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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垂 趙冕鎬 漢詩 硏究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출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6-814-A00092
선정년도 2006 년
연구기간 1 년 (2006년 11월 01일 ~ 2007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김용태
연구수행기관 성균관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玉垂 趙冕鎬(1804〜1887)는 오늘날 대부분의 문학사 서술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지만, 사실 그는 19세기 중후반 서울 北村 詩壇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옥수는 어려서 ‘담정그룹’의 일원이었던 犀園 金䥧으로부터 詩文을 지도받았고, 40대가 넘어서는 秋史 金正喜의 만년 제자가 되어 金石書畵와 시문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海藏 申錫愚⋅瓛齋 朴珪壽 등과 같은 막역한 벗들과 함께 철종말⋅고종초기 북촌 시단을 주도하며, 金昌熙⋅金綺秀⋅韓章錫 등의 후배 문인들을 이끌어 주었다. 이처럼 옥수가 교유했던 인물들은 당대 학계와 문단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또한 옥수는 영정조 시대 실학파 문인들이 이룩한 ‘朝鮮詩風’의 성과를 충실히 계승하고 독창적으로 활용하였으며, 丙寅洋擾⋅辛未洋擾와 같은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장편 한시 「西事雜絶」 전후편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그는 19세기 한문학사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할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수는 잊혀진 시인이 되고 말았는데, 이러한 망각은 비단 옥수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옥수와 동시대를 살며 서울에서 활동했던 인물들 중에는, 그 문집의 간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저작물이 온전하게 수집된 경우조차 매우 드문 것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격변의 역사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그중에서도 서울은 그 혼란의 정점에 있었다. 왕조가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되는 격동기를 살아갔던 당시 사람들로서는 先人들의 저작을 정리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일제는 식민지 경영을 위해 식민사관을 유포하며 우리 민족에게 과거와의 단절을 강제하였으니, 정리되지 않은 19세기의 역사는 쉽사리 오해되고 망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은 아직까지 남아 19세기 역사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조장하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한 實事求是的 연구가 미흡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19세기 중반기 한문학에 대한 연구가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옥수와 같이 중요한 시인이 후대에 잊혀지고 말았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옥수에 대한 연구와 언급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차주환은 옥수 詞 문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益齋 李齊賢 이후에 第一人者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고 극찬한 바 있으며, 최완수는 김정희의 󰡔阮堂集󰡕에 나오는 자료를 토대로 옥수의 글씨가 추사체의 진수를 터득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또 이가원은 󰡔麗韓傳奇󰡕를 엮으며 옥수의 「自知自不知先生傳」 한 편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와 언급들은 옥수에 대한 전기적 사실이나 그가 남긴 문집 전반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극히 일부분만을 단편적으로 조명한 것에 지나지 않아 학계의 주의를 끌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들어, 김명호에 의해 병인양요⋅신미양요를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옥수의 「西事雜絶」 전후편이 발굴되고 그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옥수는 다시 학계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서사잡절」 전후편은 양요의 발발 원인에서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하게 추적하고 있어 역사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게다가 민족사의 대사건인 양요를 본격적인 문학으로 형상화한 유일한 작품이며, 또 구체적 문학성에 있어서도 趙秀三의 「西寇檮杌」을 잇는 ‘詩史의 걸작’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문학사적 의의가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서사잡절」 전후편이 발굴되는 과정에서 옥수의 문집인 󰡔玉垂集󰡕의 존재도 함께 부각되었다. 33권(습유1권 포함) 16책의 분량에 5,000題가 넘는 한시와 기타 산문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옥수집󰡕에는 「서사잡절」 전후편 이외에도, 경향각지의 풍정을 노래한 紀俗詩, 당대의 쟁쟁한 시인들에 대하여 읊은 懷人詩, 또 소품문 같은 감수성을 담고 있는 生活詩 등등 우리 문학사에서 소중히 간직해야할 작품들이 풍성히 담겨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옥수집󰡕의 발굴은 19세기 한문학 연구에 있어 새로운 광맥이 열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본 연구는 이러한 옥수집의 문학적 성과를 규명하고 나아가 이것을 19세기 문학사에서 정당히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첫째. 조면호와 함께 북촌 시단에서 활동하였던 시인들에 대한 연구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아직까지 그 조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고 있는 형편인데, 󰡔옥수집󰡕에는 이들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이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될 것이다.

    둘째. 조면호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서 스승과 관련된 일화나 가르침 그리고 같은 추사 문하의 동문들에 대하여 중요한 정보를 많이 남겨 놓았다. 조면호를 포함한 추사의 제자들을 묶어 ‘추사학파’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이를 통해 19세기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추사에 대한 이해가 한 단계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19세기 한중 문학교류에 대한 연구로 확대될 것이다. 옥수는 청나라에 가지는 않았지만, 서신을 통해서 많은 중국인사들과 교유하였으며, 임오군란 때는 조선에 들어왔던 청나라 문사들과 매우 긴밀한 교유를 가졌다. 이러한 교유를 토대로 한중 문학 교류사의 한 페이지를 채울 수 있다.

    넷째. 19세기 한문학과 소동파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조면호 시문학의 여러 특징적인 면모들 특히 해학과 유머 등은 동파시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파에 대한 존숭은 당시 조면호를 위시하여 당시 문단의 열풍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시급하다.

    다섯째. 근대 전환기의 초기 모습에 대한 문학 자료가 적극 발굴될 것이다. 󰡔옥수집󰡕에는 개항과 관련된 조면호의 역사적 입장, 개항 이후의 서울의 모습 등이 풍부히 담겨 있다. 조면호는 개항을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이와 같이 개항 찬성론자의 논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상세한 소개와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조면호를 포함한 개항 찬성론자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외에도 세세한 문단의 유행이라던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옥수집󰡕에는 풍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이러한 문제들도 향후 19세기 한문학 연구가 본격화됨에 따라 자연스레 연구의 손길이 닿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 연구요약
  • 19세기 중후반 서울 北村 詩壇을 주도하였던 玉垂 趙冕鎬(1804〜1887)는 영⋅정조 시대에 이룩된 ‘朝鮮詩風’의 성과를 충실히 계승하였으며, 그것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당시 서구열강의 침투에 따라 연이어 일어났던 丙寅洋擾⋅辛未洋擾와 같은 대사건들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西事雜絶」전후편을 창작한 當代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옥수는 1804년 2월 7일(순조3년 癸亥 12월 26일) 서울 校洞에서 임천 조씨 趙基恒과 안동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옥수의 집안은 9대조 趙瑗이래로 서울에 세거하였으며, 안동 김씨⋅경주 김씨와 대대로 척분을 맺어온 京華士族이었다. 그래서 朴趾源의 절친한 벗이었던 안동 김씨 金履度가 옥수의 외조부가 되고, 경주 김씨 金正喜는 옥수의 부친과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으며, 옥수에게는 妻叔이 된다.
    옥수는 어려서 부친의 벗이었던 金䥧에게서 글을 배워, 1837년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敬陵參奉으로 처음 출사하였다. 이후 평안도 三登縣令, 전라도 淳昌郡守, 平壤庶尹을 역임하는 등 지방관으로서 순탄한 벼슬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50년 암행어사의 탄핵으로 평양서윤에서 파직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벼슬 생활을 접고 서울로 돌아 왔다. 그런데 이때는 마침 김정희가 제주 유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직후였기에, 옥수는 본격적으로 김정희의 문하에 나아가 글씨와 詩文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이러한 가르침은 이후 옥수가 ‘시인’으로 거듭나는데 바탕이 되었다. 특히 이때 김정희를 통해 蘇軾의 문학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 옥수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55년에는 호조 정랑에 제수됨으로써 옥수는 다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857년에는 경상도 義城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암행어사의 탄핵을 받아 평안도 江西 지방으로 유배를 다녀왔다. 1858년 해배되어 파주에서 잠시 머물다가 1860년 이후에는 서울 북촌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옥수는 시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살게 된다. 서울 북촌에서 열리는 시사를 주도하며 朴珪壽, 申錫愚 등의 벗들과 활발한 시사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에 따른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에 따라 신미양요가 발발하였을 때는 이 두 사건의 전 과정을 잡절 형식으로 노래한 「서사잡절」 전후편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은 옥수 시문학의 대표적 성과라 할 수 있다.
    1860년대 후반부터 옥수의 주위에는 金綺秀, 金允植, 金昌熙, 魚允中, 申箕善 등의 후배들이 모여들었는데, 옥수는 북촌 시사의 선배로서 이들을 이끌어 주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이후 혼란스런 시국이 전개되었을 때도 옥수는 그때마다 자신의 견문과 소회를 담은 우국시들을 꾸준히 남겼다.
    만년에 이르도록 옥수는 북촌시사의 ‘主人’으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이다가 1887년 11월 16일(고종24년 음력 10월 2일) 타계하였다.
    󰡔옥수집󰡕에는 5,000題가 넘는 방대한 한시 작품이 남아 있다. 옥수가 이렇게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시인으로서의 남다른 기질이 큰 작용을 하였다. 그는 창작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여, 자신은 의도하지도 않는데 시가 저절로 쓰여진다는 말을 종종 하였으며, ‘詩神’이 와서 자신에게 시를 짓도록 한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또 꿈속에서 시를 짓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 옥수에게 있어 시는 선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도구였다. 옥수도 수학기에는 세상을 경륜해 보겠노라는 포부가 자못 컸으나, 환로가 순탄치 못하여 탐장죄인으로 유배까지 다녀오는 등 士로서 좌절을 겪게 되자,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을 점검하고, 채찍질하며, 위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蘇軾의 시가 옥수에게는 구원의 문학으로 다가왔다. 소식도 유배를 간 일이 있음을 떠올리며 위안을 받기도 하고, 淸貧을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소식 시의 매력에 심취하였다. 소식의 시는 옥수가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데 큰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옥수는 내면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시를 추구하였기에, 다른 사람의 시를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것을 매우 혐오하였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吾詩’를 쓰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모방과 답습을 싫어한다고 해서 한시문학의 전통을 가볍게 본 것은 아니었다. 옥수는 조선과 중국의 역대 저명 시인의 시를 널리 읽고, 의고시도 다수 창작하였다. 또 조선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詞문학에도 관심을 갖고 창작에 힘을 기울여 사문학에 있어서도 높은 경지를 이룰 수 있었다.
  • 한글키워드
  • 옥수 조면호. 김정희. 박규수. 북촌 시단. 19세기 한문학. 기속시. 회인시. 개항기. 조선시풍. 추사학파. 서세동점. 죽지사.
  • 영문키워드
  • Oksujip.,Chusa School,Kang-Wi,Oksu,Cho Myeon-ho. kyung-hwa-sa-jok. Korean history of the 19th century. prose literature. Kim Jeong-hee,Lee Sang-juk,Heo-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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