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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제주거주 몽골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와 변화 : 호적중초에 보이는 본관명 ‘大元’ 가문의 사례분석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7-327-A00044
선정년도 2007 년
연구기간 1 년 (2007년 12월 01일 ~ 2008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김동전
연구수행기관 제주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과제는 조선후기 제주도에 거주했던 몽골인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를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호적중초’ 자료를 통해 확인하고, 이들이 19세기 제주사회의 변동과정에서 어떠한 변화를 보이는지를 연구함으로써 몽골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까지 몽골인 후손들이 제주에 거주했던 실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몽골의 1세기에 걸친 제주간섭 및 통치로 제주에는 다양한 몽골인들이 건너오게 되었다. 즉, 탐라총관부의 다루가치를 포함한 몽골의 관리, 군인이 파견되어 왔고, 목마장 설치로 인한 마필사육자인 목호, 운남왕과 백백태자를 비롯한 원의 황실후손들이 제주에 유배되었으며, 원이 멸망한 후에 자의적으로 제주로 건너온 군인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이러한 연유로 제주에 건너온 그들의 후손들은 조선후기까지도 제주에 거주하면서 본관을「大元」이라 칭하였다.
    본관을 ‘大元’이라 기재하는 제주의 성씨 중 제주읍지류에는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 등 10성이 나타나지만, 여러 자료 등에는 몇 개의 성씨가 추가적으로 나타난다. 몽골인 후손들은 조선후기 호적중초에 그들의 본관명(本貫名)으로 ‘대원(大元)’이라 기재하고 있었다. 이는 몽골의 후손들이 오랜 기간 동안 그들 나름의 정체성을 고수해오다가 19세기 초에 이르러 ‘대원’이라는 본관명을 스스로 버리면서 제주인들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호적중초에서 ‘대원’ 본관명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모두 찾아내어 이들의 성씨, 직역, 혼인양상, 가계의 변화 등을 추적함으로써 조선후기 제주사회에서의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1801년을 전후해서 제주사회의 신분변동이 크게 동요되는 가운데, 본관을 ‘대원’이라 기재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본관을 버리고 어떠한 본관 명칭을 취하는 지를 밝히고, 나아가 그들의 신분적 변화를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 본 연구과제 수행의 기본 목표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조선후기 제주지역 호적중초에 본관명으로 ‘대원’이라 기재하는 가문의 사례 분석을 통해 당시 제주에 거주했던 몽골인들의 존재양태를 고찰한다. 현지자료의 발굴 및 심층 분석을 통하여 중앙중심적이고 국가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지역사 및 지역민의 시각에서 연구를 진행한다. 1) 한국 속의 또 다른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탐라문화에 대한 위상 정립을 통해 탐라문화의 정체성에 기초한 지역학 연구의 활성화를 도모할 것이다. 2) 제주를 중심축으로 일본-오키나와-중국-몽골 등의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기본적으로 반영함으로써 동아시아문화공동 형성 기반 구축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3) 제주와 몽골간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학술교류 및 문화교류사업의 보다 공고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회적 활용도를 극대화한다. 즉, 제주와 몽골간의 교류 확대에 따른 몽고의 날, 제주의 날 지정, 몽골에서 추진하는 몽골문화원 제주 건립 촉진, 몽골과의 문화교류와 국제문화관광 네트워크 확대 추진 등이다. 4) 상호 문화 연구 및 교류 인력을 양성하고, 대학원 학생들로 하여금 제주와 몽골 문화를 비교 연구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 연구요약
  • 동아시아 속에서 제주와 몽골과의 관계는 그 어느 지역과의 대외관계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제주도는 1273년(원종 14)부터 1374년(공민왕 23)까지 약 100여 년 간 원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원의 세조는 남송과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탐라를 중요시하고, 1268년(원종 9)과 1269년(원종 10) 두 차례 사신을 고려에 파견하여 군사와 병선 및 탐라 등지의 海路를 탐문하였다. 이어 제주에서 항쟁하고 있던 삼별초를 여몽연합군이 진압하면서 제주는 원의 간섭을 받게된다. 탐라총관부로 대표되는 원의 관부를 설치하고, 몽골은 제주 지배를 위해 다루가치와 몽골군대를 파견하였다. 다루가치(達魯花赤 Darughachi)는 몽고제국에서부터 원조(元朝)에 걸친 시기에 있어서의 행정·군사상의 중요한 관직이었다.
    1276년(충렬왕 2) 몽골은 몽고마 160필을 제주 성산읍 수산평에서 기르면서 원의 14개 목장의 하나로 본격적인 탐라목장 경영에 나서면서 마필사육 전문가인 牧胡를 직접 제주에 파견하였다. 『元史』에는 원대의 여러 목장 중에 탐라목장을 가장 수위로 기재할 정도로 그 중요성은 대단하였다. 몽골은 죄인이나 도둑들을 제주로 유배 보냈고, 원을 이은 明은 제주도로 원실족속(元室族屬)을 유배시킨다.
    또한, 몽골의 마지막 황제인 토곤 투무르칸(順帝)은 명나라에 밀리면서 그들의 피난궁전을 제주도에 건립하는 구상을 하였다. 중국의 25사 중에 유일하게 원사에서만 고려, 탐라, 일본을 병렬하여 열전을 두고 있다. 이는 그만큼 몽골에서 탐라를 중요시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제주와 몽골과의 관계로 제주에는 몽골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의 후손들은 조선후기까지도 제주에 거주하면서 본관을「大元」이라 칭하였다. 본관을 ‘大元’이라 기재하는 제주의 성씨 중 제주읍지류에는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 등 10성이 나타나지만, 여러 자료 등에는 홍(洪), 좌(佐) 등 몇 개의 성씨가 추가적으로 나타난다.
    제주에 거주하던 몽골인 후손들은 조선후기 호적중초에 그들의 본관명(本貫名)으로 ‘대원(大元)’이라 기재하고 있었다. 이는 몽골의 후손들이 오랜 기간 동안 그들 나름의 정체성을 고수해오다가 19세기 초에 이르러‘대원’이라는 본관명을 스스로 버리면서 제주인들과 동일한 본관명을 취하여 나갔다.
    본 연구에서는 호적중초에서 ‘대원’ 본관명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모두 찾아내어 이들의 성씨, 직역, 혼인양상, 가계의 변화 등을 추적함으로써 조선후기 제주사회에서의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1801년을 전후해서 제주사회의 신분변동이 크게 동요되는 가운데, 본관을 ‘대원’이라 기재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본관을 버리고 어떠한 본관 명칭을 취하는 지를 밝히고, 나아가 그들의 신분적 변화를 고찰한다.
  • 한글키워드
  • 탐라,大元,동성리,제주,호적중초,홍,좌,진,주,송,장,정,康,姜,초,석,이,성씨 : 조,신분,직역,금물로리,중문리,本貫,몽골,고려,조선후기
  • 영문키워드
  • dongseongri,Hojeokjungcho,Bongwan(family origin),daewyon,mongolia,end of Joseon,jung,kang,kang,cho,suk,lee,family name : jo,social position,official work,Koryo,Tamra,Jeju,hong,jwa,jin,joo,song,jang,jungmunri,geomulnori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제주도는 1273년(원종 14)부터 1374년(공민왕 23)까지 100여 년 간 원나라의 직·간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즉, 세계대제국 건설을 위해 일본침략을 도모하던 원나라는 제주에서 대몽항쟁을 전개하던 삼별초를 토벌하고 제주를 원의 관할로 삼았다. 그후 100여 년간 제주에는 원나라에서 건너와 정착한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들이 제주로 건너오게 된 구체적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나라가 제주를 통치하기 위하여 탐라총관부(耽羅總管府) 등의 관부(官府)를 설치하였는데, 다루가치 등의 통치자, 제주인들을 억압하기 위한 군인들이 제주에 건너왔다. 둘째, 원나라는 1276년(충렬왕 2) 제주에 말을 키우기 위한 목장을 설치하였다. 목장의 말을 관리하는 전문 마필사육자들을 목호(牧胡)라 칭하였는데, 이들이 제주로 파견되어 왔다. 셋째, 원은 죄인 뿐만 아니라, 왕족들까지 제주에 유배시켰으며, 명나라는 원의 황실가족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따라서 유배인으로 제주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넷째, 원이 명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원나라 군대의 일부는 명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제주로 건너와 정착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제주에 건너온 그들의 후손들은 본관을「대원(大元)」이라 칭하였다. 제주읍지류에는 본관을 대원이라 칭한 성씨들로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씨 등 10개 성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성씨들은 제주가 원나라의 관할하에 있을 때는 제주인을 대상으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였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이들은 조선전기까지도 나름대로 제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에서는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이 조선후기 제주지역 호적중초자료를 통해 분석하였다. 즉,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매 3년마다 작성된 호적중초 자료에서 본관이 ‘대원’으로 기재된 사람들의 정보를 분석함으로써 몽골인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를 파악해 보았다. 그 결과 10개 성씨 외에도 차(車), 강(康), 좌(佐)씨 등이 대원을 본관으로 하고 있었음을 추가로 확인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점차 ‘대원’ 본관은 사라지지만, 일부의 성씨는 19세기 후반까지 ‘대원’ 본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문 분석을 통해서 볼 때, ‘대원’ 본관을 지속해 가는 가문의 경우에 교노(校奴), 답한(畓漢), 아병(牙兵), 모군(募軍), 과직(果直), 군두(群頭), 석장(席匠) 등의 직역(職役)을 칭하고 있었다. 이들 직역은 신분적으로 매우 열악한 계층들로 19세기 몽골인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 상승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부의 가문은 ‘대원 강씨(大元姜氏)’를 ‘진주 강씨(晋州姜氏)’로 바꾸는 등 ‘대원’ 본관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대원 본관에서 벗어남으로써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행위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의 19세기 존재형태는 사회적 지위가 낮았음을 의미한다.
  • 영문
  • Jeju island was under the direct and indirect reign of Yüan for over 100 years from 1273 A.D. (Wonjong 14) to 1374 A.D. (King Kongmin 23). During this period, some people of Yüan established in Jeju island as a ruler, a soldier, a herder, and an exile. Their descendants called their places of origin 'Daewon' (Great Yüan). In the journals of Jeju town, we can recognize some last names such as Jo (趙), Lee (李), Seok (石), Cho (肖), Kang (姜), Jung (鄭), Jang (張), Song (宋), Ju (周), Jin (秦). I examined the last names which has their origin places as 'Daewon' in the family registers of Jeju of late Chosun Dynasty. As a result, some last names such as Cha (車), Kang (康), Jao (佐) are added. In the 19th century, the origin places of Daewon gradually disappeared, but until the latter half of the 19th century some last names maintained their origin places of Daewon.
    In light of the analysis of some family clans which continued to keep their origin places of Daewon, those family clans assumed the positions of Kyono (校奴), Daphan (畓漢), Abyoung (牙兵), Mokun (募軍), Gaojik (果直), Kundu (群頭), Seokjang (席匠), etc. and had difficulty in elevating their social status. Some of the families changed their origin places of Daewon into Jinju Kang (晋州姜氏) and tried to throw away their origin places of Daewon. This means that even in the 19th century the last names, which has the origin places of Daewon, were low in social standing.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제주도는 1273년(원종 14)부터 1374년(공민왕 23)까지 100여 년 간 원의 직·간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에 원의 많은 사람들이 제주로 건너와서 정착하였다. 그 구체적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은 제주를 통치하기 위하여 탐라총관부(耽羅總管府) 등의 관부(官府)를 설치하였는데, 통치자 및 군사의 일원으로제주에 건너왔다. 둘째, 원이 1276년(충렬왕 2) 제주에 목마장을 설치하면서 마필사육 전문가인 목호(牧胡)들이 파견되어 왔다. 셋째, 원은 죄인 뿐만 아니라, 왕족들까지 제주에 유배시켰으며, 명나라는 원의 황실가족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넷째, 원이 멸망한 후 몽고군대의 일부는 명(明)의 신민(臣民)이 되는 것을 반대하여 제주로 건너왔다.
    이러한 연유로 제주에 건너온 그들의 후손들은 본관을「대원(大元)」이라 칭하였다. 제주읍지류에서는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 등 10개 성씨가 확인된다. 본 연구에서는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이 조선후기 제주지역 호적중초자료를 통해 분석하였다. 그 결과 차(車), 강(康), 좌(佐)씨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점차 ‘대원’ 본관은 사라지지만, 일부의 성씨는 19세기 후반까지 ‘대원’ 본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문 분석을 통해서 볼 때, ‘대원’ 본관을 지속해 가는 가문의 경우에 교노(校奴), 답한(畓漢), 아병(牙兵), 모군(募軍), 과직(果直), 군두(群頭), 석장(席匠) 등의 직역(職役)을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회적 지위 상승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부의 가문은 ‘대원 강씨(大元姜氏)’를 ‘진주 강씨(晋州姜氏)’로 바꾸는 등 ‘대원’ 본관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이 여러 가지로 19세기에 이르러서도 사회적 지위가 열악하였음을 의미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00여 년 간 원나라의 직·간접적인 관할에 놓여 있던 제주도에는 원나라에서 건너온 후손들이 본관을「대원(大元)」이라 칭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호적중초 등 각종 자료에 의하면,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 차(車), 강(康), 좌(佐)씨 등이었다. 19세기까지도 이들의 일부는 ‘대원’ 본관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이 활용할 수 잇는 기초자료가 된다.
    1) 제주도에서 몽골의 잔재를 19세기 자료 등에서 확인되고 있는 점에서 제주도와 몽골의 관계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다.
    2) 제주문화에서의 몽골문화 요소 파악, 제주 문화와 몽골 문화를 비교 연구해 나갈 수 있는 역사적인 기초 자료를 제공하게 된다.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관장 오승언) - 몽골국립자연사박물관과 학술교류 양해각서가 체결(2006. 08)된 상황에서 : 제주와 몽골의 민속문화 비교 조사, 몽골의 지형 및 경관 자원 조사, 몽골의 동식물 조사 등이 추진될 수 있다.
    3) 제주와 몽골간의 교류 확대가 추진되는 현 상황 즉, 제주도의 (사)방성문화원은 2006년 9월 25일 몽골의 차가인 교육문화과학부장관과 문화교류와 사업을 위한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향후 양국간에는 몽골의 날, 제주의 날 지정 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한류의 기반 조성
    4) 몽골에서 추진하려는 몽골문화원 제주 건립을 더욱 촉진 시킬 수 있을 것이며, 몽골과의 문화교류와 국제문화관광 네트워크 확대 추진에 기여할 것이다.
    5) 제주대학교와 몽골국립대학교 학술교류협정 체결(2006. 05. 09)되어 있어서 몽골 유학생들에게 한몽문화, 제주와 몽골과의 역사문화적 교류 특강 등을 통한 몽골연구자들을 양성하는 인력양성에 활용한다.
    6) 몽골 멸망 후 사라져 버린 한 · 몽역사의 복원
    세계대제국 건설에 실패한 이후, 몽골이 멸망함으로써 한 · 몽역사는 상실되었다. 따라서 칭기스칸 후손들이 600여 년간 제주에 살아온 흔적을 마을단위에서 작성된 호적중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릴 그들의 존재를 찾음으로써 잃어버린 한·몽 역사를 복원하는 데 기여한다.
  • 색인어
  • 탐라총관부, 대원(大元), 본관, 직역, 호적중초, 금물로리(사계리), 동성리(안성리), 덕수리, 하모슬리,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 차(車), 강(康), 좌(佐), 가계도, 강순완, 강도창, 강봉주, 강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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