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효자와 열녀를 장려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정책적으로 효자와 열녀에 대한 포상을 실시하였고, 이를 위해 매년 마다 효자와 열녀를 조사하여 예조에 보고하게 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이들에 대해 정문(旌門), 복호(復戶), 상직(賞職), 상물(賞物) 등을 통하여 효자와 ...
조선시대에는 효자와 열녀를 장려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정책적으로 효자와 열녀에 대한 포상을 실시하였고, 이를 위해 매년 마다 효자와 열녀를 조사하여 예조에 보고하게 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이들에 대해 정문(旌門), 복호(復戶), 상직(賞職), 상물(賞物) 등을 통하여 효자와 열녀에 대한 사회적 보상을 시행하는 정책을 수립함으로써 유교적 덕목의 확산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한 가문에서 효자와 열녀를 배출한다는 것은 단지 모범 되는 윤리적 행동을 한다는 도덕적 의미 이외에 사회적, 경제적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효자와 열녀의 수를 크게 증가시키게 되었고, 효자와 열녀는 그 도덕적 행위보다 그에 따른 보상에 더 주목하게 되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
따라서 효자와 열녀에 대한 열망 현상도 단지 효도를 행하고, 절의를 지켰다는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과 조건, 어떤 동기에서 효자와 열녀가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효자와 열녀에 대한 시각은 효자는 백행에 근본이 되는 효를 행한 것으로 장려되고 열녀는 배우자를 위해 의리를 지킨 사람으로 간주되었던 측면이 있었다.
지금까지 효자와 열녀에 대한 선행 연구를 개략적으로 검토한 결과 다양한 시각과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효자와 열녀를 열망하는 개인과 가문의 노력에 내재하고 있는 욕구를 다양하게 분석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시대 효자와 열녀를 탄생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작성된 고문서 자료를 활용하여 효자․열녀 열망 현상에 나탄 인간의 욕구를 욕구체계이론을 통해서 다양하게 분석해보았다.
효열관련 고문서를 살펴본 결과 가문의 효열 관련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서에는 효열내용을 개인이나 집단이 청원하는 所志, 上書, 等狀 등이 있고, 청원된 내용을 상급관청으로 보고하는 牒呈, 書目 그리고 효열청원을 포상하여 하급 관청으로 통보하는 關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문서는 조사된 자료 가운데 上書, 所志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효열을 청원하는 주체는 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었으며, 청원은 현감, 군수, 관찰사, 암행어사, 예조 등 다양한 대상에 할 수 있었다. 문서 작성 시기는 조사과정에서 발견된 대다수의 효열관련 문서들은 19세기 문서들이 대부분이고 18세기 후반 문서들도 일부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효열 포상 정책은 조선중기를 지나 후기까지 지속되었는데 17세기 이후나타난 효열 포상의 증가는 효열 그 자체의 증가라기보다는 각 가문의 문벌의식의 고양으로 선조 가운데 충신, 효열 등의 인물의 포상을 통해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욕구의 증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향으로 숙종조에는 정문과 정려가 많아지고 정려된 충신열사 대다수가 성원이나 사우에 배향된 인물이었다.
본 연구에서 조사된 집안의 효행청원 문서들을 검토할 때 대부분의 문서들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작성된 문서들이고, 20세기 초반에 작성된 문서들도 발견되었다.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19세기에 각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효열청원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것은 조선후기 신분제의 변화와 사회적 지위 확보라는 사회적 현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효열청원을 위한 시간은 10년 내외로 짧은 경우도 있지만, 긴 경우에는 100년 이상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진태의 효행포상 청원은 1791년에 시작되어, 1875년에 올린 上書까지 80년 정도 시간이 걸렸고, 실제 효자정려는 1891년에 결정되었과 1892년에 건립되어 처음 효자청원에서 효자정려결정까지 100년이 소요되었다.
산청의 남명 조식의 후손 조천필·조양필 형제의 효행 포상 청원은 1788년부터 집중적으로 이루어져서 1789년에 이들 형제에게 증직을 내려졌다. 산청의 최광삼 집안의 경우 1824년 효자청원을 시작으로 1850년 까지 청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26년간 계속해서 때로는 1년에 몇 차례 청원이 이루어졌고, 때로는 매년마다 효자청원을 시도하고 있었다.
고성의 박치상 부부의 효행청원 과정은 1866년 等狀을 시작으로 1906년 훈령으로 박치상 부부의 정려 시행을 지원하라는 문서까지 약 40년간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창의 진양정씨 효행 청원은 정태정과 두 아들의 효행에 대한 포상을 청원하는 내용인데, 1827년 上書에서부터 1898년까지 계속 포상청원 所志를 올리고 있다. 따라서 포상청원은 약 70년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합천 초계의 전주전씨 가문에서는 2건의 포상을 하고 있는데, 하나는 전명항의 효행에 대한 포상청원이고, 다른 하나는 전치원과 그의 아들 전우, 그의 손자 전영의 3대에 걸친 학행과 전치원, 전우, 전제 3대에 걸친 충절에 대한 포상을 청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서를 통해서 볼 때 먼저 전치원의 5대손인 전명항의 효행에 대한 포상을 10년 정도 신청한 후에 다시 10년 정도 시간이 지나서 이번에는 전명항의 조상들에 대한 학행과 충절에 대한 포상 청원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이들 조상에 대한 공이 인정되어 관직에 제수된 인물인데, 후손들이 효행으로 포상을 청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효행이 당대의 실적뿐만 아니라 몇 대 이전의 조상들의 효행에 대해서까지 청원을 할 정도로 가문의 지위를 고양시키는 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합천지역 박민영 집안의 효행 포상 청원문서에는 박민영과 처, 형수까지 합쳐서 三孝로 포상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 포상청원 문서는 1820년 所志와 上書를 군수, 관찰사에게 올렸고, 이후 1854년까지 지속적으로 청원을 요청하고 있다. 따라서 34년간 약 40건의 청원문서를 올릴 정도로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함안군의 金世漢의 효행 포상 청원은 1774년 칠원현감에게 올린 上書에서부터 1831년까지 관찰사에게 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대략 60년간 청원하고 있었다. 이 집안의 경우 1801년 所志에서 효자집안으로 인정되어 잡역을 면제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한 일로 所志를 올리고 있는데, 이 집안에서는 더욱 확실한 효행 포상을 위해 정려건립을 청원하는 문서를 올려서 드디어 1832년에 金世漢의 효행 정려를 건립하기 위한 請助文을 각동, 각 문중에 보내게 됨으로써 정려건립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문서에 나타난 효행포상 청원 유형을 살펴보면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한 개인의 효행에 대한 포상을 청원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하진태(河鎭兌)는 창주 하징의 6대손인데, 하진태의 효행에 대한 보고는 1791년에 단동촌 동장에 의해서 사죽 집강에게 보고되었다. 그러나 하진태의 효자정려는 1891년에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정려는 1892년에 건립되었다. 따라서 그의 효행이 처음 보고된 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에 효자정려가 내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은 한편 한 사람의 효행이 아니라 형제의 효행을 청원하는 경우이다. 산청에 거주했던 남명 조식의 5세손 조천필, 조양필 형제의 효행 사실에 대해 포상을 청원하는 문서에 의하면 이들 형제의 효행은 1788년, 1789년에 집중적으로 청원되었고, 청원하는 대상은 진주목사, 관찰사, 비변사였다. 1789년 이들 형제에게 증직을 명하는 전령과 효자 조천필에게 교지를 내리는 書目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세 번째 유형은 부부의 효행에 대해 청원하는 경우이다. 고성 박치상 부부의 효행포상청원 문서는 1866년 최필욱이 면중에 올린 等狀을 시작으로 해서 1867년 면수 최필욱과 집강 최상인 올린 정장과 上書, 유장 등이 있고, 이 청원에 대한 답변으로 1906년 훈령으로 박치상 부부의 정려 시행을 준비하라는 문서가 있다. 박치상 부부의 효행 정려를 위한 청원은 면중, 고성현감, 암행어사, 예식원 장례경에 이르기까지 청원되었고, 이 청원에 따라 1906년 관찰사에 의해서 정려시행을 준비하라는 문서가 하달되었다.
그리고 고성에 거주했던 정창진 부부의 효행 포상 청원도 부부의 효행청원 문서에 속한다. 정창진 부부의 효행 청원 문서는 1884년에 처음 서면 집강에 의해서 고성현감에게 보고되었다. 그리고 1891년에서 1893년까지 권유열, 이용 등 지역 인사들에 의해 관찰사와 예조에 上書가 청원되었다. 이에 대한 답변은 1894년 예조에서 관찰사에게 정려를 세우는데 필요한 자재를 지급하라는 관을 통해서 효행에 대한 정려가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창진 부부에 대한 효행 정려는 다른 집안의 사례와 비교할 때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유형은 조상과 후손의 효행과 충절, 학행을 포함해서 가문의 지위를 상승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는데, 합천 초계 전주 전씨 가문의 효행 문서는 1782년에 와서 전일증이 관찰사와 암행어사에게 全致遠, 全雨, 全霽의 충과 全雨, 全榮의 학행에 대해 포상을 청원하는 上書를 올렸다. 이 포상 청원 역시 1851년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볼 때 포상 청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문에서는 2건의 포상청원을 시도되었는데, 먼저 시도된 것은 전명항의 효행이었고 이후에 다시 전치원, 전우, 전제의 충과 전우, 전영 등의 학행에 대한 포상을 하고 있다. 전명항은 전치원의 5대손이었고, 전치원과 아들 전우, 조카 전제는 임란때 의병으로 충절이 있었기 때문에 후손의 효행과 조상의 충렬과 학행을 함께 포상 받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18세기 이후에 대대적으로 발견되는 효행청원의 고문서와 효행청원 유형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는 현상은 사회적으로 효행사실이 증가한 것이라기보다 효행포상을 통한 가문의 지위를 상승시키려는 열망이 증가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다산이 지적한 대로 진정한 효열 현상이 아니라 효행을 통한 욕망의 실현이라는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