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하이너 뮐러 Heiner Müller(1929-1995)는 구동독 출신으로 동독에서보다는 서구 연극계에서 더욱 주목받은 특이한 극작가에 속한다.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가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50년대 이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의 도정은 비난과 오해 그리고 ...
[발췌]
하이너 뮐러 Heiner Müller(1929-1995)는 구동독 출신으로 동독에서보다는 서구 연극계에서 더욱 주목받은 특이한 극작가에 속한다.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가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50년대 이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의 도정은 비난과 오해 그리고 찬사가 한꺼번에 뒤섞인 모순의 과정이었다. 동독 문화 정책과의 마찰로 인한 출판 및 공연 금지의 역경에서부터 통독 이후 이미 저명인사가 된 그에게 가해진 ‘슈타지 가담’ 전력에 대한 비난에 이르기까지 그는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양 독일에서는 그의 문학을 중요하게 평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왔고, 1990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연극제 ‘엑스페리멘타 6’ (1990.5.19 - 6.4.)이 그에게 헌사 되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 같은 현상은 이 작가에 대한 명확한 평가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긴 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문단에서의 그의 특수한 위치를 암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1. 비난에서 찬사로 - 동독의 수용 상황
뮐러의 초기 관심사는 동독의 생산 현장 및 사회 내부의 여러 가지 모순과 갈등이었다. 때문에 이 시기의 뮐러의 극작활동은 당시의 정치적 조건, 그리고 동독 사회주의의 청사진만을 그려야 할 것을 예술에 요구했던 당의 문화 정책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헐값 노동자 Der Lohndrücker>가 1958년 3월에 라이프찌히 시립극장 스튜디오 무대에서 초연된 이후 잠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동독 비평계는 뮐러의 극작품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행동이 인과관계를 갖고 있지 못하며 짧은 장면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작품 구조가 사건의 지속적인 진행을 방해한다고 지적하고 특히 노동자를 이끄는 당지도부의 역할 표현이 미약하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뮐러의 극작방식이 오해와 몰이해의 대상이 되고 당의 문화 정책과 마찰을 빚으면서 그의 초기 극작활동이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은 <이주해 온 여인 또는 농촌에서의 생활 Die Umsiedlerin oder Das Leben auf dem Lande>을 무대에 올리면서 이어진 일련의 제재 조치였다. 이 작품은 동독의 초기, 사회주의 건설기에 있었던 경제적 조치인 토지개혁(1945)에서부터 농업집단화(1960)에 이르는 과정을 배경으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사회구조의 문제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었다. 뮐러는 당시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던 젊은 연출가 트라게렌 B. K. Tragelehn과 공동 작업으로 1961년 9월 30일 베를린-카를스호르스트 경제대학의 학생 무대에 이 작품을 올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의 성공에 대한 찬양도, 긍정적 주인공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모순과 그늘진 면에 대한 시각이 부각됨으로써 공연은 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작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반성문을 써야 제적을 면할 수 있었으며 연출자 트라게렌은 일하던 극단에서 무기한 해직되었고 뮐러는 이 사건에 직접 개입한 동독작가연맹에서 제명되었다.
동독무대에서 뮐러의 연극을 수용하는 새로운 단계는 <시멘트 Zement>(1972)의 공연( 초연 : 1973년 10월 12일, 베를린 앙상블 )으로 시작된다. 당시 동베를린의 연극계는 70년대 초부터 중반에 이르기까지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브레히트의 공연 모델 답습을 극복하기 위해 혁신적이고 자극적인 공연을 통해서 동독의 연극을 새롭게 일으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발표된 <시멘트>에 대한 동독 문학계의 반응은 예전과 상당히 달랐다. 뮐러의 작품에 짙게 깔려 있는 동독 사회의 암울한 면과 모순에 대한 예전의 비난은 <시멘트>에 대한 평에서 “이 모순은 앞으로 계속될 발전을 위한 추진력으로 작용한다”라는 긍정적 평가로 그 가치판단이 뒤바뀐다. 이후 동베를린의 헨쉘출판사는 그 동안 흩어져 있던 뮐러의 극작품을 한데 모아 출간하였다. 이 선집의 발문을 쓴 롤프 로머는 뮐러를 “우리의 가장 생산적인 극작가 중의 하나”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뮐러에 대한 평가가 이러한 인정으로만 완전히 뒤바뀐 것은 아니었다. 당의 공식적인 문화 정책은 계속해서 뮐러의 폭넓은 극작활동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마우저 Mauser>(1970)는 동독이 존재하는 동안 그곳에서 공연은 물론 출판조차 할 수 없었다. <게르마니아 베를린에서의 죽음 Germania Tod in Berlin>(1971), <군들링의 삶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레싱의 잠 꿈 비명 Leben Gundlings Friedrich von Preußen Lessings Schlaf Traum Schrei>(1976), 그리고 <햄릿기계 Die Hamletmaschine>(1977)는 동독 무대에 오르기까지 10년 이상이 걸렸다. 이는 뮐러의 작품들이 동독의 역사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일방적 평가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하이너 뮐러가 동독의 무대에서 제자리를 찾게 된 때는 뮐러 스스로 자기 작품을 연출하기 시작했던 80년대에 들어서였다. 1980년 11월 3일, 뮐러는 깅카 촐라코바 Ginka Tscholakowa와 공동으로 베를린의 ‘민중무대 Volksbühne’에서 자신의 <임무 Der Auftrag>(1979)를 연출했다. 그 후, 1988년 1월 29일, <헐값 노동자>를 뮐러 스스로 ‘독일극장 Deutsches Theater’에서 연출하여 동독뿐만 아니라 서독의 극비평계로부터 칭송 받기까지 동독 무대는 뮐러의 극작품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동독 문학계와 연극계는 뮐러의 텍스트가 갖고 있는 동독 사회주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건설적 비판의 잠재성으로 파악했고 현대 연극으로서의 그의 새로운 극작방식에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동독의 예술아카데미는 1982년 뮐러를 받아 들였고 1986년 뮐러는 동독국가상을 수상했다. 뒤이어 1988년 2월 18일 작가연맹은 뮐러를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뮐러는 1961년 제명 사건 이후 26년만에 다시 동독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90년 7월 16일, 뮐러는 동독 예술아카데미 원장에 피선됨으로써 동독문학의 대표자 반열에 들게 되었다.
2. 선별적 수용 - 서독의 수용 상황
60년대 말까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동독 문학에 무관심했던 서독 문학계는 70년대에 들어 정부의 긴장완화 정책으로 또 다른 하나의 독일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동독 문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독 문학은 독일 문학의 한 범주로서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독 문학계는 동독 내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하이너 뮐러를 뒤늦게나마 발견하였다. 동독에서 뮐러에 대한 연구가 헨쉘 출판사의 작품집 발간으로 큰 전환기를 이루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독에서도 뮐러에 대한 접근은 서베를린의 로트부흐 출판사가 11권에 이르는 뮐러의 작품집을 1974년부터 발간함으로써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서독의 연극계가 먼저 주목한 뮐러의 작품은 고대(古代)의 작품과 신화를 소재로 다룬 극작품, 예를 들면 <필록테트 Philoktet>(1958/64), <헤라클레스 5 Herakles 5>(1966), <폭군 오이디푸스 Ödipus Tyrann>(1966),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1967/68), <호라치 사람 Der Horatier>(1968) 등 이었다. 특히 <필록테트>는 1968년 7월 13일 뮌헨의 레지덴츠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80년대 말까지 30회 이상 공연을 기록한 최대의 성공작이었다. 60년대 말과 70년대에 고대극 및 신화의 번안 작품으로 뮐러가 서독극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후 80년대 서독에서 뮐러의 극작품을 수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극장은 ‘보쿰 앙상블’이었다. 보쿰 앙상블은 1981년 9월 7일, <심장 Herzstück>(1981)의 초연을 시작으로 82년 4월 7일, <사중주 Quartett>(1980), 83년 4월 22일, <황폐한 물가 메데아자료 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 Verkommenes Ufer Medeamaterial Landschaft mit Argonauten> (1982), 85년 2월 14일, <해부 타이터스 로마의 몰락 세익스피어주석 Anatomie Titus Fall of Rom Ein Shakespearekommentar>(1984)을 초연했다. 이후 서독무대는 계속해서 뮐러의 80년대 작품에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서독무대의 뮐러 수용 상황은 처음부터 선별적이라는 점이 눈에 뜨인다. 뮐러의 극작에 있어서 중요한 초기 생산극들이 공연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이념적 조건, 정치적 상황의 고려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이미 70년대 중반 “브레히트 이후 가장 의미 있는 독일어권 극작가”, “동독의 가장 중요한 작가”라는 찬사를 시작으로 80년대 말, “베케트와 필적하여 그리고 베케트 이후, 50년대 이래로 연극이라는 매체나 드라마 생산에 더불어 영향을 주고 있는 작가가 바로 뮐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3. 체험을 통한 글쓰기
작가의 체험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든, 주제로나, 형식으로나 작품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작가의 생애와 작품과의 관련성 분석은 작품 분석의 객관적인 결과를 도출해 내는데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이너 뮐러의 삶과 그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뮐러에게도 역시 자신의 체험이 극작에 있어서 뚜렷한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수많은 인터뷰와 대담에서 밝힌 뮐러의 사회적, 역사적 체험에 관한 부분과 개인적 삶의 체험에 관한 부분 그리고 두 편의 산문 <아버지 Der Vater>(1958)와 <사망신고 Todesanzeige>(1975)는 그의 작품과 체험의 관련성 분석을 위한 자료를 제공한다. 우선 뮐러에게 있어서 가장 뚜렷하게 작품과 연결되는 체험은 유년 시절, 파시즘과 그 폭력의 체험이다. 사회민주당원이던 아버지가 나치돌격대원(SA)에 의해 체포되던 날부터 그 이후의 어려운 생활, 강제수용소로의 아버지 면회, 서베를린으로의 아버지의 도주 그리고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에 이르기까지 뮐러의 머리에 선명하게 각인 되어 있는 기억을 담고 있는 <아버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1933년 1월 31일, 새벽 4시,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인 아버지는 침대에서 체포되었다. 나는 잠을 깼다. 창문으로 본 하늘은 깜깜했고 시끄러운 목소리와 발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책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낯선 목소리 보다 더 분명히. [...] 문틈으로 나는 한 사내가 아버지의 얼굴을 때리는 걸 보았다. 난 떨면서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 그들은 모두 셋이었다. [...] 나는 그들이 아버지를 데리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다음엔 혼자 돌아오는 어머니의 발소리가 잠시 들렸다.
이것이 뮐러에게 있어서 민족사회주의와 그 폭력형태와의 첫 번째 만남이며 이 기억은 그에게 사라지지 않는 악몽이다. 뮐러는 한 대담에서 위의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가 체포되던 순간을 “내 연극의 첫 번째 장면”이라 규정한다. 그만큼 이 체험은 독일 파시즘의 야만성과 폭력에 대한 대응으로서 뮐러의 극작에 중심적인 하나의 모티브로 자리한다. 그러나 이러한 파시즘 폭력의 모티브는 뮐러의 작업에 있어서 단순히 그 고발 형태로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폭력은 삶과 일상에서 나타나는 폭력을 넘어 인간 사이의 교류 형태,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까지 확장되며 나아가 그 역사적 원인에 대한 논의로 발전한다. <호라치 사람>과 <마우저> 그리고 독일을 주제로 하는, 다시 말해 독일 역사에 나타나는 폭력행위의 성격과 원인을 다루고 있는 세 작품 <살육 Die Schlacht>(1951/74), <게르마니아 베를린에서의 죽음>, <군들링의 삶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레싱의 잠 꿈 비명>, 그리고 <그림쓰기 Bildbeschreibung>(1984)는 뮐러의 폭력 체험이 뚜렷하게 작용한 작품들이다.
<아버지>에 나타나는 또하나의 중요한 체험은 아버지에 대한 실망, 다시 말해서 아버지에게서 느낀 배신감이다. 히틀러가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뮐러는 학교에서 이에 대한 작문을 해야 했다. 당시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는 작문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놓고, 후에 생각을 바꿔 고속도로를 건설하면 아버지가 다시 일자리를 얻게 되니 기쁘다라는 내용의 문장을 불러 준다. 뮐러의 “작문은 상을 받게 되었고 아버지는 고속도로 공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뮐러는 아버지가 불러 준 “그 문장이 내게 배반의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라고 술회한다. 아버지의 기회주의는 뮐러에게 깊은 인상으로 자리한다. 이것이 뮐러의 두 번째 전기적 모티브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결과로 나타나는 작품이 배반을 관점으로 혁명을 테마화하고 있는 <마우저>와 <임무>라 할 수 있다. 이 배반의 모티브는 유럽혁명모델의 좌초 과정을 세계사와의 관계 속에서 형상화하는데 기본 동인으로 작용하며 70년대 뮐러의 미학적 특수성을 만들어 내는데 중심 역할을 담당한다.
하이너 뮐러는 1944년, 15세의 나이에 학생징집군의 일원으로 나치노동봉사에 참여하고 16세 때 미군의 포로가 되는 고초를 겪으며 2차 세계 대전 속에서 전쟁의 실상을 체험했다. 산문 <사망신고>에서 끈질기게 뮐러를 따라 다니는 어린 독일 병사 “닭상(相) Hühnergesicht”의 이야기는 전쟁의 체험 기록이다. 닭상 이야기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의식은 - 뮐러는 실제로 어린 독일 병사를 죽이진 않았으나 이 산문에서는 뮐러가 그를 세번 죽이는 살인의 환상이 나타난다 -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전환점, 물화(物化)된 역사로부터의 주체의 해방 또는 과거의 회상등 여러 가지 상이한 형태의 모티브로 발전한다. 또한 이 산문에 나타나는 파시즘의 폭력과 파시즘에 의해 일어난 전쟁 체험은<살육>, <트랙터 Traktor>(1974), <볼로코람스크 국도 1, 2>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된다.
<사망신고>에 전쟁 체험을 통한 이러한 죽음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내였던 잉에 뮐러(Inge Müller)의 자살에 대한 기록이다. 그녀는 1966년 6월 1일, 그녀의 나이 41세에 자살했다. 아내의 자살은 특히 뮐러의 후기 작품에 여성의 성역할 문제, 역사에 있어서의 남성과 여성의 관계라는 테마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기여한다. <시멘트>의 다샤를 통해 어머니와 가정주부, 남성의 소유물로서의 전통적인 여성역할에 대립하는 여성상을 만들어 냈던 뮐러는 남성중심의 역사에 저항하는 여성해방의 모습을 계속해서 만들어 낸다.
이 모습은 죽음과 폭력의 모티브가 연결된 극단적 파괴 형태로서 <햄릿기계>의 오펠리아/엘렉트라, <사중주>의 메르뛔이 그리고 <황폐한 물가 메데아자료 아르고호 사람들 있는 풍경>의 메데아가 보여주는 외부를 향한 공격, 남성사회에 대한 공격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아내 잉에 뮐러의 자살로 겪었던 깊은 고통은 뮐러로 하여금 인간을 더욱 자세히 관찰하게 만들었고 거의 모든 사물에 있어서의 다른 관계에 대한 희망을 더욱 추구하게 만들었다. 체험을 통한 글쓰기, 그것은 하이너 뮐러에게 있어서 “자신의 여러 가지 경험을 가공하는 하나의 방법” 이다.
4. 중심 주제 - 역사의 실체 찾기
역사는 뮐러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던 간에 불변의 테마로 지속된다. 그는 남다른 역사의식으로 자신의 삶의 체험을 역사의 체험으로 받아들인다. 역사를 다루는 뮐러의 작업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시간을 재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뮐러는 지나간 과거의 역사가 갖고 있는 어두운 면, 치부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현시대의 흐름에 존재하는 모든 모순들을 철저히 파헤친다. 그는 솔직한 표현으로 국가이념과 개인,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등 여러 형태간의 갈등 구조와 모순구조를 밝혀 내고 비판한다. 뮐러의 입장에서 모순과 갈등 드러내기는 그 드러냄을 거울삼아 새롭고 완전한 사회의 건설을 관객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자 “좀 더 인간적인 세계를 위한 투쟁”이다. 뮐러는 말한다.
나는 갈등을 믿는다. 그 외에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내 작업에서 내가 시도하려는 것은 갈등에 대한, 모순과 대결에 대한 의식을 강화시키는 일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답과 해결은 내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 나는 어떤 대답이나 해결도 제공해 줄 수 없다. 내게 흥미로운 것은 여러가지 문제와 갈등이다.
이 같은 기본 구도에서 사회주의 건설기의 동독사회가 갖는 모순을 비판하던 뮐러의 시각은 60년대 중반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사회 모순의 해결을 위해 그 모순을 드러내 보이며 혁명적 변혁을 추구하던 뮐러에게 있어서 변혁은 그의 기대와 달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으나 모순 없는 사회로의 전환은 지루한 과정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뮐러에게 실망으로 다가서며 다른 각도에서의 역사 성찰을 요구한다. 현실의 상황과 역사를 함께 생각하는 뮐러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시대의 역사적 근원을 찾아내고자 한다. 여기에서 뮐러의 시각은 유럽인의 정신적 기저에 깔려 있는 신화와 고대(古代) 그리스 극작품들로 향한다. 진정한 사회주의 변혁을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야만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역사의 더딘 진행 과정의 근본적 원인은 신화와 고대의 야만적 성격에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야만의 시대로서의 고대 - 뮐러의 역사의식은 일차적인 현실의 모순비판과 그 논의를 넘어 미래를 위한 좀 더 깊은 성찰 과정으로서 신화와 고대가 감추고 있는 야만성을 향한다. 고대의 사건들은 그에게 있어서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으로 인식된다. 동독 사회주의 사회는 여전히 이러한 전쟁과 폭력의 야만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필록테트>의 프롤로그는 뮐러가 파악하는 고대가 어떠한 것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이 인간의 불구대천의 원수였고 / 학살이 익숙한 것이었으며 삶이란 것이 위험한 것이었던 / 과거”가 바로 뮐러가 해석하는 고대의 모습이다. 신화와 고대의 영웅들을 둘러싼 대립과 싸움이 철저한 계급 대립에서 일어난다고 본다면 이러한 야만성을 벗어나지 못한 고대는 마르크스주의의 의미에서 뮐러가 파악하는 진정한 사회주의(=역사) 이전의 시대, 즉 전사(前史)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때 전사는 뮐러의 역사이해에 있어서 본질적 개념을 형성하는 것으로 계급사회의 형성 과정에서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권력투쟁, 억압, 착취, 노예화 그리고 야만성 내지 잔인성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사회 상황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서 뮐러가 말하는 전사의 사회 형태는 사회주의 이전의 야만적 상태이다.
이제 뮐러의 역사적 시각은 자신이 속한 동독 자체 그리고 독일의 역사로 향한다. 뮐러는 독일 역사의 어두운 면, 숨겨진 면 그리고 갈등과 모순의 상황을 극단이라 할 만큼 밝혀내고 비판한다. 여기에서 뮐러가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곳은 파시즘의 폭력으로 얼룩진 과거 그리고 프로이센의 신하근성과 절대봉건주의이다. 뮐러의 입장에서 이것은 극복되어야 할 과거의 유산이며 독일 역사가 갖고 있는 비참성이다. 이 비참성은 독일역사에서 치유되지 않은 채 여전히 무거운 짐으로서 역사발전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 뮐러의 시각이다. 그는 이러한 독일의 역사구조를 폭로하기 위해 극단적인 메타포와 모티브를 사용한다.
폭력의 역사는 독일역사의 부분일 뿐만은 아니며 인류 전체의 역사가 갖는 뒷모습이기도 하다. 자기난도질의 역사, “도살장”으로서의 역사 - 이것이 뮐러가 보고 있는 역사의 한 단면이다. 기형화한 독일역사의 모습은 <게르마니아 베를린에서의 죽음>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판토마임 형식의 11번째 장면인 <야경화>를 제외하고 둘씩 쌍을 이루는, 총 13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독일의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면서 분열된 독일의 역사를 보여준다. 16세기 이후 독일민족의 어머니, 민족의 성스러운 심장으로 상징되어 온 여신 게르마니아는 히틀러와 괴벨스 사이에 태어나는 기형늑대(=서독)의 출산을 돕는 산파로 등장하며 기형아 출산에 화가 난 히틀러는 게르마니아를 대포로 없애 버린다. 서방의 세 강대국,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암시하는 성자 3인은 아이의 출산에 고문 기구를 선물한다. 서방의 힘, 군비확장정책은 독일의 분열, 게르만인의 분열을 낳았음이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이와 함께 뮐러는 독일역사 자체가 갖고 있는 독일분열의 원인을 분석한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방앗간 주인의 일화를 연기하는 두 광대를 통해 군국주의와 이에 맞서지 못하는 민중의 무력함이 비판되고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파국적 패배를 당했던 스탈린그라드 전장(戰場)에 모여든 니벨룽엔 용사들의 자기 난도질로 독일인들의 끊임없는 자기 파괴가 풍자된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에도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독일의 과거사와 현대사에 있어서 독일인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그늘진 면을 드러내는데 집중되었던 뮐러의 역사적 시각은 70년대 말부터 동독, 독일이라는 지역성을 탈피하고 유럽, 세계의 역사로 확장된다. 유럽은 뮐러에 의해 완전히 파국적으로 규정된다. 유럽은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폐허이다. 특히 서유럽은 뮐러에게 있어서 역사의 움직임이 없는 죽은 장소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고도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라는 그들의 질서구조 속에 응고되어 있으며 석화(石化)되어 있다. 이 정지된 역사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폭력의 순환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들은 단지 현재만을 살아가고 있으며 결국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사유능력을 상실한 개인적, 집단적 망각의 상황뿐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세계의 또 다른 상태에 대한 동경을 일깨우는 일이다.”
뮐러는 자신의 연극을 도구로 하여 역사에 대한 생산적 논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현재의 역사적 위치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이 역사를 테마로 한 뮐러의 글쓰기 모토라 할 수 있다. 뮐러의 세계역사 개념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그의 역사에 대한 논의의 귀결점은 결국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향해 있다. 뮐러는 지금까지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세계의 여러 문제를 위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여 사회주의를 미래로 인정한다. 뮐러는 이를 믿음이라기 보다는 역사상의 빈자리로 설정하고 자신의 극쓰기는 그 빈자리를 묘사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5. 파괴 그리고 경계 넘기
하이너 뮐러의 사유와 극쓰기의 방식은 극단적이다. 그의 의식의 흐름은 고통을 수반하면서 때로는 악몽으로 때로는 전혀 비논리적인 환상의 세계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뮐러의 시각에서 보자면 역사는 발전의 움직임을 멈춘 채 응고되어 있고 인간은 사유의 능력을 상실한 채 현재의 순간에 점령당해 있다. 모든 것이 석화하여 있다. 뮐러는 이러한 현재의 상황을 부수는 작업에 몰두한다. 새로운 것으로의 전이, 새로운 역사의 움직임을 태동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굳어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만들어 내는 장면들은 극단적인 난폭성, 테러와 같은 공격으로 채워지고 압축된 언어는 수수께끼와 같은 암호와 상징, 은유로 덮여 있다. 뮐러는 모든 기존의 틀을 그 기초부터 흔들어 놓는다. “경악시키기의 요구”로 규정되는 그의 연극텍스트는 이를 위한 수단이다. 기존의 틀에 갇혀 있는 독자와 관객에게 그 틀을 부수고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악을 통한 교육” 그리고 “경악을 통해 배우기”
문학이 해야 할 일은 역사와 상황 그리고 인간의 두려움의 중심을 찾아내 그것을 독자, 관객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두려움의 중심을 은폐하거나 덮어두면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에 접근할 수가 없다. 두려움과의 대결을 통한 두려움의 극복이 요구된다. 뮐러의 연극텍스트가 갖고 있는 경악의 요소는 관객을 심리적 압박하에 놓아서 그로 하여금 어떠한 반응을 일으키도록 강요한다. 관객의 경악이 그 작품 자체를 향하고 최소한 방어의 반응으로서의 어떤 저항감을 가지고 그가 극장을 떠나게 되면 이미 새로운 경험과 기억이 그의 의식 속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뮐러는 관객의 이러한 경험이 그들의 실제 생활의 변화에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모든 것에 무감각해져 있는 현대인의 의식과 고정관념의 틀을 깨기 위한 ‘경악시키기’의 표현형식은 파괴로 이어진다. 뮐러에게 있어서 파괴는 건설적, 생산적 힘을 갖는다.
뮐러의 연극작업은 만들어져 있는 기존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의 극작품에는 종래의 극작법의 필수적인 단위들인 시간, 장소, 줄거리 그리고 역분배등이 존재하지 않거나 명확하게 지시되지 않는다. 보편적인 극구조가 파괴된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환상의 세계와 꿈과 같은 사유의 세계이다. 상상과 관념의 그림들이 다층적으로 혼재하면서 그려내는 것은 마치 안개에 싸인 희미한 이미지와 같아서 여기에서 방향 잡기란 너무도 어려워진다. 대사보다는 독백과 주석이 우선되고 직접적인 무대행위보다는 사유의 산문과 시적으로 구성된 구술텍스트가 지배한다. 단순한 줄거리의 진행은 찾아 볼 수 없으며 몽타즈, 콜라즈 형식으로 구성된 장면에 산문과 운문, 수많은 인용구가 뒤섞여 있다. <호라치 사람>은 역분배가 지정되지 않은 운문으로 이루어진 텍스트이며 <햄릿기계>는 영어가 뒤섞인 독백의 텍스트이다. <그림쓰기>는 아예 마침표 없는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줄거리는 단지 단편적으로 인식될 수 있을 뿐이며 인물간의 갈등은 관객 앞에 직접 나타나는 일없이 암시로 이루어질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들이 혼재된 상태로 겹쳐 있다. 등장인물은 명확한 자신의 삶과 아이덴티티를 갖지 못하며 누군가의 음성을 전달해 주는 대리인일 뿐이다. 이와 같은 “탈드라마화한 극작품”은 고정관념의 틀 깨기를 위한 뮐러의 전략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여기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등장인물의 아이덴티티 파괴이다. 현대 사회에 드러나는 주체의 소멸, 주체적 사고의 부재현상은 이를 통해 경고된다.
하이너 뮐러의 사유와 글쓰기 방식은 이처럼 고착된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에게 있어서 “계속해서 가능한 세계에 고착한다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 종래의 드라마 개념에서 탈피하는 그의 작품에는 그만큼 드라마 내지 희곡이란 장르명칭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장르의 경계까지 넘어서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글쓰기가 연극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하이너 뮐러의 글은 연극을 위한 텍스트, 즉 ‘연극텍스트’로서 기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