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5년부터 수세기에 걸쳐 신의 이름으로 진행된 전쟁은 지중해 세계와 서유럽에 폭력과 적개심을 촉발했다. 무분별해 보이지만, 십자군은 목적, 태도 혹은 행위 면에서 일정한 수준의 응집력과 통합성을 내포한 운동이었다. 평가는 매우 다양했다: 유럽의 식민주의, 인종 ...
1095년부터 수세기에 걸쳐 신의 이름으로 진행된 전쟁은 지중해 세계와 서유럽에 폭력과 적개심을 촉발했다. 무분별해 보이지만, 십자군은 목적, 태도 혹은 행위 면에서 일정한 수준의 응집력과 통합성을 내포한 운동이었다. 평가는 매우 다양했다: 유럽의 식민주의, 인종적ㆍ문화적 우월성, 이성에 대한 신앙의 승리, 민족주의적 서사, 유럽의 적극적 개방, 야만성 노출 등. 과연 십자군 원정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며 어디서 찾아야 할까?
십자군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은 성전이라는 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치르는 전쟁은 성스러운 명분을 띠고 영적 보답을 받기 때문에 용인되어야 한다. 중세 초기에 교황과 교회는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보호와 후견을 위해 교회는 귀족의 무력에 의존하고, 교회는 이들에게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득하는 상호필요의 관계가 성립했다. 성전(Holy War)의 개념이 서유럽 귀족-종교적 문화에 스며들었다. 전사계급의 가치들이 기독교화(Christianised)되고 교회는 군사화(militarised)되는 과정이 십자군 원정 이전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롤랑의 노래(Song of Roland)는 기독교도와 이교도 사이에 선악을 설정함으로써 전사윤리를 규정하고 성베드로의 군대(militia Sancti Petri)임을 자임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십자군의 두드러진 특징들 즉 교회의 성전 개념 수용, 기독교 전사를 위한 면죄부, 이교도에 맞선 전쟁의 독려, 경건한 기사의 개념과 현실 등이 이미 중세 초기부터 형성되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십자군 원정은 기독교 문화에서 배태된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특이하고 새로운 특징으로 예루살렘 수복과 동방교회 지원을 위한 교황 우르반 2세의 거병 요청이 거론될 수 있다. 교황의 성전설교는 성스러운 약탈을 부추겼다. 그는 십자군에 전통적인 기독교의 의식인 순례의 옷을 입힘으로써 성스러운 전쟁의 이미지로 탈바꿈시켰다. 개혁교황권의 필요를 천명하면서 사리사욕을 배제하고 동방에서 정치적 목표를 찾는 동시에, 교황의 설교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무장세력을 범기독교 순례집단으로 위장시켰던 것이다. 동방기독교에 대한 지원과 교황군주제의 확립이라는 이중과제가 구현되었고, 십자군의 유일한 명령권자로서 교황의 지위는 논쟁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한편 십자군은 최후의 심판으로서 의미를 띠었다. 1차 원정 때 라인 지방 유태인 학살(1096)과 예루살렘 무슬림 학살(1099)뿐만 아니라 4차 원정 때 비잔티움 파괴, 기독교 내부의 비판적 세력에 대한 박해는 비인간적인 행위로서 비난의 중심에 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종교적 광란이라 신랄하게 비난한다. 후세의 평가가 혹독할지라도 이러한 광란의 행위는 지극히 의도적인 연출에 의해서 조장된 측면이 강하고 그것은 중세 사회를 배타적인 사회로 몰고 가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십자군은 성전 개념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하지만 성전과 그다지 관련이 많지 않았던 염원과 정책이 십자군에는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도덕적ㆍ정치적ㆍ교회적 차원의 교황의 야망, 세속계층(특히 귀족과 부유한 계층)의 종교적 헌신의 실천, 기사도와 귀족적 명예의 발전, 서유럽 여러 지역의 경제적 팽창, 교회개혁자의 종교적 주도권. 십자군은 이슬람과 경계의 충돌에서 나온 산물이 아니라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심장부에서 생겨난 관심사들의 산물이었다. 철저하게 십자군은 그것과 연관된 형식에서, 의식에서, 화술에서 심각하게 변화하는 세속적, 종교적 요구사항들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을 보았던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십자군의 심장부에는 정치적 외교, 프로파간다, 재정조달, 군사력 충원과 같은 교황의 권위와 조직이 놓여 있다. 교황은 대중의 심성을 자극하는데 분명히 성공했다. 그들을 흥분시키고 에너지를 전환시키는 것은 고도의 기술과 의식이 필요했다. 그것은 교황 자신과 그의 주변을 바치고 있는 성직자 그룹의 몫이었다. 극심한 불안과 혼란을 몰고 왔던 1차 원정조차 프로파간다를 맡은 자들의 치밀한 계산 아래 준비되고 있었다. 대중의 십자가 서약과 이행을 유도하기 위한 설교자의 부단한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청중들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고 이미 설교자의 기대치를 알고 있었다. 설교자와 청중은 서로 설교이벤트를 즐기고 있었고 이벤트는 갈수록 의식으로 자리 잡는 경향이 강했다. 세심하게 연출된 대중이벤트로서 교황권에 의한 영적 개혁이라는 사회적 프로그램의 일환이 되었다.
본 연구는 십자군의 본성을 현상적 고찰이나 비교적 고찰이 아니라 기독교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잉태된 십자가의 탄생 논리를 정치적ㆍ이념적 궤적을 따라가며 밝히려는 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