to ganji Chiljido was made in December 16, 408. Chiljido was made in commemoration of investiture of The Crown Prince, Guisin. In fact Naebewpjawpyung Haesu undertook Chiljido-making. Lady Palsu also took an interest in this work. According to inscription of Chiljido, Seungeum means Buddha's voice. Through Chiljido we know that they paid close attentions to Buddhism.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백제 왕비 팔수부인의 출자와 관련해서 진씨설, 왜계설, 해씨설이 있다. 진씨설은 전지왕 즉위이후 왕척으로 활동한 해씨들의 활동을 설명하기 어렵고, 왜계설은 진사왕-아신왕-전지왕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팔수부인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전지왕 즉위년에 팔수부인이 구이신을 낳고 왕척 해수와 해구가 각각 내법좌평과 병관좌평에 임명되는 것으로 보아, 팔부수인의 성씨는 해씨로 추정된다.
    팔수부인은 아신왕 전지가 태자로 책봉된 394년에서 전지가 왜국에 질자로 가게되는 397년 사이에 혼인하여 태자비가 되었다. 왜국에 9년동안 체류하다가 전지와 함께 회임의 몸으로 405년 백제로 귀국한다. 그해 전지는 반대파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는데, 이 와중에 팔수부인은 구이신을 낳는다. 팔수부인은 구이신왕이 어려 섭정을 하는 등 정치에 일선에 나서기도 한다.
    내법좌평의 내법은 불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선왕이 내법을 믿었다거나, 승려 혜원이 내법을 믿었다는 것에서 알 있듯이 내법은 불법을 말하고 있다. ‘法’의 의미 자체에는 예법, 불법, 법령 등의 뜻을 갖고 있지만 ‘法’이 ‘內’와 결합하면 불법의 뜻을 갖게 된다. 이러한 용법은 ‘經’, ‘典’, ‘敎’, ‘律’, ‘道’, ‘起居’도 마찬가지여서 內經은 佛經, 內典은 佛典, 內敎는 佛敎, 內律은 佛敎의 律, 內道는 佛道, 內起居는 佛敎관련 기록을 의미하게 된다.
    진씨 세력의 극성기에 해씨가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된 계기는 전지왕의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데 있다. 해씨가 전지왕을 돕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드러나지 않지만, 팔수부인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전지왕 즉위년 조에 팔수부인이 구이신을 낳았다만, 이미 전지가 태자 시절에 해씨 출신의 팔수부인을 태자비로 맞이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아신왕이 해씨 출신의 팔수부인을 태자비를 받아들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사왕을 몰아내는데 해씨가 일조를 한 대가이기도 했다. 아신왕이 즉위 다음 달 내린 불교를 믿으라[숭신불법구복]는 교서는 아신왕의 통치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해씨도 이에 적극 동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씨와 불교와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어린 전지의 태자비가 된 팔수부인도 시아버지인 아신왕대의 불교적 분위기에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전지와 함께 생사를 걱정하면서 바다 건너 왜국에 갔고 그 곳에 9년 동안 머물고 임신한 몸으로 다시 귀국하게 된 그의 역정을 고려할 때 불법에 의지하여 복을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전지왕 및 팔수부인을 포함한 해씨의 불교적 분위기는 칠지도의 명문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칠지도의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태화를 동진의 연호로 보고 태화 4년에 해당하는 369년으로 보아왔다. 그런데 명문의 칠지도를 만든 일자가 5월이 아닌 11월로 판독되고, 병오정양의 정양이 黃龍으로 밝혀지면서, 병오정양이 길상구가 아닌 실제의 간지일 가능성이 높아 졌다. 따라서 칠지도의 태화는 백제의 연호로 추정되고 만든 연대는 11월 16일 병오에 해당되는 408년으로 추정된다. 칠지도의 제적목적에 대해서는 칠지도의 왕세자를 408년 구이신의 탄생과 연관을 맺기고 하지만 아신왕이 왕위계승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어린 전지(7세전후로 추정)를 태자에 책봉한 점을 고려하면 408년 구이신의 태자 책봉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칠지도의 제작을 관할했던 관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비시기의 관서이지만 22부사에 보이는 內官의 刀部의 前身이 칠지도를 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통 도부를 北周의 관제와 비교하여 夏官武藏에 대비시킨다. 그런데 왕실과 관련된 內官의 도부는 일반 무기를 생산하는 부서로 보아서는 안된다. 칠지도나 환두대도와 같은 의장용 무기를 만드는 곳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칼을 만드는 부서는 하관 소속이 아니라 예부[춘관] 소속으로 보아야 한다. 󰡔수서󰡕에는 환두대도의 여러 종류를 禮儀 鹵簿에서 설명하고 있다.
    해씨 출신의 해수는 전지왕 3년(407) 내법좌평에 임명되는데 전지왕 4년(408)년에 만들어지는 칠지도의 총괄책임은 내법좌평 해수가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칠지도가 구이신과 관련된 칼이라면 구이신의 아버지인 전지왕은 물론 어머니인 팔수부인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구이신의 태자책봉을 칠지도 명문에 ‘百濟王世子寄生聖音’이라 하고 있는데, 구이신의 태자 책봉을 성음[붓다의 음성]과 연관시켜 부처의 加護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이제까지 전지왕대 불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지금까지 만들어진 바가 없는 칠지도에 ‘성음’을 새긴 것에서 전지왕대의 불교 및 해씨와 불교와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팔수부인의 출자가 해씨설이라는 점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팔수부인의 구체적인 행적을 추적했고 고대사에서 바다를 넘나 든 최초의 여성세계인으로 주목하였다. 팔수부인과 내법좌평의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는 아신왕의 불교적 분위기와 전지왕대 제작한 칠지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불교와 연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八須夫人에 대한 연구는 종래 도외시되었던 고대 여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생각된다. 수동적인 여성이 아니라 전지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임신을 하고 임신한 몸으로 백제로 건너와서 아들 구이신왕을 낳을 만큼 역정의 일생을 살아간 인물이다. 이후 백제 성왕의 딸인 매형공주의 사리봉안이나, 무왕의 왕비인 사택왕후의 미륵사 창건과 사리봉안에 대한 연구나, 신라의 선덕·진덕·진성에 대한 재평가에 촉매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사실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지만 여성은 역사 주체에서 배제된 느낌이 없지 않다. 유교가 추구하고자 하는 성인이나 불교에서 추구하는 붓다는 여성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교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불교에서도 여성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卽身成佛論이 있었다. 역사상에 나타나는 여성은 수동적인 입장이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역사를 재구성하면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사택왕후를 존칭의 의미인 卽身을 붙여 王后卽身이라 하고 있다. 왕후즉신은 ‘왕후께서는’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즉신이 존칭의 의미가 된 이유는 卽身成佛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즉신성불은 법화경 승만경 등의 교설로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성불론이다. 고대사에서 여성은 불교를 통해서 자신의 사상적·정치적 역할을 해 나갔던 것이다.
    내법좌평이 맡은 임무가 불교와 관련된다면 백제의 좌평제의 전개과정이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내법좌평의 임무가 구당서에서 말하는 ‘掌禮儀事’라고 했지만 실은 내법좌평이 설치될 때 주요 임무는 불교였고, 이후 맡은 일이 확대되어 禮儀에 관한 일까지 맡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6[5]좌평제의 실시시기도 사비기가 아니라 한성시기로 앞당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의 한성시기 불교는 침류왕과 아신왕대 1~2개 기사가 전부이다. 본 논문에서 다루는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대에는 불교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내법좌평이 불교와 관련된 좌평이며, 해씨의 사상적 기반이 불교라면 그 동안 묻혀 있었던 한성시기 백제 불교에 대해서 이해가 깊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한일관계에 대한 이해의 방향이다. 한일관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지금까지 한국학계에서 과소평가된 면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에 대한 倭의 영향력을 예전보다 강조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이는 새로운 한일관계사를 정립하는데 고무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팔수부인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뚜렷한 근거없이 왜와 연결시키는 문제는 신중해야 함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 색인어
  • 팔수부인, 내법좌평, 해수, 칠지도, 기생성음,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 진씨, 해씨, 왜계, 구이신왕, 왕척, 질자, 숭신불법구복, 태자, 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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