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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조선후기 大芚寺 현창 운동과 그 의미
The Significance of the Glorifying Movement of Daedun Temple in the Late Joseon Dynast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우수논문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2S1A5A2A02019692
선정년도 2012 년
연구기간 1 년 (2012년 05월 01일 ~ 2013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이종수
연구수행기관 동국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조선후기 불교계의 자생적인 활동 양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지역은 호남지역이다. 17세기 이후 호남지역에 다수의 고승들이 출현하면서 새로운 분위기를 주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찰은 송광사와 대둔사(지금의 대흥사)다. 송광사와 대흥사는 서로 다른 문파가 정착한 대표적인 사찰로 송광사는 부휴선수(1543~1615)의 문파가 정착하였고 대흥사는 서산휴정(1520~1604)의 문파가 정착하였다. 송광사의 부휴선수 문파는 17세기 말 백암성총(1631~1700)을 중심으로 많은 불전들을 간행하면서 불교계를 주도하였고, 18세기 말 묵암최눌(1718~1790)이 등장하여 다시 송광사를 중창하였다. 대흥사 역시 편양언기의 제자 풍담의심(1592~1665)으로부터 월저도안(1638~1715) → 환성지안(1664~1729) → 호암체정(1687~1748) → 연담유일(1720~1799)로 이어지는 법맥이 형성되면서 18세기에는 송광사에 필적할 만한 寺格을 갖추었다.
    대흥사는 18세기 후반 송광사의 묵암최눌이 고려시대 보조지눌의 유풍을 강조하며 송광사를 중창하던 즈음에 새로운 중흥을 위해 서산대사비와 표충사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송광사의 묵암최눌과 대흥사의 연담유일이 心性論爭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는 송광사에 대한 대흥사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자신감에 기반하여 대흥사는 서산대사비와 표충사를 건립하였고 19세기 초에는 <대둔사지>를 편찬하여 서산대사의 宗統을 계승한 宗院이라고 자부하면서 禪과 敎의 本山이 되고자 하였고, 결국 대흥사의 12宗師와 12講師를 탄생시켰다.
    종사와 강사가 있는 本山으로 자부하던 대흥사는 불교 사상계를 주도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19세기 초에 대흥사에 주석하였던 초의의순(1786~1866)이 백양사의 백파긍선(1767~1852)과 禪논쟁을 벌였던 데에서 잘 드러난다. 그 논쟁의 주제는 20세기 초까지 불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슈가 되기도 했다. 백파긍선을 지지하는 문인들과 초의의순을 지지하는 문인들 사이에 지속된 이 논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불교계 안팎으로부터 주목을 받았으며, 추사 김정희가 선논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불교학 뿐만 아니라 儒學과 역사학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야말로 18세기 심성논쟁과 19세기 선논쟁의 중심지였던 대흥사는 조선후기 호남지역에서 가장 역동적인 사찰이었다.
    그런데 대흥사가 18세기 이후 호남 지역의 중심사찰이 되고 표충사를 건립하였던 것은 대흥사 현창 운동의 과정에 발생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 과정에서 벌어진 몇 가지 사건은 조작되었을 혐의가 짙다. 즉 18세기 후반 서산대사비를 건립하면서 張維의 비문을 조작하였을 가능성과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寶藏錄」 역시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그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당시 대흥사를 중흥하려던 사람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대흥사 현창의 불교사적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조선후기 호남 불교계의 동향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첫 번째 의의가 있다. 서산대사비문과 보장록의 조작을 단순 증명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이 인근에 있는 사찰과의 경쟁의식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추론은 조선후기 불교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문파 간의 경쟁의식, 또는 사찰 간의 경쟁의식이 당시 호남 지역 불교계의 발전 원동력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의의는 대흥사에 있는 표충사의 성립에 대해 지역 불교사적인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동안 대흥사의 표충사는 1743년에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사가 밀양에 건립되자 사명대사의 스승인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표충사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으로 건립되었을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러한 인식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긴 하지만, 왜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대흥사에 표충사가 건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였는데, 본 연구를 통해 대흥사에 표충사가 건립된 이유를 지역 불교사적인 측면에서 보다 분명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 의의는 <대둔사지> 편찬의 의도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19세기 초 <대둔사지> 편찬자들은 단순히 대흥사와 관련된 문헌을 편찬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흥사의 宗統을 강조하여 현창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18세기 말 戒洪이 조작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보장록」의 眞僞를 의심하면서도 서산대사의 遺意가 대흥사에 전해졌다는 내용은 그대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주요한 연구 의의를 통해 18~19세기 대흥사의 문파, 역사적 전통, 표충사 등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본 연구가 계기가 되어 조선후기 남부지역 사찰 사이의 관계 및 문파의 교류 등에 대해서도 연구가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 연구요약
  • 18세기 말 대흥사 현창 운동은 戒洪의 주도로 서산대사비를 재건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계홍은 1777년에 서산대사비가 파손되었다는 점을 들어 여러 곳에 모연문을 돌려 새롭게 서산대사비를 세웠다. 그 서산대사비는 17세기 초 유명한 문필가였던 張維가 쓴 것인데 그 글 가운데 일부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장유의 문집인 <계곡선생문집>에는 서산대사가 ‘해인사’에 머문 적이 있다고 했는데 대흥사에 있는 비문에서는 그 ‘해인사’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大興寺’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곡선생문집>이 먼저 간행되었고 18세기까지 대둔사를 대흥사로 지칭한 예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흥사 서산대사비문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약 대흥사 서산대사비문이 조작되었다면 누가 왜 그랬을까? 역시 서산대사비를 재건하는 주역이었던 계홍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계홍이 서산대사와 대흥사의 인연을 강조하고자 하는 뜻에서 비문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은 계홍이 1786년에 민가에서 떠돌던 「寶藏錄」을 발견하였다고 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보장록」에서는 서산대사가 입적하기 직전에 사명 유정과 중관 해안 등 제자들에게 遺意를 전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대둔사의 三節을 이야기하면서 宗統이 돌아갈 곳이라 하고 자신의 衣鉢을 대둔사에 전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明照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보장록」의 내용은 1810년대에 간행된 <대둔사지>에서 조차 오류가 많다고 비판되었고, 그 내용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 이 「보장록」의 내용이 1788년에 표충사의 건립을 요청하는 「上言單子」에도 포함되어 표충사 공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보장록」의 조작 여부와 상관 없이 그로 인해 대흥사에 표충사가 공인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계홍이 의도한 것은 대흥사의 현창이었다고 생각된다.
    대흥사 현창 운동은 19세기 초 <대둔사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더욱 활발해졌다. <대둔사지> 편찬자들은 「보장록」에 오류가 많다고 하면서도 서산대사가 강조했다고 하는 三節과 의발의 전수에 대해서는 사실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서산대사의 충의를 기리는 표충사가 있는 곳으로서 宗院을 표방하였다. 당시 대흥사 승려들은 대흥사의 위상을 새롭게 확립할 필요성을 자각하였던 것 같다. 청허계를 대표함은 물론이고 전체 불교계의 본산이 되고자 하는 염원에서 宗院을 내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 이유로는 경쟁 관계에 있던 부휴계의 송광사가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로 인식되고 있었던 데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대흥사와 송광사의 경쟁의식으로서의 갈등은 18세기 후반 대흥사의 연담 유일과 송광사의 묵암 최눌이 심성 논쟁을 벌이면서 촉발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존심을 건 두 강백의 논쟁은 결국 두 사람의 심성 논쟁을 담은 <심성론>이 소각되는 것으로 끝나지만 대흥사와 송광사의 경쟁의식은 여전히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불보․법보․승보의 삼보사찰이라는 관념이 확산되면서 송광사가 승보사찰로 인식되자 경쟁 관계에 있던 대흥사는 <대둔사지>를 간행하면서 宗院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대둔사지>에서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수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12종사와 12강사의 계보를 확립함으로써 禪敎의 宗院임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흥사 현창 운동 과정에서 몇 가지 문헌이 조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18세기 후반 이후 대흥사는 전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사찰이 되었다. 이미 청허계 가운데 편양문파와 소요문파가 정착하여 많은 훌륭한 선사와 강백이 배출되었고, 더구나 서산대사의 충의를 기리는 표충사가 공인되면서 그 현창 운동은 더욱더 공감을 얻었던 것 같다. 그리고 󰡔대둔사지󰡕에서 팔도 사찰을 대표하는 宗院으로서 자신감을 표출하였던 것 같다. 이것은 당시 대흥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18세기 이후 불교계의 중심 활동 지역이 전라도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키워드
  • 계홍,종통,종원,승보사찰,보장록,대흥사,대둔사지,대둔사
  • 영문키워드
  • Bojangrok,the sangha jewel temple,the orthodoxy of the sect,the orthodox monastery,Gyehong,Daeheung Temple,Daedunsaji,Daedun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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