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을 주도해 온 형상과 질료의 이분법(고대), 영혼과 육체의 대립(중세), 그리고 정신과 물질의 대립 구도(근대)는 인간의 자기 이해를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위계적 이분법에 근거한 사회적 통제기제와 억압구도를 구조화했다. 근대에 두드러진 주객 이분법은 ...
서양 철학을 주도해 온 형상과 질료의 이분법(고대), 영혼과 육체의 대립(중세), 그리고 정신과 물질의 대립 구도(근대)는 인간의 자기 이해를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위계적 이분법에 근거한 사회적 통제기제와 억압구도를 구조화했다. 근대에 두드러진 주객 이분법은 주체(정신)와 객체(육체)의 대립을 통하여, 주체의 객체에 대한 기술적 조작과 지배를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주체에 대한 도구적 사고와 억압적 실천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조장해왔다.
이러한 사유의 틀은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추상적인 정신주의’와 ‘육체 지상주의’라는 두 극단을 조장한다. 이런 흐름은 육체에서 정신을 분리시켜 육체를 자본화하고, 나아가 생활세계를 통제하고 무력화하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재생산한다. 동양의 지적 전통에서는 서양철학에서처럼 심신 관계의 존재론적 이분법이나 실체적 이원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치론적 측면에서는 명백하게 정신이 육체보다 우선시됨으로써, 육체적 욕구와 감정의 분출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사회철학이 산출되었다.
동양의 고전문헌에서 심신 관계와 관련하여 빈번하게 등장하는 내면(內面)과 외면(外面), 대체(大體)와 소체(小體), 덕(德)과 형(形), 성명(性命)과 형기(形氣) 등의 개념 쌍은 선명한 가치론적 우열 관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우열 관계에 따른 사회적 인식은 존(尊)/비(卑)의 구별, 남(男)/여(女)의 차별, 천리(天理)/인욕(人欲)의 대립과 같은 차별상을 정당화하여 평등을 향한 지향과 자연스런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 상황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하여, 심신 관계를 가치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나아가 바람직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
본 연구의 주제인 ‘심신가치론’(axiology of mind and body)은 다음과 같은 연구를 수행하는 실천철학적 이론이다. 첫째, 심신 관계를 기존의 존재론적 관점이 아닌 가치론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이론이다. 둘째, 기존의 동·서양 철학사에 나타난 다양한 인식론적·존재론적 연구의 성과를 성찰하여 사회철학 및 문화철학의 관점에서 새로운 종합을 추구하는 실천철학적 이론이다.
심신가치론은 한편으로는 정신의 육체에 대한 지배의 기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이 배제된 육체를 특권화하는 경향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고자 한다. 육체의 질서를 거부하는 정신은 추상적이고, 정신의 도야를 거부하는 육체는 맹목적이다. 따라서 심신가치론은 정신과 육체의 대립을 실체화하거나, 어느 한 쪽에 초월적인 가치를 부여하거나, 양자의 이질성만을 강조하거나, 동일성의 이름으로 차이를 제거하려는, 이 모든 시도가 지니는 가치론적 의미와 실천철학적 함의를 조망한다. 나아가 심신가치론은 정신과 육체의 통일체로서 참된 자아를 형성하려는 실천적 노력을 통해 조화로운 인간상을 정초하고자 한다. 또한 다양한 억압의 메커니즘을 통하여 지배와 예속을 산출하고 내면화하는 사회관계를 비판하여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질서를 모색한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기본적인 연구방향은 첫째 기존의 심신관계론에 함축되거나 은폐된 가치론적 함의를 명시적으로 주제화 하고, 둘째 심신 관계를 반영하는 다양한 사회 이론과 현상을 평가할 수 있는 규범적 척도를 이론적으로 모색하며, 셋째 심신관계론의 사회철학적 함의를 밝히고, 더 나아가 사회 현실의 다양한 문제 상황들에 대한 실천적 대안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