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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義城縣의 줄다리기를 통해본 고을축제의 정치성과 문화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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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선도연구자지원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4-041-A00089
선정년도 2004 년
연구기간 1 년 (2004년 12월 01일 ~ 2005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한양명
연구수행기관 국립경국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전근대사회의 연행민속을 연구하는 이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당시의 민속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한반도의 중남부지역에서 가장 보편적인 축제놀이로 전승되었던 줄다리기만 하더라도 실록을 비롯한 정사 자료에서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고 기껏해야 19세기 이후의 歲時記나 몇몇 地方誌에 실린 몇 줄의 소개글을 통해서 그 편린을 살펴보는데 만족해야 할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19세기의 문인이자 관리였던 玉垂 趙冕鎬(1804 ~ 1807)의 문집, 『玉垂集』에 담긴 연행민속, 특히 민속놀이에 관한 詩文은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의 시문에는 그가 현감으로 재직했던 경북 의성현의 관아가 있는 邑治에서 1857년에 축제의 일환으로 벌였던 대규모의 줄다리기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게 제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石戰과 돈치기 등 여타 놀이에 대한 정보도 상당량 실려 있다.
    논의를 줄다리기로 좁히면 그는 律詩 형태의 索戰歌 여덟수, 총 268자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857년 줄다리기의 전말을 담은 장편의 설명문인 索戰解를 남겼다. 이 자료를 통해서 적어도 19세기 중엽, 의성현의 읍치를 배경으로 벌어진 줄다리기의 전체과정과 전승집단에 대한 이해를 가능해졌다. 또한 대동놀이를 중심으로 벌어진 고을 단위 새해맞이축제의 존재양상과 祝祭性의 실체, 그리고 官民이 함께 꾸려간 읍치의 축제문화를 일정하게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자는 옥수 조면호가 남긴, 놀이와 축제관련 시문의 민속지적 가치에 처음 주목한 이로서, 이 연구를 통해 우선 다음과 같은 사항을 밝히려고 한다.
    첫째, 고을축제의 흐름과 구성요소를 파악하고 축제의 중심적 연행(main performance)인 줄다리기의 전체과정을 소상히 밝힌다. 줄다리기의 경우, 편의 구성과 줄의 제작, 줄의 운반, 줄다리기과정, 줄의 처리 과정, 승부에 부여된 占歲的 意味, 공동체제의와 줄다리기의 관계 등을 파악할 것이다.
    둘째, 공동체제의에서 줄다리기로 이어지는 축제의 과정에서 官(지방관과 아전)과 民의 관계 및 역할을 파악하고 축제운영의 체계를 드러냄으로써 전승과 연행의 정치적 배경과 의미를 읽어낼 것이다.
    셋째, 공동체제의와 줄다리기의 유기적 관련 속에서 벌어진 새해맞이축제의 맥락 속에서 행위주체들의 체험양상을 분석함으로써 고을단위 축제의 축제성 구현의 방식과 문화적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 기대효과
  • 1) 학문발전에 대한 기여
    첫째, 이 연구는 19세기 중엽, 의성현에서 벌어진 고을축제의 운영체계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관과 민의 상이한 정치적 문화적 입장을 해명함으로써 전통축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것이다.
    둘째, 지역사와 민중생활사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었지만 비일상적 영역에서 진행된 축제 및 놀이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연구는 하나의 사례연구로서 지역사 및 생활사 연구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 연구를 통해 제의와 탈춤 뿐만 아니라 대동놀이 역시 아전들의 기획 하에 이루어졌다는 점이 밝혀짐으로써 읍치문화에서 아전의 역할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최근에 이르러 고을축제가 무당들의 연행을 중심으로 하는 ‘무당굿형’과 줄다리기를 비롯한 대동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대동놀이형’의 두 유형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대동놀이형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실증적 근거가 미약한 게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857년 의성현의 사례는 대동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고을축제의 전개과정과 성격을 명료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을축제의 존재양상을 해명하는 데 상당히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섯째, 그 동안 전근대사회의 줄다리기에 대한 연구는 사료의 빈곤으로 거의 포기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번의 자료발굴과 연구를 통해 19세기 중엽에 연행된 줄다리기의 제 과정이 밝혀짐으로써 전근대 줄다리기의 존재양상을 파악하게 되었다.

    2) 지역발전에 대한 기여
    조사연구의 대상지역인 의성군은 경상북도의 중북부 내륙에 위치한 인구 7만의 낙후한 농촌지역이다. 이 지역에서는 격년제로 ‘의성군민화합대축제’를 군민의 날인 10월 9일에 개최하고 있다. 이 축제는 전통문화적 자원을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축제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의성군 당국에서는 나름대로 전통적 축제자원을 찾아왔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해 지난 20년 동안 관성적이고 요식적으로 축제를 개최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연구는 160여년 전에 벌어진 의성지역 전통축제의 원형을 제시함으로써 지역축제를 정체성과 경쟁력을 갖춘 전통축제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지금까지, 20세기 이전의 대동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고을축제와 줄다리기의 존재양상은 미궁인 채로 남아 있었다. 기껏해야 20세기 초반의 축제와 줄다리기를 기억하고 있는 제보자들에 대한 면담조사를 통해 그 이전 시기의 존재양상을 추론해보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면호의 詩文이 발굴됨으로써 전근대사회의 줄다리기와 읍치를 배경으로 하는 고을단위 축제문화의 존재양상을 파악하는 단초를 마련할 있게 되었다. 본연구에서는 조면호가 남긴 索戰歌 와 索戰解를 바탕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첫째, 색전가와 색전해를 정확하게 번역, 저본으로 삼아 1857년 당시의 새해맞이축제와 줄다리기의 연행양상을 재구성한다. 이때 줄다리기가 벌어진 의성 현지에 대한 인문지리적 조사를 통해 축제와 놀이의 공간 및 놀이집단의 구성과 활동의 내용을 파악할 것이다. 또한 여타의 문헌 및 구전정보에 대한 접근을 통해 텍스트의 사실성을 제고할 것이다.
    둘째, 19세기 중엽, 의성 사회의 동향을 지배체제의 작동방식과 관의 움직임을 통해 파악하고 지방관과 아전이 줄다리기를 비롯한 고을축제에 개입하게 된 배경과 그 정치적 의미를 읽어볼 것이다.
    셋째, 고을축제에 참여하는 주민의 입장에서 축제성을 해명하고 그들이 체험한 축제성의 요체인 大同의 양상을 파악함으로써 축제체험이 갖는 문화적 의미를 읽어볼 것이다.
  • 한글키워드
  • 옥수 조면호,색전가,문화적 의미.,축제성,색전해,아전,대동,공동체제의,줄다리기,고을축제,지방관,축제체험,정치성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옥수 조면호가 남긴 <삭전가>와 <삭전해>는 19세기의 고을축제와 줄당기기의 존재양상 및 성격을 파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료이다. 이 자료를 통해 고을을 배경으로 벌어진 축제와 그 중심적 연행인 줄당기기의 존재양상 및 성격, 그리고 문화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1858년, 의성현의 읍치에서 벌어진 고을축제는 제석의 나례로부터 입춘제를 거쳐 대보름 다음날의 줄당기기까지 이어졌으며, 특히 줄당기기는 축제의 절정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석의 나례는 공리가 주관하였고 화룡제와 곡점을 위주로 한 입춘제는 호장이 여러 아전들을 거느리고 거행하였다. 한편 줄당기기는 암줄인 남부와 숫줄인 북부로 편을 갈라 진행하였다. 읍치의 밖에서 만든 줄을 운반하는 과정은 노래와 춤, 그리고 풍물이 함께하는 길놀이로서 ‘거리의 축제’에 다름 아니었고 이런 양상은 다른 길놀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인 줄당기기는 해가 진 뒤에 능파정에서 벌어졌다. 줄이 도착하면 먼저 줄고사를 올리고 각종 앞놀이를 펼쳤다. 줄당기기는 앞놀이를 마치고 시작하였는데 모두 놀이에 몰입하여 주위의 눈길이나 일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놀이에 빠져들었다. 승부가 결정되면 이긴 편은 가무를 즐기며 자축하였고 뒤이어 관아 근처의 봉생루에서, 현령이 이긴 편에게 돈과 비단을 내리는 시상식이 있었다.
    1858년의 고을축제가 공식적으로 내세운 축제의 의미는 고을의 안과태평을 주술종교적으로 예측하고 기원하는 데 있었지만, 축제에 관여한 주체들은 각기 상이한 입장을 갖고 있었고, 이 입장을 바탕으로 고을 축제의 문화적 의미가 실현되었다. 지방관은 고을축제를 통해서 민심을 위무함으로써 민정을 안정시키려 하였고, 향리들은 그들과 고을민의 우호적 연대를 확인시키는 한편 그들이 상위에서 고을민을 대표하는 존재임을 납득시키려 하였다. 한편 고을민은, 시공간의 속성과 의미의 변화, 동관의식을 바탕으로 한 축제적 연대, 일상적 차별의 약화와 무화, 언어의 축제화와 축제적 웃음 등을 통해 그들의 축제욕구를 충족하는 한편 지배적 가치들을 상대화함으로써 지방관이나 향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현실의 지배관계를 부정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 영문
  • The Culturall Meaning and Cheracteristics of a County Festival(Koeul Festival) on Viewing Tug-of-war(Juldangkigi) in 1858

    Han, Yang-myeong

    Sakjeunga and Sakjeunhae, which a county magistrate Cho Myun-ho wrote, provide us with reliable intellectual information in grasping the aspects and feature of county festival and tug-of-war in the 19th century. I looked into the aspects, feature and cultural meaning of a festival and tug-of-war of central performance performed in a county.
    In 1859, the festival which had performed in downtown of Uiseong county was composed of the sequence of Nare of the New Year’s Eve, the ritual of the day which signals the arrival of spring, and tug-of-war of the 16th of January. Nare of the New Year’s Eve manege under the supervision of lower official Gongri, and the ritual of the day which signals the arrival of spring was conducted by the town head of Hojang with a large number of petty town officials. On the other hand, tug-of-war was performed with people divided into the southern part of female rope and the northern part of male rope. When people carried the rope made in the outside of downtown, they performed a dance and song, and played the instruments for folk music. It was be nothing but 'street festival' as a parade Gilnori. An earnest tug-of-war was performed around Nyungpajung after the sunset. After the rope arrived there, they held the kosa rites and did various playing of Apnori. People began to do tug-of-war after Apnori, and was absorbed in it as seriously as they disregarded their own safety and others' eyes.
    After win and loss was decided, winners celebrated by themselves with song and dance and county magistrate awarded silk fabrics and money as a prize to them. In 1858, officially downtown festival magico-religiously prayed for the safety and tranquility of a county, but participant in a festival held different standpoints each other. cultural meaning of festival was realized on the base of those different standpoints. The local magistrate tried to stabilized a civil government by consoling the people of county. On the other side lower officials tried to establish friendly relations with county people, and made them consent to be representatives of county people. By satisfying their festival desire and refusing a ruling value through the attribute and meaning of time and place, festival solidarity, the weakness and demolition of social distinction, and the festivalization of language, county people opened the possibility to deny a social ruling relationship in reality.

    key words : 1858, Uiseong county, downtown festival, tug-of-war, petty town official, county magistrate, politics of festival, cultural meaning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옥수 조면호가 남긴 <삭전가>와 <삭전해>는 19세기의 고을축제와 줄당기기의 존재양상 및 성격을 파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료이다. 이 자료를 통해 고을을 배경으로 벌어진 축제와 그 중심적 연행인 줄당기기의 존재양상 및 성격, 그리고 문화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1858년, 의성현의 읍치에서 벌어진 고을축제는 제석의 나례로부터 입춘제를 거쳐 대보름 다음날의 줄당기기까지 이어졌으며, 특히 줄당기기는 축제의 절정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석의 나례는 공리가 주관하였고 화룡제와 곡점을 위주로 한 입춘제는 호장이 여러 아전들을 거느리고 거행하였다. 한편 줄당기기는 암줄인 남부와 숫줄인 북부로 편을 갈라 진행하였다. 읍치의 밖에서 만든 줄을 운반하는 과정은 노래와 춤, 그리고 풍물이 함께하는 길놀이로서 ‘거리의 축제’에 다름 아니었고 이런 양상은 다른 길놀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인 줄당기기는 해가 진 뒤에 능파정에서 벌어졌다. 줄이 도착하면 먼저 줄고사를 올리고 각종 앞놀이를 펼쳤다. 줄당기기는 앞놀이를 마치고 시작하였는데 모두 놀이에 몰입하여 주위의 눈길이나 일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놀이에 빠져들었다. 승부가 결정되면 이긴 편은 가무를 즐기며 자축하였고 뒤이어 관아 근처의 봉생루에서, 현령이 이긴 편에게 돈과 비단을 내리는 시상식이 있었다.
    1858년의 고을축제가 공식적으로 내세운 축제의 의미는 고을의 안과태평을 주술종교적으로 예측하고 기원하는 데 있었지만, 축제에 관여한 주체들은 각기 상이한 입장을 갖고 있었고, 이 입장을 바탕으로 고을 축제의 문화적 의미가 실현되었다. 지방관은 고을축제를 통해서 민심을 위무함으로써 민정을 안정시키려 하였고, 향리들은 그들과 고을민의 우호적 연대를 확인시키는 한편 그들이 상위에서 고을민을 대표하는 존재임을 납득시키려 하였다. 한편 고을민은, 시공간의 속성과 의미의 변화, 동관의식을 바탕으로 한 축제적 연대, 일상적 차별의 약화와 무화, 언어의 축제화와 축제적 웃음 등을 통해 그들의 축제욕구를 충족하는 한편 지배적 가치들을 상대화함으로써 지방관이나 향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현실의 지배관계를 부정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학문발전에 대한 기여

    첫째, 이 연구는 19세기 중엽, 의성현에서 벌어진 고을축제의 운영체계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관과 민의 상이한 정치적 문화적 입장을 해명함으로써 전통축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것이다.
    둘째, 그 동안 지역사와 민중생활사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었지만 비일상적 영역에서 진행된 축제 및 놀이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연구는 하나의 사례연구로서 지역사 및 생활사 연구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셋째, 읍치문화의 운영주체로 새롭게 주목받는 아전의 역할이 그 동안 읍치제의와 탈춤에 국한하여 주목받았지만 이 연구를 통해 대동놀이 역시 아전들의 영도 하에 이루어졌다는 점이 밝혀짐으로써 읍치문화에 대한 아전집단의 역할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그 동안 전근대사회의 고을축제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최근에 이르러 고을축제가 무당들의 연행을 중심으로 하는 ‘무당굿형’과 줄다리기를 비롯한 대동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대동놀이형’의 두 유형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대동놀이형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부족하여 실증적 근거가 미약한 게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857년 의성현의 사례는 대동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고을축제의 전개과정과 성격을 명료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을축제의 존재양상을 해명하는 데 상당히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섯째, 그 동안 전근대사회의 줄다리기에 대한 연구는 사료의 빈곤으로 거의 포기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번의 자료발굴과 연구를 통해 19세기 중엽에 연행된 줄다리기의 제 과정이 밝혀짐으로써 전근대 줄다리기의 존재양상을 파악하게 되었고 적어도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어지는 줄다리기의 전개사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변화의 양상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2) 지역발전에 대한 기여

    조사연구의 대상지역인 의성군은 경상북도의 중북부 내륙에 위치한 인구 7만의 낙후한 농촌지역이다. 이 지역에서는 격년제로 ‘의성군민화합대축제’를 군민의 날인 10월 9일에 개최하고 있다. 축제의 내용을 살펴보면 읍면대항 체육대회와 각종 문예행사로서 ‘운동장축제’ 또는 ‘학예회스타일축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축제는 경제적 기반을 전적으로 관의 예산에 의존하고 축제조직 및 운영도 관에서 전담한다는 점에서 관주도축제의 전형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축제가 전통문화적 자원을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축제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의성군 당국에서는 나름대로 전통적 축제자원을 찾아왔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해 지난 20년 동안 관성적이고 요식적으로 축제를 개최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연구는 160여년 전에 벌어진 의성지역 전통축제의 완형을 제시함으로써 지역축제를 정체성과 경쟁력을 갖춘 전통축제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는 한편 관광매력을 지닌 지역의 문화자산을 풍부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 색인어
  • 1858년, 의성현, 고을축제, 줄당기기, 향리, 현령, 축제의 정치성, 문화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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