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가 설정한 갈등상황의 영역은 생명공학과 종교, 자연과 문화, 미와 가치, 사형제도, 양성평등,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직업과 윤리, 민족간의 갈등, 민족주의와 세계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학비평이다.
연구는 세 분야로 구성된다. 먼저 1) 개인의 차원이다 ...
본 연구가 설정한 갈등상황의 영역은 생명공학과 종교, 자연과 문화, 미와 가치, 사형제도, 양성평등,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직업과 윤리, 민족간의 갈등, 민족주의와 세계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학비평이다.
연구는 세 분야로 구성된다. 먼저 1) 개인의 차원이다.
1-1) 개인과 윤리: 현대사회에서 나는 얼마나 이타적이어야 하는가? 100만 실업시대, 과연 한국의 교육제도 내에 이타주의와 인성교육이 말이 아닌 의미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길은 있을까? 본 연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칸트의 인성교육이 언어가 아닌 의미로 재생될 수 있다면, 도덕과 행복에 대한 그의 이론이 한국 교육의 근원적 틀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나아가 칸트의 미적 의사소통을 통한 배려의 윤리 또한 하나의 가능성이 될 것이다.
1-2) 개인과 제도: 나는 나의 근본적 행복추구권을 어느 정도 제도로부터 요구할 수 있을까? 호주제와 집시법, 촛불시위 등, 아도르노와 겔렌의 논쟁에서 보듯 개인과 제도의 갈등은 다양하다. 해소는 아니더라도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위해 칸트의 사유는 분명 실질적 효용성을 제공해주리라 본다.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 사형제도의 폐지여부에 대해서도, 칸트의 사유는 생산적 논쟁을 위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둘째로 연구는 2) 사회를 대상화한다.
2-1) 인간과 과학: 종교는 생명 공학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배아줄기세포복제는 종교와 과학의 대립에 대한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진화라는 새로운 혁명적 전환기에 서 있는 인류의 현주소를 고려할 때, 생명공학과 관련된 윤리적 갈등문제는 과학이나 종교의 대립 이전에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윤리적 논의를 요구한다 할 것이다. 따라서 현대윤리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칸트사상의 탐구는 하나의 실용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2-2) 인간과 자연: 칸트의 윤리관은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과학지상주의와 생태주의의 대립 항을 넘어서는 제 삼 항을 발견하기 위하여 칸트철학의 재해석을 시도해본다.
2-3) 인간과 성: 칸트에게 양성평등을 위한 대안은 있는가? 성차별과 역차별을 동시에 극복하고 양성의 근원적 공존을 이루는 길은 양성평등에 있다. 따라서 칸트의 성이론은 그의 철학에 관한 새로운 접근이 됨과 동시에 이 문제의 새로운 조명을 가능케 해줄 것이다.
2-4) 인간과 예술: 미학이론 간의 갈등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예술과 외설에 관한 논쟁 등 미학적 갈등과 관련, 칸트는 기본적으로 고전적 입장을 견지한다. 따라서 그의 사상의 자리매김에 대한 연구는, 미학적 담론의 생산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마지막 대상은 3) 거대조직, 즉 국가 내지 민족간의 갈등이다.
3-1) 국가간의 항구적 평화는 가능한가? 전쟁의 현존은 항구적 평화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따라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현대에 지니는 의미를 새롭게 고찰해보는 것은 그 어떤 주제보다도 현실적이라고 할 것이다.
3-2) 칸트는 열린 민족주의의 실천적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가? 세계화가 진행되는 지금 무엇보다 민족적 정통성과 민족들과의 공존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해 줄 이론이 우리에겐 절실히 필요하다. 따라서 자아와 타자의 만남에 대한 칸트의 이론은 세계화를 바르게 정립하려는 현실에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궁극적 지향점은 그러나 ‘갈등의 해소’가 아닌 ‘갈등에 대한 생산적 대안’발견, 즉 최대목표가 아닌 최소목표의 추구에 있다. 이는 연구자들이 자신의 영역에 존재하는 대립의 완화, 내지 갈등 주체들 간의 대화와 이해, 나아가 대립의 중재와 대안 모색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순한 칸트의 반복이 아닌, 그의 비판적 사유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반성역시 지향함으로써, 필요하다면 칸트를 넘어섬으로서 갈등의 이해를 추구하고자 한다. 칸트 스스로도 인정할 것처럼 때론 가장 비 칸트적인 것이 가장 칸트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