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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한국기병전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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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전문연구인력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2-075-A00008
선정년도 2002 년
연구기간 3 년 (2002년 09월 01일 ~ 2005년 09월 01일)
연구책임자 이홍두
연구수행기관 홍익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한국사에서 軍制史의 연구 범위는 군사조직과 군역의 문제로 한정할 수 있지만 軍事史는 전사, 전략전술, 병기기술, 관방의 문제까지 포괄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학계는 군제사에 역점을 두어 연구한 결과 전략전술과 전사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북방유목민족인 거란, 여진, 몽고, 청 나라와의 관계였기 때문에 대외관계사 분야에서 다루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먼저 대당전쟁에서 사용한 신라의 기병전술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고려왕조가 북방이민족과 전투에서 사용한 기병전술을 고찰하며,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4군6진의 개척과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통해 나타난 기병전술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 기대효과
  • 고려시대는 중국의 五代를 거쳐 송, 요, 금, 원, 명이 빈번히 교체되는 시기였다. 정세변동에 따라 당시 고려는 두 나라와 동시에 조공관계를 맺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타율적인 韓國史像을 세우는데 이용되었다. 해방 이후 학계의 과제는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결과 북방민족과의 전쟁은 북진정책 내지는 농경지 획득의 문제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조공, 책봉관계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우리 나라의 經騎兵과 重裝騎兵에 대한 일련의 軍事史 연구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것으로 본다.
  • 연구요약
  • 韓民族은 북방의 유목기마민족을 상대로 정복전쟁을 끊임없이 수행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각 왕조와 관련해서 기병전술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당 나라 기병전술까지 고찰 대상으로 한다. 고려시대는 10세기말부터 11세기초까지 거란과 30년간의 전투를 다루고, 다음으로 11세기부터 12세기초까지 동북면 일대를 침략한 여진족과의 전투를 고찰하며,13세기 중엽부터 40년간 진행된 몽고와의 전쟁 그리고 13세기 후반의 왜구와의 전투를 다루려 한다. 조선초기는 4군6진의 설치 문제로 인한 여진족과의 전쟁을, 조선후기는 양란을 중심으로 한 기병전술의 문제를 연구하려고 한다.
  • 한글키워드
  • 騎兵軍團,三手兵法,기효신서,陣法,火包,重裝騎兵,經騎兵,기병전술,북진정책,몽고족,여진족,거란,전략전술,주제어 : 나당전쟁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고구려의 대외전쟁과 기병전술은 고구려 後漢전쟁과 曹魏전쟁으로 구분된다. 고구려는 城에 의거한 ‘守城戰法’으로 후한의 속전속결전법에 대응했다. 이는 방어에 치중다가 적군이 후퇴하면 騎兵으로 추격하는 전술이다. 고구려 曹魏전쟁은 步騎 2만으로 魏軍 3천명을 죽이고, 梁貊之谷에서 또다시 3천명을 살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동천왕은 鐵騎兵 5천으로 추격하였지만 관구검이 方陣을 치고, 좌우 산꼭대기에 弓手를 매복시켜 鐵騎兵을 격파하였다. 2차전쟁에서 毌丘儉은 10월에 丸都城을 함락하고 계속 추격하자, 동천왕은 竹嶺에서 위기를 맞았다. 이때 동부사람 密友가 騎兵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추격을 늦추었고, 紐由는 적장을 죽임으로써 魏軍에게 승리하였다. 이처럼 고구려와 중국 한족간의 기병의 차별성을 통해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東北工程’프로젝트가 크게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연은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데, 기병을 주력군으로 편제하였다. 모용황은 342년에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고구려는 평탄한 북쪽길과 험한 남쪽길이 있었는데, 모용황은 남쪽길을 선택하여 환도성을 함락했다. 399년에는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켰다. 신성의 지형이 평지였기 때문에 고구려가 패배했다. 수나라는 네번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고구려는 그때마다 수성전으로 맞섰다. 결국수나라는 을지문덕의 매복작전에 걸려 패배했다.
    고려 거란전쟁은 993년, 1010년, 1014년 세 차례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모두 승리하였다. 봉산 전투는 개활지가 많았기 때문에 진격과 후퇴가 자유로운 거란 기병이 승리하였다. 거란 소손녕은 청천강을 건너 안융진을 공격하였다. 서희는 거란에게 사대한다는 조건으로 강동 6주를 할양받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삼수채 전투는 거란 성종이 이끈 20만 군대와 고려 강조에게 소속한 30만 출정군이 부디친 전투다. 초기전투는 劒車를 앞세운 강조의 군대가 우세하였지만, 작전을 소홀히 한 결과 야율분노가 이끄는 기병돌격대의 기습을 받고 패배하였다. 삼교천 전투에서는 상원수 강감찬이 삼교천 상류 물을 저장해두고, 강건너 쪽에 기병 1만 2천을 매복시킨 다음, 거란군이 삼교천을 건느려고 할 때 둑을 터트려 크게 승리하였다. 금교역 전투에서는 강민첨과 조원이 크게 승리하였다.

    고구려에서 시작된 수성전술은 고려왕조에서도 계승되었다. 그러나 조선초기 야인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선제 공격하는 속전속결전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또다시 수성전술로 복귀했는데, 그것은 권율의 행주대첩에서 알 수가 있다.

  • 영문
  • Wars in Goguryo and its Cavalry Soldier Strateg can be divided into two phases. Goguryo-Huhan wars and in Goguryo-Jowi wars. Goguryo responded to Huhan's 'Fast Attack, Quick Win' with 'Castle Keeping'. It is the strategy to focus on defense until the enemy's retreat and chase them with cavalry soldiers when the enemy retreats. The wars between Goguryo and Jowi wars Goguryo killed 3,000 Wi soldiers with 20,000 cavalry soldiers, and killed or captured 3,000 soldiers in Yangmaekjigok. Although King Dongcheon chased them with 5,000 cavalry soldiers Gwangugeom defeated Goguryo cavalry soldiers by implementing battle arrays and attacked for ambush with archeries.In the second war, Gwangugeom chased King Dongcheon after winning Hwando Castle in October. King Dongcheon met the biggest crisis in Jukryeong. Miru delayed the chasing with a death defying corps with cavalry soldiers and Yuyu killed the enemy officer. Thanks to those two patriots Goguryo could defeat Wi soldiers. Additionally, they had plenty of food. We could confirm that the 'Dongbukgongjeong' project was highly distorted to include Goguryo in Chinese History through the differentiation of cavalry soldiers between Goguryo and China.

    Jeonyeon was the first regime founded by Seonbijok. From the tactical aspect, it meant that the main force switched from chariots pulled by horses to cavalry riding the horses. Moyonghwang of Jeonyeon invaded Koguryo in 342. At that time, Koguryo could be reached through the plane northern route or through the rugged narrow southern route. Moyounghwangdeployed his main force in the southern route defended by 15,000 weak soldiers rather than the northern route guarded by 50,000 elite troops, and took Hwando-seong. Moyongseong, the king of Huyeon attacked Koguryo in 399 and fell Sin-seong and Namso-seong. The main reason for the defect of Koguryo's army was that Sin-seong was in an open land where the cavalry and chariot units carried out united operations. The Sui Dynasty invaded Koguryo four times. Outnumbered, the Koguryo army responded through defensive strategies behind the wall. The first confrontation was at Ogol-seong. At that time, Koguryo army attached Sui's military supply units that transported munitions. In addition General Euljimundeok's won the battle through an ambush strategy.


    Koryo’s Wars against Georan were three wars in 993, 1010 and 1014 and Koryo won all of them. Because the Bongsan Battle was fought in an open field, Georan cavalry, which was free in advancing and retreating, defeated the Koryo force. So Son‐nyeong in Georan crossed the Cheongcheon River and attacked Anyungjin. In the Samsuchae Battle, a force of 200,000 led by King Seongjong of Koryo collided with 300,000 soldiers under the command of Gang Jo in Koryo. Gang Jo’s force with sword chariots at the head was predominant at the beginning of the battle but, as it was neglectful of strategies, the army was defeated by the surprise attack of a cavalry raiders led by Yayulbunno. In the Samgyocheon Battle, General Gang Gam‐chan dammed off the flow of the Samgyo River, ambushed 12,000 cavalry soldiers on the opposite side of the river, and burst the dam when the Georan force was going to cross the Samgyo River. This tactic ended up in a sweeping victory. In the Geumgyoyeok Battle, Gang Min‐cheom and Jo Won beat off Georan forces.
    Castle Keeping' is on the torched to Koryo from Goguryo. But the strategy change from 'Castle Keeping' to 'Fast Attack, Quick Win' when attacked 여진 in the early years of the Joseon dynasty. The return to 'Castle keeping' at the time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we could confirm that Hyeong Battle of Kwon-Ryul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대륙의 한족과 유목민족 및 일본과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였다. 말을 이용한 전쟁은 그 역사가 매우 길다. 수레에 말을 채우면 車騎가 되고, 사람이 말 등에 타면 騎兵이 된다. 기병과 관련한 전술은 평지에서의 공격적인 속전속결전과 城에 의지해 방어하다가 적에게 틈이 보이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는 守城戰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대부분 유목민족의 전술이고, 후자는 농경민족이 사용하며, 고구려와 같은 반농반유목국가는 양자를 겸하게 된다.
    고구려는 대륙의 후한과 전, 후연, 수, 당과 요동을 사이에 두고 여러 차례 전쟁을 수행했다. 고구려는 처음 요동에서 속전속결전으로 전쟁을 시작했지만, 점차 압록강으로 유인하여 수성전으로 승리하였다. 이때 유목민족은 성을 지나치기 때문에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당나라는 성을 함락하는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결국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었다.
    고려는 건국에서 왕조가 교체할 때까지 거란, 여진, 몽고 등 북방유목민족과 여러 차례 전쟁을 하였다. 특히 거란과는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 전쟁을 수행했는데, 개활지에서 전개된 1차전쟁의 봉산전투는 거란이 승리했고, 2차전쟁의 통주 삼수채 전투는 검차를 앞세운 강조의 군대가 초기 전투에서 유리하였으며, 3차전쟁인 흥화진의 삼교천 전투는 강감찬이 기병 1만 2천명을 매복시켜 승리하였다.
    조선초기의 병법은 문종 때 확립된 陣法체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진법은 북방유목민족에게 대항하기 위해 기병을 주력군으로 하되, 활과 화기 등 장거리 무기를 결합한 기병 중심의 전술체계다. 그런데 명종대 이후 진법체제는 制勝方略制로 전환되었는데, 제승방략제는 적의 침략이 있으면, 병력이 지정된 곳으로 집결하고,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하여 지휘하는 체제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은 대군이 침공할 때는 실전에 적용할 수 없는 제도였다.
    임진왜란 초기 신립의 탄금대 전투의 패배와 권율의 행주대첩은 외형적으로 볼 때 조선전기 진법체제의 군사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전술적 입장에서 살펴보면, 북방유목민족을 상대로 한 弓矢를 가진 기병 중심의 五陣의 전투대열이 城에 의지한 '先守 後戰'의 守城戰으로 개편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신립이 요새지인 조령을 마다하고 탄금대에 진을 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조선의 주력군은 기병이었기 때문이다. 조령은 기병에게 필패의 지역이었다. 탄금대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총부대를 3개로 나누어 선봉대에 배치함으로써 일본군의 장기인 근접 백병전을 크게 향상시켰다.
    근접 백병전에서 일본군을 제압한 것은 명군의 절강병법이었다. 절강볍법은 평양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명의 유격 낙상지는 화포와 火箭 을 발사하여 연기와 화염으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한 다음, 방패와 장창을 이용해 성을 올랐다. 조선 병사 이일은 낙상지와 함께 함구문을 격파하였고, 기병을 이끌고 성 밖으로 도망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평양성 전투 이후 1월 27일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은 벽제에서 전투를 했는데, 일본군이 승리함으로써 경기 이남 지역을 장악하였다. 조선 근왕군은 5월 용인전투에서 패배했는데 패배이유는 평지에서 전투를 치렀기 때문이다. 이에 권율은 12월 수원의 독산성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여기서 守城戰의 장점을 확인하고 1593년 2월 12일 권율은 처영의 승군 등 2천 3백여 명을 이끌고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일본군은 조총대, 기사대, 화포대를 구성하여 공격했지만, 조선군은 왜군을 성책 앞까지 유인하여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각종 화포를 연달아 쏘니 일본군이 마침내 퇴각하였다. 따라서 행주대첩 이후 조선의 기병전술은 수성전이 기본이 되었다고 하겠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의 주제는 한국기병전술연구이다. 연구는 3년동안 수행하였는 바 1년차에는 두 편의 논문을 작성하였다. 한 편은 2004, <고구려의 대외전쟁과 기병전술-특히 漢族과의 전쟁을 중심으로><<백산학보>>68호이고, 또 한편은 2004, <고구려의 선비족전쟁과 기병전술-특히 전연, 후연, 수전쟁을 중심으로><<사학연구>>75호이다. 앞의 논문은 고구려와 후한, 조위전쟁을 통해 고구려의 기병전술울 연구하였고, 뒤의 논문에서는 고구려와 북방유목민족 선비족과의 전쟁에서 고구려 기병전술의 독자성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독자성은 선수 후전의 수성전을 지칭한다.
    2년차에는 한 편의 논문을 작성하였다. 2005, <고려 거란전쟁과 기병전술><<사학연구>>80호이다. 여기서는 고려 거란전쟁을 통해 고려 기병전술을 검토하였다. 먼저 993년에 있었던 고려 거란 1차전쟁은 봉산군 전투와 안융진 전투로 구분되는데, 개활지인 봉산군 전투에서는 고려가 패했지만, 안융진 전투에서는 승리하여 서희가 강동 6주를 할양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1010년에 있었던 고려 거란 2차전쟁은 강조의 30만 출정군과 당 현종의 20만 대군이 맞붙었는 바, 초기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처음의 승리에 자만하여 패배하였다. 특히 검차를 기병전술에 활용한 전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1018년의 고려 거란 3차 전쟁은 강감찬이 삼교천 상류의 물을 이용해 1만 2천의 기병을 매복함으로써 대승을 거뒀다.
    3년차 연구는 2006,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기병전술><,동학연구>>에 게제예정이다. 논문의 목차는 1, 탄금대 전투와 조선군의 기병전술, 2, 평양성 수복과 조선군의 기병전술, 3, 행주성 전투와 조선군의 기병전술이다. 여기서는 먼저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 진을 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당시 조선군의 주력이 기병인 사실에서 찾았다. 당시 조선 기병은 弓矢와 騎射의 능력에서 뛰어났지만, 일본군은 이미 조총을 소유함으로써 근접전에서 크게 유리한 실정이었다. 다음으로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을 통해 조선군의 기병전술을 고찰했다. 명군은 근접전 병기를 이용해 성문을 격파하는데 공로가 많았고, 조선 기병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끝으로 행주 대첩을 통한 기병전술을 고찰했는데,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은 성에 의지한 수성전을 기본 전술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 색인어
  • 기병전술, 고구려 후한전쟁, 수성전, 고구려 선비족전쟁, 고구려 수당전쟁, 고려 거란전쟁, 봉산전투와 안융진 전투, 삼수채 전투, 검차, 강감찬 장군, 진법체제, 제승방략제, 임진왜란, 신립의 탄금대 전투, 행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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