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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초기 공론장 형성 및 변화에 관한 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6-332-B00226
선정년도 2006 년
연구기간 1 년 (2006년 07월 01일 ~ 2007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이황직
연구수행기관 숙명여자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민주주의의 심화와 더불어 시민 참여에서 심의적 대화(deliberative dialogue)의 중요성이 점차 강조되고 있다. 많은 이론가들은 점차 증폭되는 이해집단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공론장에서의 숙려와 토론’을 강조한다. 공론장의 활성화는 시민들이 국가와 시장의 고유 논리에서 벗어나 비판적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실질적 기반을 제공한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시민사회론의 발전과 더불어 공론장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 연구 및 응용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 공론장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 문제점이 한국 공론장 형성의 역사성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국 공론장 기능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는 이유로 현 사회구조와 제도, 그리고 공론을 이끌어가는 주체의 책임 등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것의 역사적 조건으로 공론장 형성기에 빚어진 독특한 특성에서 기인하는 이유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연구가 의미 있다면, 근대 서구의 부르주아 사회의 형성 과정에서 기존 헤겔-맑스 전통의 시민사회론이 간과했던 공론 형성의 자율성을 그들의 역사적 맥락에서 발견하고 설명해냈다는 데 있다.
    한국의 공론장을 논의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기초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 공론장의 특성을 밝히기 위한 기초로서 그 성립 초기 참여자들의 의미 세계를 이해하고 이를 당대의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에서 설명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연구 주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근대적 공론장의 형성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한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 물론 문학사와 언론사 분과에서 근대 문학사와 신문·잡지사를 다룬 연구는 많다. 하지만 서구 초기 공론장 역할을 수행하던 커피하우스나 살롱에서 행해진 ‘말’, 즉 토론과 숙의를 위해 주고받는 언어 행위의 실제와 그 의미를 다룬 실증적 연구는 거의 없다. 이러한 상황은 이 연구의 절실한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이 연구는 민주주의 심화 과정에서 중요성이 더해가는 한국 공론장에 대한 이해의 심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그 성립 역사를 사회사의 방법으로 조사하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조사를 토대로 이 연구는 공론장 성립기 참여자들의 의미 세계와 당대 사회적 조건을 연결시키는 체계적인 설명, 초기 성립 이후 정세 변화에 따라 공론장의 성격이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이론적 설명 등을 병행하는 것을 두 번째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연구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근대적 공론장은 언제,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
    둘째, 공론장 형성을 이끈 주도적 참여 세력의 의미 세계는 무엇인가?
    셋째, 성립 이후 정세 변화에 따라서 공론장의 성격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이러한 연구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이 연구는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연구 대상을 제시한다.

    첫째, 애국계몽기를 중심으로 한국의 근대적 공론장이 형성되는 과정을 사회사 및 문화사의 방법으로 조사한다. 공론장으로서 각종 협회에서 활동, 신문 등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근대적 토론’과 ‘연설’과 같은 구어(口語)적 의사소통 양식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과는 달리 그 실제 내용과 형식에 대한 제도적 연구가 거의 진전되지 않은 상태이다. 관련자들의 일기, 자서전, 구술 자료, 당대 방계 자료 등에 대한 면밀한 자료 조사를 통해 토론 참여자와 토론 내용을 복원할 때, 한국 초기 공론장의 실체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둘째, 초기 공론장 형성을 주도한 사회 세력들이 왜 그런 활동을 벌였는지를 그들의 의미 세계의 관점에서 충실히 이해하고자 할 것이다. 훗날 독립운동 세력으로 이어지는 이들 초기 공론장 형성 세력들의 개혁적·의사소통적 사회관을 이해한다면, 이러한 해석적 작업을 통해 한국 공론장이 이미 성립 시기부터 ‘공동체의 정치’라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것이었음을 밝혀낼 것이다.

    셋째, 일제강점기 이후 공론장의 성격이 변화하는 과정을 조사하여 그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한국의 초기 공론장은 성립 과정부터 이미 긍정적 의미의 ‘정치’적 성격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 이후 공론장은 점차 토론 중심에서 활자 매체를 중시하는 운동 세력의 선전 기능을 수행하면서 위축되기에 이른다. 이는 매체의 활성화라는 외적 지표를 통해 설명할 수 없고, 실제 수행 과정에서 공론장 본연의 토론을 통한 공론 형성이 제대로 작동되었는가를 분석할 때 비로소 분석될 수 있다. 이 연구는 일제하 공론장의 성격이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인과 분석을 통해 기존의 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제시할 것이다.
  • 기대효과
  • (1) 연구 결과의 학문적 기여

    ① 공론장 이론의 심화
    서구 공론장의 형성과는 다른 과정을 겪은 한국 공론장의 형성사에 대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공론장 이론의 심화를 가져올 것이다. 첫째, ‘일반 법칙’ 수준에서 볼 때, 서구의 이론과는 다른 한국(및 동양) 사회의 공론장 형성 기제를 밝혀 공론장 이론을 보편 수준에서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다. 둘째, ‘특수 조건’ 수준에서 볼 때, 초기 공론장 형성 및 성격 변화에 대한 연구 결과는 공론장의 구체적인 작동에 대한 다양한 변수들을 발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러한 성과를 통해 현대의 공론장 연구 및 향후 공론장의 유지·심화를 위한 탐색에 기여할 것이다.

    ② 한국 초기 공론장 연구 관심의 촉발 및 사회사 연구의 심화
    한국의 초기 근대적 공론장에 대한 연구 결과를 통해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발굴되면, 이를 통한 다양한 응용 연구가 촉발될 것이다. 우선, 운동사 또는 정치사 중심의 근대사 연구에서 수많은 지식인·민중이 참여하는 토론의 현장에 대한 미시사적 연구 관심이 촉발될 것이다. 또한 한국 공론장의 기원에 대한 학문적 논의를 촉진시켜,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잊혀지기 쉬운 민주적 의사소통이 이미 백여 년 전에 있었다는 자부심과 민주주의 심화에 대한 자신감을 부여할 수 있다. 아울러, 사회사 및 역사사회학 분야의 실제적 성과를 보여 주는 계기가 되어, 향후 이 분야에서 다양한 주제의 연구가 활성화되게 할 것이다.

    (2) 연구 결과의 사회적 기여

    ① 민주주의 심화 과정에서 토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심화
    민주주의 이행(transition)에서 공고화(consolidation)를 향해 나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는 예전과 같은 이념과 전선 중심의 기동전은 갈등 해결에 기여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해서는 토론과 같은 심의적 대화를 통한 시민사회의 주체적 공론 형성 기능이 발전해야 한다. 이 연구를 통해 공론장 초기의 놀라운 ‘토론 능력과 결과’들이 소개된다면, 이를 토대로 한 한국 사회의 토론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 민주주의적 습속의 일상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② ‘독립협회 토론’ 재현(再現)과 같은 문화콘텐츠 개발에 기여
    현재 독립협회 토론은 「독립신문」에 그 논제만 전한다. 이 연구를 통해 당시 독립협회 토론이 채택한 미국의 특정 토론 방식이 발굴된다면, 해당 논제에 대한 당대의 문학작품 등을 토대로 내용을 보충하여 ‘상상적 재현’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최근 한국사 자료들을 토대로 많은 예술 작품들이 생산되고 있는데, 독립협회 토론과 중요한 문화콘텐츠가 제공된다면 문화산업 관련자들이 구한말의 사회를 소재로 한 작품 구상과 생산에 매우 쉽게 다가설 것이다.
  • 연구요약
  • (1) 공론장 이론 검토와 비판적 논의

    ① 공론장 이론 검토
    이 연구는 공론장 논의가 기존의 시민사회론이나 시민운동론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연구 대상이면서, 동시에 공론장의 소통과 공론 형성 기능이야말로 시민사회의 질적 성숙과 도약을 위한 사회적 기초에 해당한다는 논의를 편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통해서 개인들이 사적인 친분이나 이해 관계를 초월해 공중으로 전환하는 서구의 ‘부르주아 공론장’의 기원과 변동의 기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역사적 조건이 다른 서구 공론장의 경험을 아직까지 공론장이 크게 활성화되지 않은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하버마스를 축으로 공론장에 대한 최근의 논의를 연구하고 한국 사회에의 이론적 적용 가능성을 탐색할 것이다. 끝으로 민주주의의 심화(공고화) 단계에 있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바로 의사소통형 참여에 기초한 자유로운 토론과 심의를 습속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검토할 것이다.

    ② 현대 한국 사회의 공론장 논의를 위한 이론틀 점검
    조선시대 공론장이 매우 활성화되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는 것과는 별도로, 그 시대적 한계 때문에 근대적 공론장과의 직접적 연관성을 도출하기는 어렵다. 한국 사회의 공론장 논의를 위한 새로운 이론적 근거는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문화적 조건을 갖춘 중국 현대 사회의 형성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랜킨의 논의를 기초로, 명(明) 후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공론장을 토대로 하버마스의 용법과는 구분되는 중국 한자어 ‘公’에 초점을 맞춘다. 공(公)은 국가(官)와 사회(私)와의 관계 속에서 이들을 관계 맺는 자율적인 영역의 가능성을 탐색할 여지를 던져둔다. 이 연구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편견 없이 전통 사회의 공론 개념이 현대 공론장 논의로 수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하고, 이어서 동양사회 공론장의 특수성을 검토할 것이며, 끝으로 이 과정에서 실제 연구에 필요한 공론장 개념을 분석적으로 재정의할 것이다.

    (2) 근대 한국의 초기 공론장 관련 연구사 검토 및 실증 연구 내용

    ① 초기 공론장 형성 과정
    근대 한국의 초기 공론장의 형성에 미친 ‘독립협회’ 및 그 자매단체의 영향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독립협회는 1896년 「독립신문」 간행, 협성회 및 만민공동회(1897) 등의 토론회 활동 등을 통해, ‘말’과 ‘글’ 두 영역 모두에서 공론장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이 연구는 그동안 운동사와 언론사를 중심으로 연구되어 온 초기 공론장 연구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비공식적 기록 등을 활용하여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구성하고자 한다.

    ② 초기 공론장 참여자의 의미 세계 연구
    초기 공론장 참여자들은 근대적인 정치공동체 건설이라는 명시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참여자들의 의미 세계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때, 그들의 동기 체계는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분열 없이 이 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이 연구는 공론장의 주도적 참여자들의 상징적 의미 체계에서 무엇이 ‘거룩함’의 요소인지를 파악하고, 그들이 변화시키고자 하는 현실이 무엇인지조사할 것이다. 이 작업이 완료되면 이어서 상징 체계의 세부 구성 요소들을 찾아서, 이러한 의례적 장치들이 어떻게 실제로 그들의 외적 차이를 부정하게 하여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하는지를 해명할 것이다.

    ③ 일제강점기 공론장의 성격 변화에 관한 구조적 설명
    1920년대 이후 공론장의 성격 변화는 그러한 대외 변수 외에 민족 내부의 상황 인식의 차이에 의해서도 설명되어져야 한다. 일제 강점 이후 공론장은 점차 토론 중심에서 활자 매체를 중시하는 운동 세력의 선전 기능을 수행하면서 위축되기에 이른다. 이는 매체의 활성화라는 외적 지표를 통해 설명할 수 없고, 실제 수행 과정에서 공론장 본연의 토론을 통한 공론 형성이 제대로 작동되었는가를 분석할 때 비로소 분석될 수 있다. 이 연구는 일제하 공론장의 성격이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인과 분석을 통해 기존의 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제시할 것이다. 공론장 참여자들의 복합적 갈등 상황을 이해하고 이것이 당대 사회 구조라는 제한 조건 내에서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지를 몇 개의 사회적 변수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 한글키워드
  • 사회사,시민사회,토론,조선 사회,독립협회,종교적 상징 체계,한국 사회,심의민주주의,의사소통 문화,공론장
  • 영문키워드
  • Public Sphere,Civil Society,Social History,Religious Symbol System,Tongnip Hyophoe,Korean Society,Chosun Society,Deliberative Democracy,Communicative Culture,Debate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890년대 조선은 동시대 서구와 같은 물질적 조건을 결여한 채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대내적으로는 신분제가 잔존했고 재정은 피폐했으며 개혁을 둘러싼 정파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대외적으로 청, 일본, 러시아 등 외세의 침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국가 존립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상식 수준에서, 이러한 비상사태에서는 국론 분열을 피하기 위해 황제 또는 소수 집단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대한제국)의 황제와 보수파 권신들은 개혁 없는 권력 확대에만 치중하여 개혁은 물론 국권수호조차도 해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 재필과 협성회, 독립협회 회원들은 뜻밖에도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지극히 민주적인 노선을 선택하였다. 시민과 민중이 자발적으로 애국심을 가진 국민으로 거듭나고 그들의 지혜를 모아 국가 정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수천 년간 닫혀 있던 백성의 눈과 귀를 열고 말문을 틔게 하는 것이야말로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선행 조건이었던 것이다. 사회과학의 분석 틀에 비추어 볼 때, 자본주의로의 경제적 전환이 지체되었고 국민국가 형성마저 뒤늦었던 조선의 상황에서 공론장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 없이도 조선에서 지극히 모범적인 공론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위로부터의 권력 획득 없이 아래에서 시민의 참여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서 재필과 그의 협성회 제자들, 그리고 독립협회 회원들이 활짝 펼쳐놓은 토론의 장에서 조선의 백성들은 시민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한국사의 근대는 이처럼 돌연변이와도 같은 신진 세력들의 생각과 마음의 혁신에 의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이 논문은 기존의 독립신문 중심의 공론장 연구 방향을 ‘말’의 공론장 중심으로 전환시켜, 후자의 성과야말로 초기 공론장의 핵심 요소임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특히 협성회 토론회 활동에 주목하여 서구의 수사학과 토론 이론을 기초로 사료의 제약을 넘어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 협성회의 성과가 독립협회의 방향 전환에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었음을 확증하였다. 나아가 이 논문은 서구 근대 공론장의 역사와 이론에 비추어 한국 초기 공론장의 성격과 그 변화 과정에 대한 새로운 설명 논리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토론회 도입 이후의 독립협회는 교양 수준의 문예적 공론장에서 정치적 공론장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는 서구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개척한 공론장은 불과 반년 만에 시민적 성격을 탈각하고 민중적 공론장으로 해소되었다. 언뜻 이러한 해석은 평등한 인간관을 전제로 성립한 공론장이 점차 민중이 주도하는 대중 정치의 장으로 전환된다는 서구 경험의 공론장 발전 이론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토론회 활동 대신 만민공동회 중심으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당시 대한제국의 대내외적 위기라는 상황적 요인과 중추원(상원)을 구성하려던 자연스러운 목표가 좌절되면서 생겨난 급박한 정치 투쟁의 요구가 개입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서 재필과 협성회, 독립협회 회원들이 꿈꿨던 공론장의 이상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현실화되지 못했다. 인터넷의 발전, 전국적인 방송망 구축, 경이로운 민주화의 경험, 타협의 기초인 경제력의 성장 등의 공론장 활성화에 필요한 외적 조건이 모두 갖춰졌는데도 불구하고, 공론장의 실제 활동인 토론의 수준은 백십 년 전보다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상파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과 의회 토론이 어떤 수준인지는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다. 결국 공론장의 활성화의 핵심은 시민 자신인데, 이들이 토론의 의의에 대해 인식하고 방법에 대한 기초 능력을 쌓지 않는 한 토론을 통한 민주적 의사결정은 요원하다. 다행인 것은 이제 토론이 교육과 민주적 참여의 형식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협성회와 독립협회의 토론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상황에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는 것으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 영문
  • Study on the Public Sphere of Early Modern Korea and Its Transformation

    Hwang-Jik Yi
    CODE Center, Sookmyung University

    This paper, focusing on Hyopsong Hoe and Tongnip Hyophoe(Independent Club), the representative civil associations in late chosun dynasty, tries to explain that their pros and cons debate activities under So Chae-pil's guidance are the origin of modern public sphere in Korea.
    In spite of sociological significance of debating activities in public sphere, most Korean researches did not treat them with due consideration. Hyopsong Hoe, the academic debate club in Paichai Hakdang, held the first periodical debate meetings following strict rules in Korean history. The members of Hyopsong Hoe, disciplined through rational argumentation and critical debate skills for a year, participated in Tongnip Hyophoe and took the initiative in its general meetings. As a result of their passionate dedication, the character of Tongnip Hyophoe, once having functioned as a friendly social club of higher officials, was transformed into a civic movement association and leading mover of public opinion. Its activities were not restricted within enlightening public sphere, but spread to patriotic movements against imperialist intervention by Russia and Japan. But such transformation into a political organization puts an end to its role of forming fair opinion and its appeal to citizen?fs conscience. After being revealed that a few of its members pursued factional interest, people did not have trust in it any more and did not give any support when its members were severly oppressed by the Emperor Kojong and the conservatives. It didn't take so long for all the results to become fallen apart, which had been accumulated for two years and a half by Hyopsong Hoe and Tongnip Hyophoe.
    In conclusion, debate meetings of Hyopsong Hoe and Tongnip Hyophoe were a landmark of forming public sphere in modern Korea even though a few of its members had a flaw. Undoubtedly this premature public sphere was unwelcomed guest to despotic monarchy. But transforming itself into a political movement was a general course of development, considering the experiences of western public spher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논문은 기존의 독립신문 중심의 공론장 연구 방향을 ‘말’의 공론장 중심으로 전환시켜, 후자의 성과야말로 초기 공론장의 핵심 요소임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특히 협성회 토론회 활동에 주목하여 서구의 수사학과 토론 이론을 기초로 사료의 제약을 넘어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 협성회의 성과가 독립협회의 방향 전환에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었음을 확증하였다. 나아가 이 논문은 서구 근대 공론장의 역사와 이론에 비추어 한국 초기 공론장의 성격과 그 변화 과정에 대한 새로운 설명 논리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토론회 도입 이후의 독립협회는 교양 수준의 문예적 공론장에서 정치적 공론장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는 서구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개척한 공론장은 불과 반년 만에 시민적 성격을 탈각하고 민중적 공론장으로 해소되었다. 언뜻 이러한 해석은 평등한 인간관을 전제로 성립한 공론장이 점차 민중이 주도하는 대중 정치의 장으로 전환된다는 서구 경험의 공론장 발전 이론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토론회 활동 대신 만민공동회 중심으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당시 대한제국의 대내외적 위기라는 상황적 요인과 중추원(상원)을 구성하려던 자연스러운 목표가 좌절되면서 생겨난 급박한 정치 투쟁의 요구가 개입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O 연구결과
    - 1890년대 조선은 동시대 서구와 같은 물질적 조건을 결여한 채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대내적으로는 신분제가 잔존했고 재정은 피폐했으며 개혁을 둘러싼 정파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대외적으로 청, 일본, 러시아 등 외세의 침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국가 존립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상식 수준에서, 이러한 비상사태에서는 국론 분열을 피하기 위해 황제 또는 소수 집단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대한제국)의 황제와 보수파 권신들은 개혁 없는 권력 확대에만 치중하여 개혁은 물론 국권수호조차도 해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 재필과 협성회, 독립협회 회원들은 뜻밖에도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지극히 민주적인 노선을 선택하였다(박 영신, 1996). 시민과 민중이 자발적으로 애국심을 가진 국민으로 거듭나고 그들의 지혜를 모아 국가 정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수천 년간 닫혀 있던 백성의 눈과 귀를 열고 말문을 틔게 하는 것이야말로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선행 조건이었던 것이다. 사회과학의 분석 틀에 비추어 볼 때, 자본주의로의 경제적 전환이 지체되었고 국민국가 형성마저 뒤늦었던 조선의 상황에서 공론장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 없이도 조선에서 지극히 모범적인 공론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위로부터의 권력 획득 없이 아래에서 시민의 참여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서 재필과 그의 협성회 제자들, 그리고 독립협회 회원들이 활짝 펼쳐놓은 토론의 장에서 조선의 백성들은 시민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한국사의 근대는 이처럼 돌연변이와도 같은 신진 세력들의 생각과 마음의 혁신에 의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이 논문은 기존의 독립신문 중심의 공론장 연구 방향을 ‘말’의 공론장 중심으로 전환시켜, 후자의 성과야말로 초기 공론장의 핵심 요소임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특히 협성회 토론회 활동에 주목하여 서구의 수사학과 토론 이론을 기초로 사료의 제약을 넘어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 협성회의 성과가 독립협회의 방향 전환에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었음을 확증하였다. 나아가 이 논문은 서구 근대 공론장의 역사와 이론에 비추어 한국 초기 공론장의 성격과 그 변화 과정에 대한 새로운 설명 논리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토론회 도입 이후의 독립협회는 교양 수준의 문예적 공론장에서 정치적 공론장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는 서구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개척한 공론장은 불과 반년 만에 시민적 성격을 탈각하고 민중적 공론장으로 해소되었다. 언뜻 이러한 해석은 평등한 인간관을 전제로 성립한 공론장이 점차 민중이 주도하는 대중 정치의 장으로 전환된다는 서구 경험의 공론장 발전 이론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토론회 활동 대신 만민공동회 중심으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당시 대한제국의 대내외적 위기라는 상황적 요인과 중추원(상원)을 구성하려던 자연스러운 목표가 좌절되면서 생겨난 급박한 정치 투쟁의 요구가 개입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서 재필과 협성회, 독립협회 회원들이 꿈꿨던 공론장의 이상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현실화되지 못했다. 인터넷의 발전, 전국적인 방송망 구축, 경이로운 민주화의 경험, 타협의 기초인 경제력의 성장 등의 공론장 활성화에 필요한 외적 조건이 모두 갖춰졌는데도 불구하고, 공론장의 실제 활동인 토론의 수준은 백십 년 전보다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상파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과 의회 토론이 어떤 수준인지는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다. 결국 공론장의 활성화의 핵심은 시민 자신인데, 이들이 토론의 의의에 대해 인식하고 방법에 대한 기초 능력을 쌓지 않는 한 토론을 통한 민주적 의사결정은 요원하다. 다행인 것은 이제 토론이 교육과 민주적 참여의 형식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협성회와 독립협회의 토론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상황에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는 것으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O 활용방안
    (1) 인문학 콘텐츠 구현
    - 당대 <토론회> 규칙에 의해 <현장감 있는 토론회 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
    (2) 공론장 및 민주주의 연구의 자료 제공
    - 당대 공론장 형성 과정을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시민들의 민주주의 투쟁을 견인했는가를 밝혔다.
  • 색인어
  • 공론장 public sphere 협성회 Hyopsong Hoe 독립협회 Tongnip Hyophoe (Independent Club) 서재필 S&#335; Chae-p’il (Philip Jaisohn) 토론회 debating club 의사소통 합리성 communicative rationality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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