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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조선조 途上儺禮의 연행양상 및 공연사적 의의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0-332-G00006
선정년도 2010 년
연구기간 2 년 (2010년 05월 01일 ~ 2012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윤아영
연구수행기관 백석예술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현재까지 왕실의 연향에 대해서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다양하게 연구되어 왔다. 또한 조선조에 국가의례로 규정된 오례인 길례, 가례, 빈례, 흉례, 군례에 관해서도 다각도로 연구되어 그 성과가 혁혁한 상태이다. 특히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길례에 관해서는 종합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져서 가히 그 틈새가 없다고 할 만큼 총체적인 모습이 알려진 바 있다. 그런데, 이 길례 외에도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는 중국 및 일본과의 대외적인 관계도 중요하게 여겨졌던 만큼 빈례의 예도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예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비중 있는 빈례에 관해서는 그 간의 성과를 살펴보면 오히려 소략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소략하다고 할 만한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와 중국 및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보았을 때, 중국보다는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에 관한 연구가 더 진척을 이뤄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빈례 중 중국의 조사를 맞이하는 것은 그 예의 경중을 따져서 살피고, 맞이하는 의식 뿐 아니라, 이에 수반된 각종 樂에 관해서도 세심하게 따졌던 기록들이 있었던 만큼 매우 큰 행사였다. 특히 이 빈례 때에는 도상에서 산대, 결채, 나례 등을 베풀었던 기록들이 있고 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왔다. 그런데 이 도상나례라고 하는 것은 피상적으로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와 같이 여겨졌던 이유는 주로 빈례 중 중국 황제의 칙서를 들고 오는 조사 등을 맞이하기 위해 이와 같은 것들이 행해졌기 때문이고, 나례 중 궁정나례의 구나의식이 중국에서 기원한 것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 도상에서 행해졌던 나례라고 하는 것의 기원을 중국으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중국에서는 나례라고 하는 것이 계동나례에서 구나의식에 한정되어 사용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즉 이는 바꿔 말하면 도상나례라고 하는 것의 기원을 우리나라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도상나례의 기원을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것이라면, 이에 관한 내용을 밝혀야 할 것이고, 본 연구에서 이에 초점을 맞추어 문헌을 중심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또한 이 작업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빈례의 하나로서 행해진 이 도상나례의 각종 악가무의 연행형태로 고찰하여 조선 전기와 후기에 달라지게 되는 변화 양상도 살펴 공연문화의 흐름 속에서 궁중 도상악가무의 의의를 찾아보는 것이 본 연구의 또 하나의 목표이다.
  • 기대효과
  • 기존의 나례라고 하면 중국기원설이 정설로 여겨져왔다. 실제로 궁정내에서의 계동나례의 경우 중국의 나문화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합리적, 실질적으로 창작 변형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각종 궁중정재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밝혀진 바 있다. 그러나 도상에서 행해진 나례에 관해서는 그것도 역시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본 연구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서 소기의 성과가 나타난다면, 당연시되던 도상에서 행해진 나례의 중국기원설이 부정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기원설이 부정되고 난 후에는 한국 고유한 도상나례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려질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또 하나의 한국 공연문화의 정체성과 우수성 및 창작성이 높이 평가될 수 있는 기반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왕실의 빈례 중 도상나례에 관해서는 일정한 시기에 국한되거나, 궁정내의 의식과 공연 등에 집중된 바 있다. 간혹 통시적으로 이루어진 연구 중에서도 탈놀음 등의 공연과 관련된 시원을 찾는 측면의 성과들이 있었으나, 현재에 와서는 의식과 음악에 대한 공시적, 통시적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에서 다룰 조선시대 도상나례의 의식과 악가무에 관한 연구는 기존에 이미 고찰된 궁정나례 외에 도상나례의 연행 형태에 관해서 초점을 맞추게 되어 총체적인 나례의 모습에 더 접근할 수 있는 기대 효과가 예상된다. 또한 이 외에도 그간 연구성과가 축적된 각종 민속 예술의 기원과 관련하여 궁중에서의 빈례에서 행해졌던 악가무와의 관계도도 더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대적으로는 이미 대한 제국기의 외교적 연향의 변화 모습에 관한 연구도 도상 나례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 연결선상에서 그 변화양상의 총체적인 모습을 나타내 줄 수 있는 매개체를 찾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 나아가 이와 같이 도상 등에서 이루어진 나례의 총체적인 모습이 연구된 이후에는 이를 복원하는 작업에 고증역할도 가능할 것이고, 문화컨텐츠 개발에 유용한 자료로 활용 될 수도 있을 것이며, 궁정외부의 공연문화에 대한 학제간의 연구 활성화 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 연구요약
  •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나례라고 하는 것이 궁정과 도상에서의 큰 구분 없이 동일한 시각에서 연구된 바 있으며 궁정이나 도상의 구분 없이 나례는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단정되어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도상에서 행해졌던 나례는 그 기원이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닌, 고려말 조선초 한국의 궁정나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나례에서 행해졌던 각종 나희들이 도상에서도 행해지면서 나례라고 하는 용어가 확대 사용되게 된 것으로 추측되며 이처럼 나희에서 확대되어 나례라는 공연문화의 명칭을 창출하게 된 것은 중국과는 독립된 우리나라의 특수한 경우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도상에서 행해졌던 나례는 그것이 빈례시 중요한 환영행사였다. 산대, 결채 등의 여러 잡상과 무대 장치를 통해 그 규모를 자랑하면서 이와 함께 각종 궁정내에서는 연행될 수 없었던 공연들이 연출된 바 있다. 이와 같이 화려하게 연출되었던 도상에서의 공연문화는 궁정내에서 행해졌던 왕실의 정재들과는 달리 민속예술을 흡수한 것이었으며 이때를 통하여 왕실 주도의 공연에 민간 예술이 흡수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도상에서 이루어진 나례의 각종 공연들은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의 특징이 분명하게 대별된다. 조선 시대 전기에는 주로 각종 정재들이 공연되어서 궁정내에서 행해졌던 의식과 그에 수반된 가무악의 모습을 본따서 행해졌던 것이 많았던 반면, 후기에는 교방가요 등을 비롯해서 유관우, 별자우 등 좀 더 다채로우면서도 민간예술이 흡수되고 창작정식이 부가된 규모가 큰 종목들이 추가되게 된다. 이는 공연공간의 차이도 있을 것이나, 외부인에게 조선의 위엄을 알리기 위한 규모의 확대라는 측면과 볼 거리 위주의 공연 구성을 위한 당연한 결과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궁중예술과 민간예술이 함께 왕실주관 행사에 연행되게 되는 현상은 타 연회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나례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나례의 특수성은 상하 계층간의 문화 교류의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궁정나례에서 먼저 나타났으며, 이와 같은 현상이 더 확대 발전되게 되는 것이 바로 도상나례이다. 그런 점에서 지배층의 공연예술과 민간의 공연예술이 서로 만나게 되고 공연규모의 확대와 우리나라 고유한 공연양식의 발달에 영향을 준 것이 바로 도상나례의 공연사적 의의일 것으로 보고 있다.
  • 한글키워드
  • 계층,교방가요,악가무,영조의,빈례,도상나례,나례,중국기원설,나희,왕실,공연사,문화교류,결채,민간예술,궁정나례,정재,산대
  • 영문키워드
  • China oriented,class,Gyulchae,Sandae(mountain-shaped stage set),Jeongjae,Youngjoui,Royal welcome greeting ceremony,ceremony,Narye on the road,Narye,Kyobang Gayo,Narye in the court,folk arts,music and dance,Culture exchange,Performance history,Royal class,Nahi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차년도: 영접의식(迎接儀式)으로서 행했던 나례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서 요구했던 ‘번국영조의(藩國迎詔儀)’의 양식대로 행한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독특한 것이다. 이는 고려말 태조의 위화도 회군이후 태조를 위해 결채(結綵), 채붕(綵棚) 등을 설치하고, 음악을 연주(演奏)하였으며, 거기에 잡희(雜戱)를 곁들이기 시작한 것과 관련된 것이다. 이후로는 중국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오는 사신(史臣)을 맞이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형식으로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잡희에 해당하는 나희(儺戱)를 연출하는 것이 정식이 되었다. 이후로 같은 의식에서 점차 나희(儺戱)라는 용어대신에 나례(儺禮)라고 하는 좀 더 양식화된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정례로 정착되었다. 즉, 조선조이후 영접의식 중 하나였던 나례(儺禮)는 여말 선초에 영조의의 시작을 알리는 절차로 첨입되어 우리나라의 독특한 손님 맞이 의식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영조의시 행해진 나례는 중국에서는 도상(途上)에서 사용된 바 없어서, 일단 그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차별성이 있다. 비록 중국의 원소(元宵) 등에서도 채붕과 가무백희 등은 있었으나, 이것이 우리나라의 연등회 팔관회와는 유관 할 수 있을 지언정, 영조의시 나례의 첨입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만 시행됐던 이 독특한 영조의시 나례는 중국에서 연원했다기 보다는 이미 신라시대 및 고려시대의 유풍으로서 조선조 영조의에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도상에서 영접의식의 하나로서 행해졌던 나례(儺禮)의 성격에 관해서는 이를 흉(凶)한 것, 즉 벽사(辟邪)적인 것으로 여겨서 해석된 바도 있으나 이는 옳은 해석이 아니다. 도상에서 영조의시 행해졌던 나례의 성격은 ‘길(吉)’한 것으로 의전적(儀典的)인 성격 외에도 경사적(慶事的)인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상(途上)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에 이처럼 채붕(綵棚)과 잡희(雜戱), 즉 나례(儺禮)를 행한 것은 신라시대 유풍이 고려시대의 팔관회 및 설화산대희(設火山臺戱) 등에 이어졌던 것이고, 이것이 조선시대에는 궁정 나례 뿐 아니라, 도상에서 행해졌던 각종 잡희 등에도 영향을 주어, 나희, 혹은 나례로 지칭하면서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나례는 고려말 조선초에 도상에서 영접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서 첨입되었으나 이는 기존에 우리나라에 존재하였던 독특한 전통이 반영된 것이었다. 비록 중국이 지정한 영조의 절차와는 달라서 폐지 논란이 있기는 하였으나, 당시에도 우리나라 독특한 것, 독창적인 것으로 인정되어, 폐지되지 않고 조선 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2차년도: 영접의식에서 연행되었던 나례라고 하는 것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기존의 궁정 장악기관 등에서는 다룰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영조의(迎詔儀)시 창우(倡優)들에 의해서 연행되었던 나례는 우리나라 고유한 전통으로서 손님맞이 의식의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만큼 그 연원이 오래된 것이다.
    이 나례를 준비하는 기관은 조선 후기에 나례청(儺禮廳) 혹은 나례도감(儺禮都監)이라는 이름으로 전문화 되어 나타난다. 나례가 우리나라 고유한 전통으로서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연등회 등의 잡희에서 유래한 것처럼 나례청의 기원도 산대색(山臺色)까지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산대색은 고려시대에 연등도감(燃燈都監)에 편입되었고, 이 연등도감도 이후 충렬왕때 폐지되면서 나례 전문 준비 기관이 존속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상설 기구인 사평순위부(司平巡衛府)와 군기시(軍器寺)가 영접의식 등이 있을 시에는 임시로 도상나례를 담당하여 그 맥을 이어왔다.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두 기관씩 이 전통을 이어받아왔는데, 의금부와 군기시가 그것이었다. 역시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이 임시 기구의 정식 명칭은 명명되지 않았으나, 세종 8년 내재적으로는 좌우(左右)의 대표되는 개념은 갖추기 시작하였고, 조선 후기 광해군때에 비로소 나례청(儺禮廳)이라고 하는 이름하에 임시기구가 등장하였으며 이것은 나례도감(儺禮都監)으로도 혼용되어 불리 웠다.
    나례청(나례도감)의 구성은 좌변(左邊)과 우변(右邊), 즉 두 부서로 나뉘어 나례의 준비를 하였는데, 이는 매우 독특한 공연 준비 양상이다. 보통 한 행사의 준비를 위해서는 하나의 수장(首長)이 감독하고, 이를 중심으로 한 명령체계 하에 일이 진행되는 것과는 이례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 두 변(邊) 사이의 관계는 서로 경쟁 관계이기도 하면서, 공조하는 관계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나례를 준비할 때에만 양변(兩邊)으로 나뉘어 준비하는 제도는 󰡔조선사략󰡕 등의 기록에 의해 신라시대의 유풍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대(山臺), 결채(結綵), 창우희(倡優戱) 같은 것들이 동아시아의 공통된 연행양상이고, 우리나라의 산대 등도 중국과 관련되어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처럼 양변(兩邊)으로 나뉘어 잡희를 행하는 나례의 연행 양상은 중국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통이다. 따라서 이 양변의 제도 역시 우리나라의 고유한 나례 전통 중의 하나로 간주 될 수 있을 것이다.

  • 영문
  • 1차년도: According to the Chinese literature, Dosang Narye or Baekheejapgi was performed at Palgwanhwe* during the Shilla Dynasty. But there are very few subsequent records on Palgwanhwe. But it is known that Seolhwasandaehee* and Gwangdaehee* performed during Yeondeunghwe* were continued and absorbed as part of Goongjeong Narye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first record on Dosang Narye is a ceremony welcoming the first king of the early Joseon Dynasy, Lee Seong Gye where Chaeboong* and Japhee conducted at Youngjoeui were performed. Ever since, Japhee began to be called Nahee. Given that Dosang Bakheejapgi was called Nahee and later Narye while such terms were not found in China, there is a strong possibility that it was affected by Korea's unique Goongjeong Narye.
    Dosang Narye was considered inseparable from Chaeboong during the Joseon Dynasty. Meanwhile, these terms were not found in the Chinese literature on Youngjoeui. Although they are similar to the performance conducted on Wonsojeol or Chinese spring festival, the latter was not developed into the court ceremony and far from Youngjoeui.
    It was once suggested that Dosang Narye performed at the beginning of a guest welcoming ceremony had the features of exorcism seeking to eliminate evil spirits that might have accompanied envoys. But it turned out that Dosang Narye had festival and entertaining characteristics rather than exorcising ones.
    It is Korean unique tradition to perform Chaeboong and Japhee (i.e Narye) at guest welcoming ceremony. The tradition conducted at Palgwanhwe during the Shilla Dynasty continued into Goryeo Dynasty as part of Yeondeunghwe and Seolhwasandaehee and into Joseon Dynasty as part of Goongjeong Narye. There is strong possibility that Japhee or Nahee performed at Goongjeong Narye was expanded in its meaning to be adopted at Youngjoeui. In short, Dosang Baekheejaphee was expanded in its meaning to be called as Nahee and Nary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For Dosang Narye that is unique Korean tradition different from Chinese Youngjoeui in its process, there was an argument for its elimination and a relevant memorial was presented to the ki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But it was defined as something that should not be abolished and maintained until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2차년도: Narye can not be prepared by Court music organization because of its unique characteristic which performed by clowns. Especially, Narye performed by clowns as a circus was considered as the authentic tradition and the welcoming ceremony of our nation, and its origination has a long history.
    The organization for this Narye became specialized and just got the name of Naryechung or Naryedogam in late Joseon dynasty. Although these names were appeared in late Chosun dynasty, the organization for Narye had already existed before that period.
    As Narye was originated from Japhui of Yeundeunghui in Goryo dynasty, which stemmed from Shilla dynasty, the origination of Naryechung also came from Sandaesaek in Goryo dynasty. Because there is few records about Sandaesaek, the details about the time and the structure etc. of that are unknown. And this Sandaesaek was incorporated into Yeondeungdogam in the late Goryo dynasty, and after that Yeondeungdogam was abolished in king Choongryul also in Goryo dynasty. So, the professional preparation association for Narye could not last until Joseon dynasty begins. This phenomenon caused from not only the abolishment of Palgwanhui and Yeondeunghui with the begining of Joseon dynasty because of the atmosphere of Sung Confucianism, but various Jabhui's the only attachment to the Yeondeunghui. These appearances result to the abolishment of Jabhui in Goryo dynasty.
    Even though Sandaesaek or Yeondeungdogam couldn't be lasted and get the status as a professional association for Narye/Jabhui, Sapyungsoonwiboo and Goonkisi had played the role in combination temporarily for the necessity of Narye for welcoming ceremony. The reason for being existence of two association just for the one performance must be the need of two organization for two sided stages around Sandae.
    This tradition of two united organizations for Narye has continued in Joseon dynasty, one party is Uigeumboo and the other is Goonkisi. In early Joseon dynasty, there is no name for these two parties that prepare for the Narye as a welcoming ceremony, but by the time of king Sejong period these two parties had become the concept that represent the left and the right part of welcoming ceremony. These no name parties finally became to the names of Naryechung as the temporal organization in king Gwanghaegoon in late Joseon dynasty. This Naryechung also called Naryedogam at the same time and it was also a temporal organization such as those(Uigeumboo and Goonkis)i in early Joseon dynasty.
    Naryechung was composed with the two parties; Jawbyun(left side) and Woobyun(right side), and these two parties' tradition was a very unique appearance of preparation for events. Usually, to arrange for one event, there is only one head and the following hierarchy system, but these two parties of preparation system was extraordinary. According to the text book {Naryechung Deungrok} or {the True record of the Chosŏn dynasty}, these two sided parties are a competition and also a mutual assistance system.
    According to the text book {Joseon Saryak}, this system preparing Narye for the welcoming ceremony seemed to be the tradition stemmed from the Shilla dynasty. Although Sandae, Gyulchae and Narye are common features in east Asia, and Sandaes in Goryo and Joseon dynasty are also related in those in China, Narye performed consisted of two sided stages and operation in welcoming ceremony didn't originated from China. Therefore this two sided system for welcoming ceremony can be regarded as one of the our nation's long historical tradition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차년도결과: 영접의식(迎接儀式)으로서 행했던 나례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서 번국(藩國)에 요구했던 ‘번국영조의(藩國迎詔儀)’의 양식대로 행한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독특한 것이다. 고려말 태조의 위화도 회군이후 태조를 위해 결채(結綵), 채붕(綵棚) 등을 설치하고, 음악을 연주(演奏)하였으며, 거기에 더하여 잡희(雜戱)를 곁들이기 시작한 것과 관련된 것이다. 이후로는 중국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오는 영조사(迎詔使)를 맞이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형식으로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잡희에 해당하는 나희(儺戱)를 연출하는 것이 정식이 되었다. 이후로 같은 의식에서 점차 나희(儺戱)라는 용어대신에 나례(儺禮)라고 하는 좀 더 양식화된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정례로 정착되었고 그 의미도 확대되었다. 즉, 조선조 이후 영접의식 중 하나였던 나례(儺禮)는 여말 선초에 영조의(迎詔儀)의 시작을 알리는 절차로 첨입되어 우리나라의 독특한 정식 손님맞이 의식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만 시행됐던 이 독특한 영조의시 나례는 중국에서 연원했다기 보다는 이미 신라시대 및 고려시대의 유풍으로서 조선조 영조의(迎詔儀)에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도상에서 영접의식의 하나로서 행해졌던 나례(儺禮)의 성격에 관해서는 이를 흉(凶)한 것, 즉 벽사적(辟邪的)인 것으로 해석된 바도 있으나 이는 옳은 해석이 아니다. 조선왕조사에서는 도상(途上)에서 행해졌던 나례를 벽사적인 성격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즉, 영조의시 도상에서 행했던 나례(儺禮)는 앞서 밝힌 바와 마찬가지로 잡희(雜戱), 혹은 백희잡기(百戱雜技)를 가리키는 말로서, 의전적(儀典的) 성격 외에 경사적(慶事的)인 성격의 것임은 분명하다.
    도상(途上)에서 손님 맞이할 때에 이처럼 채붕(綵棚)과 잡희(雜戱), 즉 나례(儺禮)를 행한 것은 이미 신라시대 유풍이 고려시대의 팔관회(八關會) 및 설화산대희(設火山臺戱) 등에 이어졌던 것이고, 이것이 조선시대에는 궁정 나례 뿐 아니라, 도상에서 행해졌던 각종 잡희 등에도 영향을 주어, 나희, 혹은 나례로 지칭하면서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나례는 고려말 조선초에 도상에서 영접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서 첨입되었으나 이미 우리나라에 존재하였던 고유한 전통이 반영된 것이었다. 비록 중국이 지정한 번국영조의 절차와는 달라서 폐지 논란이 있기는 하였으나, 당시에도 우리나라 독특한 것, 독창적인 것으로 인정되어, 폐지되지 않고 조선 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2차년도 결과: 이 나례를 준비하는 기관은 조선 후기에 나례청(儺禮廳) 혹은 나례도감(儺禮都監)이라는 이름으로 전문화 되어 나타난다. 비록 후기에 이와 같은 명칭의 기관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이와 같이 나례(잡희)를 담당했던 공연 준비 기관이 존재하였다.
    나례가 우리나라 고유한 전통으로서 신라시대의 유풍으로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연등회 등의 잡희에서 유래한 것처럼 나례청의 기원도 고려시대 문헌에 전하는 산대색(山臺色)까지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고려말에 이 산대색은 연등도감(燃燈都監)에 편입되었고, 이후 이 연등도감(燃燈都監)도 충렬왕때 폐지되면서 나례 전문 준비 기관이 존속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전문 기관으로서의 지속성과 명칭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영접의식을 행할때에는 반드시 이 나례가 병연되어야 했기에 고려시대에도 상설 기구인 사평순위부(司平巡衛府)와 군기시가 임시로 연합하여 도상나례를 담당하여 그 맥을 이어왔다.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두 기관씩 이 전통을 이어받아왔는데, 의금부(義禁府)와 군기시가 그것이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이 두 기관이 임시로 구성을 이룬 나례준비 기구를 위한 명칭은 명명되지 않았으나, 세종 8년 내재적으로는 좌우(左右)의 대표되는 개념은 갖추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 광해군때에야 비로소 나례청(儺禮廳)이라고 하는 임시기구로서의 전문 공연 준비 기관의 명칭이 등장하였고, 이것은 나례도감(儺禮都監)으로도 혼용되어 불리웠다.
    나례청(나례도감)의 구성은 좌변(左邊)과 우변(右邊), 두 부서로 나뉘어 나례의 준비를 하였는데, 이는 매우 독특한 공연 준비 양상이다. 󰡔나례청등록󰡕이나 각종 실록 등의 기록에 의해 이 두 변(邊) 사이의 관계는 서로 경쟁 관계이기도 하면서, 공조하는 관계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나례를 준비할 때에 양변(兩邊)으로 나뉘어 준비하는 제도는 󰡔조선사략󰡕 등의 기록에 의해 신라시대의 유풍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양변(兩邊)으로 나뉘어 잡희를 행하는 나례의 연행 양상은 중국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변의 제도 역시 우리나라의 고유한 나례 중의 하나로 간주 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1차년도
    지금까지 왕실의 빈례 중 도상나례에 관해서는 일정한 시기에 국한되거나, 궁정내의 의식과 공연 등에 집중된 바 있다. 간혹 통시적으로 이루어진 연구 중에서도 탈놀음 등의 공연과 관련된 시원을 찾는 측면의 성과들이 있었으나, 현재에 와서는 의식과 음악에 대한 공시적, 통시적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조선시대에 도상에서 행해졌던 나례는 그것이 빈례시 중요한 환영행사였다. 산대, 결채 등의 여러 잡상과 무대 장치를 통해 그 규모를 자랑하면서 이와 함께 각종 궁정내에서는 연행될 수 없었던 공연들이 연출된 바 있다. 이와 같이 화려하게 연출되었던 도상에서의 공연문화는 궁정내에서 행해졌던 왕실의 정재들과는 달리 민속예술을 흡수한 것이었으며 이때를 통하여 왕실 주도의 공연에 민간 예술이 흡수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에서 다뤘던 조선시대 도상나례의 의식과 악가무에 관한 연구는 기존에 이미 고찰된 궁정나례 외에 도상나례의 연행 형태에 관해서 초점을 맞추게 되어 총체적인 나례의 모습에 더 접근할 수 있는 기대 효과가 예상된다. 또한 이 외에도 그간 연구성과가 축적된 각종 민속 예술의 기원과 관련하여 궁중에서의 빈례에서 행해졌던 악가무와의 관계도도 더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대적으로는 이미 대한 제국기의 외교적 연향의 변화 모습에 관한 연구도 도상 나례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 연결선상에서 그 변화양상의 총체적인 모습을 나타내 줄 수 있는 매개체를 찾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 나아가 이와 같이 도상 등에서 이루어진 나례의 총체적인 모습이 연구된 이후에는 이를 복원하는 작업에 고증역할도 가능할 것이고, 문화컨텐츠 개발에 유용한 자료로 활용 될 수도 있을 것이며, 궁정외부의 공연문화에 대한 학제간의 연구 활성화 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1차년도 연구 성과는 우리나라의 영접의식으로서 도상에서 행했던 광대 잡희 등의 나례가 우리나라 고유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외교적 영접의식의 의전행사로서 이 고유한 전통을 되살려 내어 나례를 복원하는 전통을 재창조할 수 있을 근거가 될 것으로 본다.


    2) 2차년도
    2차년도 연구 결과물의 성과는 전문 나례 준비 기관의 오래된 전통과 두 대로 나뉘어 경연하듯이 연출했던 신라부터 내려온 유풍의 발견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역시 1차년도 연구의 활용과 일맥상통하며, 현대 우리나라 영접의식을 뿌리 깊은 전통으로 재 구성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현대 대한민국의 영접의식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이에 대한 연구 기관의 설립 및 이의 연구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이를 바탕으로 나례도감과 같은 기구를 세워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국위 선양 및 고급 문화의 재생산 및 확대라고 하는 부수적인 결과물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 색인어
  • 도상 나례, 산대색, 의금부, 군기시, 잡희, 영접의식, 나례청, 나례도감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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