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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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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 경찰의 최루탄 도입과 시위진압 능력 향상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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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번호 |
2021S1A5B5A17052437 |
선정년도 |
2021 년
|
과제진행현황 |
종료 |
제출상태 |
재단승인 |
등록완료일 |
2023년 02월 27일 |
연차구분 |
결과보고 |
결과보고년도 |
2023년 |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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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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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 이후 경찰은 강력한 개혁과 숙청 요구에 직면했다. 경찰 개혁과 숙청 요구는 이승만 정권기 각종 폐단의 주역이었던 사찰과 경찰에게 집중되었지만, 4월 혁명 당시 유혈 진압의 주체였던 발포 경찰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다. 한편으로는 경찰중립화와 인적 숙청으 ...
4월 혁명 이후 경찰은 강력한 개혁과 숙청 요구에 직면했다. 경찰 개혁과 숙청 요구는 이승만 정권기 각종 폐단의 주역이었던 사찰과 경찰에게 집중되었지만, 4월 혁명 당시 유혈 진압의 주체였던 발포 경찰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다. 한편으로는 경찰중립화와 인적 숙청으로 대표되는 경찰개혁을,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을 활용해 11월부터 고조된 통일운동에 대응해야 했던 장면 정권은 기왕에 경찰개혁과 관련해 협조를 구하던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경찰의 시위 진압 능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민간의 통일 논의를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미국도 장면 정권의 안정을 위해 적극 협조했다. 대한경찰원조의 실무를 담당하던 주한유솜 공안 고문들은 경찰의 시위 진압 훈련 계획을 작성하고, 훈련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또한 주한유솜을 포함한 컨트리팀 및 유엔군사령부는 긴급임무팀을 구성해 시위 진압 장비의 도입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최루탄 도입과 최루탄을 활용한 시위 진압 훈련이 추진되었다.
주한유솜 공안 고문들이 실탄 대신 최루탄을 주무기로 하는 시위 진압 방식을 도입하려 한 배경에는 최루탄에 대한 미 경찰원조 관계자들의 인식이 존재했다. 워싱턴 ICA 본부에서 대외경찰원조를 주관하던 공안과 관계자들과 한국 현지의 공안 고문들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미국에서 오랫동안 경찰 관련 직종에 종사했던 베테랑들이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는 경찰개혁 운동이 나타나며 근대적 경찰제도가 자리 잡았는데, 그 과정에서 실탄 대신 최루탄을 사용한 시위 진압 방식이 널리 보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기 전쟁 무기로 사용되었던 최루탄이 이후 그 생산자 및 지지자들에 의해 유혈 없이 시위를 진압할 수 있는 ‘인도주의적’무기로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경찰개혁 자문을 위해 방한한 ICA 공안과 자문단과 시위 진압 훈련에 개입한 공안 고문들은 실탄을 사용한 시위 진압 방식이 “현대 문명에 모순”되는 “낡은” 수법이므로 최루탄을 사용한 “인도적”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이른바 시위 진압의 ‘근대화’를 권고했다. 4월 혁명 이후 한국의 정세와 이와 같은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경찰의 주된 시위 진압 무기는 최루탄으로 변화했다.
1961년 초 대거 도입된 최루탄은 한동안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최루탄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나타난 이후였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최루탄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최루탄 피해담도 널리 퍼져 나갔다. 경찰은 최루탄이 ‘유독성’이 아니라고 단언했으며, 당시 경찰이 사용하던 최루탄을 공급한 미군도 그것을 안전한 진압 무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최루탄에 사용된 CN가스가 실제로 ‘유독’하다는 점이 규명되었다. 또한 김주열과 이한열의 사망, 그리고 수많은 최루탄 피해담에서 드러나듯이 최루가스를 담은 탄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었다. 사실, 4월 혁명 이후 김주열의 사망을 목도한 한국 사회에서 최루탄이 ‘인도주의적’인 무기라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1961년 초 최루탄 도입은 그것이 “민주주의적 수단”이라는 미국의 설득을 장면 정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한국현대사의 전개 과정은 최루탄이 ‘근대적’ 무기일지언정 결코 ‘인도주의적’ 무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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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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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the April Revolution, police have faced strong urge to reform and purge. Urging of police reform and purge were concentrated on the intelligence police which were the main players of various evils during the Rhee Syngman regime, but were also ra ...
Since the April Revolution, police have faced strong urge to reform and purge. Urging of police reform and purge were concentrated on the intelligence police which were the main players of various evils during the Rhee Syngman regime, but were also raised against the police firing upon the protesting people during the April Revolution. However, the Chang Myon government tried to strengthen the police's riot control ability to counter the unification movement with the United States from November 1960. The U.S. was deeply intervened in the police's riot control training and the introduction of riot control equipment. In the process, tear gas was procured and riot control training using tear gas was promoted.
The U.S. public safety advisors' perception of tear gas was behind this process. Most of the public safety advisors in Korea have been veterans of police-related jobs for a long time in the United States since the 1930s. In the 1930s, the police reform movement emerged in the United States, and the modern police system was established, and in the process, a method of riot control using tear gas instead of live ammunition was widely used. Since then, tear gas has begun to use commonly in riot control as a “humanitarian” weapon that can suppress protests without bloodshed. The public safety advisors recommended the so-called “modernization” of riot control, which calls for the introduction of “humanitarian” methods using tear gas. In this process, the main weapon of police's riot control has been turned into tear gas.

연구결과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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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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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 이후 경찰은 강력한 개혁과 숙청 요구에 직면했다. 경찰 개혁과 숙청 요구는 이승만 정권기 각종 폐단의 주역이었던 사찰과 경찰에게 집중되었지만, 4월 혁명 당시 유혈 진압의 주체였던 발포 경찰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다. 한편으로는 경찰중립화와 인적 숙청으 ...
4월 혁명 이후 경찰은 강력한 개혁과 숙청 요구에 직면했다. 경찰 개혁과 숙청 요구는 이승만 정권기 각종 폐단의 주역이었던 사찰과 경찰에게 집중되었지만, 4월 혁명 당시 유혈 진압의 주체였던 발포 경찰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다. 한편으로는 경찰중립화와 인적 숙청으로 대표되는 경찰개혁을,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을 활용해 11월부터 고조된 통일운동에 대응해야 했던 장면 정권은 기왕에 경찰개혁과 관련해 협조를 구하던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경찰의 시위 진압 능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민간의 통일 논의를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미국도 장면 정권의 안정을 위해 적극 협조했다. 대한경찰원조의 실무를 담당하던 주한유솜 공안 고문들은 경찰의 시위 진압 훈련 계획을 작성하고, 훈련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또한 주한유솜을 포함한 컨트리팀 및 유엔군사령부는 긴급임무팀을 구성해 시위 진압 장비의 도입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최루탄 도입과 최루탄을 활용한 시위 진압 훈련이 추진되었다.
주한유솜 공안 고문들이 실탄 대신 최루탄을 주무기로 하는 시위 진압 방식을 도입하려 한 배경에는 최루탄에 대한 미 경찰원조 관계자들의 인식이 존재했다. 워싱턴 ICA 본부에서 대외경찰원조를 주관하던 공안과 관계자들과 한국 현지의 공안 고문들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미국에서 오랫동안 경찰 관련 직종에 종사했던 베테랑들이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는 경찰개혁 운동이 나타나며 근대적 경찰제도가 자리 잡았는데, 그 과정에서 실탄 대신 최루탄을 사용한 시위 진압 방식이 널리 보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기 전쟁 무기로 사용되었던 최루탄이 이후 그 생산자 및 지지자들에 의해 유혈 없이 시위를 진압할 수 있는 ‘인도주의적’무기로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경찰개혁 자문을 위해 방한한 ICA 공안과 자문단과 시위 진압 훈련에 개입한 공안 고문들은 실탄을 사용한 시위 진압 방식이 “현대 문명에 모순”되는 “낡은” 수법이므로 최루탄을 사용한 “인도적”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이른바 시위 진압의 ‘근대화’를 권고했다. 4월 혁명 이후 한국의 정세와 이와 같은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경찰의 주된 시위 진압 무기는 최루탄으로 변화했다.
1961년 초 대거 도입된 최루탄은 한동안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최루탄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나타난 이후였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최루탄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최루탄 피해담도 널리 퍼져 나갔다. 경찰은 최루탄이 ‘유독성’이 아니라고 단언했으며, 당시 경찰이 사용하던 최루탄을 공급한 미군도 그것을 안전한 진압 무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최루탄에 사용된 CN가스가 실제로 ‘유독’하다는 점이 규명되었다. 또한 김주열과 이한열의 사망, 그리고 수많은 최루탄 피해담에서 드러나듯이 최루가스를 담은 탄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었다. 사실, 4월 혁명 이후 김주열의 사망을 목도한 한국 사회에서 최루탄이 ‘인도주의적’인 무기라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1961년 초 최루탄 도입은 그것이 “민주주의적 수단”이라는 미국의 설득을 장면 정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한국현대사의 전개 과정은 최루탄이 ‘근대적’ 무기일지언정 결코 ‘인도주의적’ 무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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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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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주체의 입장에서만 서술된 기존의 민주화 운동사를 뒤집어, 억압적 국가기구의 시선에서 새롭게 민주화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활용한다. 그럼으로써 1960년대 국가기구가 기능한 구체적·물리적인 양상을 밝힌다.
저항주체의 입장에서만 서술된 기존의 민주화 운동사를 뒤집어, 억압적 국가기구의 시선에서 새롭게 민주화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활용한다. 그럼으로써 1960년대 국가기구가 기능한 구체적·물리적인 양상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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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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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 시위 진압, 4월 혁명, 경찰원조, 한일회담 반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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