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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교황군주제와 십자군 전쟁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6-332-A00045
선정년도 2006 년
연구기간 1 년 (2006년 07월 01일 ~ 2007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안상준
연구수행기관 안동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세계화 시대에 문명의 충돌이 회자되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서방국가의 대테러전쟁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규정하자, 부시 역시 이슬람 문화권에서 미국이 벌이는 전쟁을 서슴없이 ‘십자군 전쟁’으로 명명한다. 이처럼 현실국제정치에서 여전히 유용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듯이, 십자군 전쟁은 지난 900년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 두 종교체계 및 그에 기초한 사회와 문화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난마처럼 얽혀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문제가 단지 20세기 국제정치의 산물이 아니라 종교적ㆍ문화적 투쟁의 머나먼 기원을 이루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각인된 십자군 전쟁에 관한 지식과 논의는 실제 역사과정에 대한 이해보다 전쟁에 대한 정치적 혹은 도덕적 판단에 근거한다. 최근에 개최된 학술회의 “서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에서 발표된 십자군 관련 기고문의 제목은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은 침략인가 원정인가」이다. 성지탈환 과정에서 보여준 살상행위, 비잔틴 제국의 유린, 내부의 이단자들에 대한 박해는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비인간적이고 추악한 전쟁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종교적 광신주의에 기초한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행위를 계몽주의자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행위”였다고 일갈한다. 이런 해석은 타자의 관점에서 십자군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고, 또한 종교적 관점에서 십자군을 한정시켜 정의할 때 유용한 해석이기도 하다.
    그러나 십자군에 대한 유럽 학계의 인식은 변하고 있다. 중세 이래 막연하게 성지탈환을 위한 전쟁에 붙여졌던 여러 차례의 십자군은 1960년대 중반 독일학자 마이어(H. E. Mayer)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그는 십자군은 곧 성지회복을 위한 전쟁을 의미하며 레반트에 일어난 전쟁으로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전통주의적 견해는 이후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최근에 발표된 논문에서 콘스터블(Giles Constable)은 전통주의적 해석 이외에 보편주의적(Generalist) 해석, 대중주의적(Popularist) 해석, 다원주의적(Pluralist) 해석으로 정리하였다. 즉 신을 위한 기독교의 모든 전쟁이 십자군이라는 해석, 십자군의 본질은 농민과 도시빈민 계층에서 제기된 예언론, 말세론, 집단적 흥분상태에서 모색되어야 한다는 해석, 그리고 레반트건, 이베리아반도건, 슬라브 지역이건 나아가 기독교 내부의 이단을 제거하는 전쟁이건 교황의 허락은 받은 기독교군대의 전쟁행위를 십자군으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물론 확실한 결론이 내려진 것도 아니고 내려질 수 있는 지도 의문이지만 80년대 이후 십자군 연구의 주도권은 다원주의자들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사학사적 전환이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전통주의적 해석에 입각한 우리의 판단은 일면성에 그치게 되고 그 위에 제기된 대립적 구도는 방향을 상실하고 만다.
    우리의 일면적 인식을 지양하고, 역사적 실재에 근거한 해석의 여지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 십자군이 중세 전성기 유럽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활용되는 제 측면을 살피고자한다. 그 중심에는 개혁교황이 서있다. 그들은 1095년 예루살렘의 성묘탈환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십자군을 일으킨 이래 매우 다양한 정치적ㆍ종교적 근거를 내세우며 이교도, 무교도, 이단자, 정치적 경쟁자들을 공격하고 탄압하고 박해하기 위해서 십자군을 일으켰다. 이런 정치적 이벤트에 유럽인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동원되었고 기꺼이 ‘신의 이름으로’ 죽었다. 교황과 추종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신성하게 만들었고 참여하는 무리들에게 면죄를 하사함으로써 지극히 현실적인 사안을 종교적인 수준으로 승화시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적 광기를 보이는 정도와 비례하여 교황의 정치적 입지는 확고해졌다. 적어도 십자군은 교황의 주도 아래 진행된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배타적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십자군은 기독교 사회 내부를 겨냥하고 있었다.
    십자군의 이러한 측면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십자군은 외부의 충격에 의한 기독교 세계의 반응이 아니라 내부의 모순과 갈등에 기초한 공격적 표출이었고, 따라서 우리는 십자군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독교 세계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십자군은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된 정치적 이벤트였고 종교적 축제였다. 무엇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신의 이름으로 기꺼이 죽음을 마다않고 이교도전쟁에 뛰어들었고, 어떤 사회적 메카니즘이 작동하여 교황은 이슬람 세계는 물론 기독교 세계의 적들을 제거하고 급기야 유래 없는 배타적 사회(persecuting society)를 만들었는가?
  • 기대효과
  • 역사학과에서 이 분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자가 없을 정도이다. 이런 상황은 몇 가지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십자군이 종교적인 의도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이 주제는 의당 신학자나 종교연구자의 관심사라는 일반적 선입견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 연유로 국내에서는 주로 신학 분야 가운데서 종교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종교적 관점에서 출발한 연구들이 더러 있다. 더불어 또 하나의 선입견은 십자군이라면 으레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한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간주하여 도덕적으로 매도하는 관행이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에 의해서 정립된 이런 관점은 일반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 학문적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종래의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 기독교와 이슬람의 두 사회가 중세문화를 이끌어가는 방식으로서 십자군을 이해하고, 특히 서유럽 기독교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변화의 흐름을 권력자들의 십자군 프로파간다 활용방식에서 파악하는 것이 필자의 목표이다. 11세기부터 유럽 사회는 안정을 찾고 교황권은 비로소 세속적인 권력으로부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려 한다. 교회는 전쟁과 종교의 관계를 귀족과 성직자의 공생관계로 전환시킴으로써 평화와 질서의 핵심기관이 되었고, 때마침 동방에서 일어난 변화의 여파는 교황에게 종교적 열정을 분출시킬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제 서유럽은 교황이 주재하는 기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일상의 질서를 유지했고, 서유럽인의 삶의 순환주기 역시 교회의 가치와 규범에서 설정되었다. 이런 변화는 11세기 이후 유럽 사회가 교황의 헤게모니 아래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우리는 이것을 교황지배권(Papal Monarchy)라고 부른다.
    십자군은 즉흥적으로 일어난 현상도 아니었고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현상도 아니었다. 시대의 변화를 간파한 교황의 주도 아래 치밀하게 준비되고 정교하게 조직된 드라마가 바로 십자군이었다. 따라서 십자군연구는 중세 초기 이래 기독교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간접적인 이해를 돕는 한편, 11세기 이후 유럽의 내적 성장과 함께 하는 유럽의 외적 팽창 전략이 어떻게 중세 전성기 서유럽 사회를 변화시켜 놓는가를 알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결국 십자군을 흥분한 기독교인들의 패륜적인 행위로 보거나 물질적 이해관계에 따른 기독교인들의 교활한 행동으로 단순화시키기보다는, 정치공학적인 측면에서, 사회이념적인 측면에서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중세 서유럽 사회의 역동성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지중해 세계에서 벌어지는 문화 간 교류의 양상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의 눈으로 혹은 유럽중심적인 역사인식의 틀을 넘어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연구요약
  • 1095년부터 수세기에 걸쳐 신의 이름으로 진행된 전쟁은 지중해 세계와 서유럽에 폭력과 적개심을 촉발했다. 무분별해 보이지만, 십자군은 목적, 태도 혹은 행위 면에서 일정한 수준의 응집력과 통합성을 내포한 운동이었다. 평가는 매우 다양했다: 유럽의 식민주의, 인종적ㆍ문화적 우월성, 이성에 대한 신앙의 승리, 민족주의적 서사, 유럽의 적극적 개방, 야만성 노출 등. 과연 십자군 원정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며 어디서 찾아야 할까?
    십자군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은 성전이라는 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치르는 전쟁은 성스러운 명분을 띠고 영적 보답을 받기 때문에 용인되어야 한다. 중세 초기에 교황과 교회는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보호와 후견을 위해 교회는 귀족의 무력에 의존하고, 교회는 이들에게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득하는 상호필요의 관계가 성립했다. 성전(Holy War)의 개념이 서유럽 귀족-종교적 문화에 스며들었다. 전사계급의 가치들이 기독교화(Christianised)되고 교회는 군사화(militarised)되는 과정이 십자군 원정 이전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롤랑의 노래(Song of Roland)는 기독교도와 이교도 사이에 선악을 설정함으로써 전사윤리를 규정하고 성베드로의 군대(militia Sancti Petri)임을 자임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십자군의 두드러진 특징들 즉 교회의 성전 개념 수용, 기독교 전사를 위한 면죄부, 이교도에 맞선 전쟁의 독려, 경건한 기사의 개념과 현실 등이 이미 중세 초기부터 형성되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십자군 원정은 기독교 문화에서 배태된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특이하고 새로운 특징으로 예루살렘 수복과 동방교회 지원을 위한 교황 우르반 2세의 거병 요청이 거론될 수 있다. 교황의 성전설교는 성스러운 약탈을 부추겼다. 그는 십자군에 전통적인 기독교의 의식인 순례의 옷을 입힘으로써 성스러운 전쟁의 이미지로 탈바꿈시켰다. 개혁교황권의 필요를 천명하면서 사리사욕을 배제하고 동방에서 정치적 목표를 찾는 동시에, 교황의 설교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무장세력을 범기독교 순례집단으로 위장시켰던 것이다. 동방기독교에 대한 지원과 교황군주제의 확립이라는 이중과제가 구현되었고, 십자군의 유일한 명령권자로서 교황의 지위는 논쟁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한편 십자군은 최후의 심판으로서 의미를 띠었다. 1차 원정 때 라인 지방 유태인 학살(1096)과 예루살렘 무슬림 학살(1099)뿐만 아니라 4차 원정 때 비잔티움 파괴, 기독교 내부의 비판적 세력에 대한 박해는 비인간적인 행위로서 비난의 중심에 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종교적 광란이라 신랄하게 비난한다. 후세의 평가가 혹독할지라도 이러한 광란의 행위는 지극히 의도적인 연출에 의해서 조장된 측면이 강하고 그것은 중세 사회를 배타적인 사회로 몰고 가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십자군은 성전 개념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하지만 성전과 그다지 관련이 많지 않았던 염원과 정책이 십자군에는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도덕적ㆍ정치적ㆍ교회적 차원의 교황의 야망, 세속계층(특히 귀족과 부유한 계층)의 종교적 헌신의 실천, 기사도와 귀족적 명예의 발전, 서유럽 여러 지역의 경제적 팽창, 교회개혁자의 종교적 주도권. 십자군은 이슬람과 경계의 충돌에서 나온 산물이 아니라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심장부에서 생겨난 관심사들의 산물이었다. 철저하게 십자군은 그것과 연관된 형식에서, 의식에서, 화술에서 심각하게 변화하는 세속적, 종교적 요구사항들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을 보았던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십자군의 심장부에는 정치적 외교, 프로파간다, 재정조달, 군사력 충원과 같은 교황의 권위와 조직이 놓여 있다. 교황은 대중의 심성을 자극하는데 분명히 성공했다. 그들을 흥분시키고 에너지를 전환시키는 것은 고도의 기술과 의식이 필요했다. 그것은 교황 자신과 그의 주변을 바치고 있는 성직자 그룹의 몫이었다. 극심한 불안과 혼란을 몰고 왔던 1차 원정조차 프로파간다를 맡은 자들의 치밀한 계산 아래 준비되고 있었다. 대중의 십자가 서약과 이행을 유도하기 위한 설교자의 부단한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청중들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고 이미 설교자의 기대치를 알고 있었다. 설교자와 청중은 서로 설교이벤트를 즐기고 있었고 이벤트는 갈수록 의식으로 자리 잡는 경향이 강했다. 세심하게 연출된 대중이벤트로서 교황권에 의한 영적 개혁이라는 사회적 프로그램의 일환이 되었다.
    본 연구는 십자군의 본성을 현상적 고찰이나 비교적 고찰이 아니라 기독교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잉태된 십자가의 탄생 논리를 정치적ㆍ이념적 궤적을 따라가며 밝히려는 시도이다.
  • 한글키워드
  • 아우구스티누스,교회개혁,개혁교황,그레고리우스 7세,알비십자군,정치적 십자군,봉건적 의무,여론조작,여론,대중설교,면죄부,프로파간다,이단,비잔틴,이슬람,프리드리히 2세,이노센트 3세,아데마르 르 퓌,은자 피터,베르나르 클레르보,우르반 2세,십자가,탁발교단,대중커뮤니케이션,신의 평화,카타르,커뮤니케이션,설교,정당한 전쟁,성전,십자군,순례,클레르몽 공의회,교황국가,교황,기독교세계,십자가를 진 자들,순례자들
  • 영문키워드
  • Pope,Council of Clermont,Reformer Papacy,Papal Monarchy,Pilgrimage,Holy War,Innocent III,Adhemar Le Puy,Peter the Hermit,Bernhard of Clairvaux,Urban II,Gregorius VII,Albigensian Crusade,Preaching,Just War,Church Reform,Societas Christiana,Political Crusades,Feudal Obligation,Manipulation,Public Opinion,Indulgence,Propaganda,Communication,Sermones,Peregrinos,Crucesignatos,Augustinus,Friedriech II,Crusades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1세기에 기독교세계는 지리적으로 팽창했다. 사람들은 그보다 영성의 팽창과 도시나 촌락에서 일어난 새로운 기독교 전통의 성장을 생각하곤 한다. 예배의 이해에서나 영혼의 치유에서 심오한 변화가 있었다. 로마교회는 주도적인 의례개혁 프로그램에서부터 인간에게 적합한 행위규범 제정까지 시도했다. 교구통제망은 기독교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신앙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한 건 부분적으로는 도덕적 우월성이었고, 부분적으로는 탁월한 법률서비스와 행정서비스였다. 교회는 점차 권력에 다가서게 되었다. 파문규정을 강제하기 위하여 때로는 이단을 탄압하기 위하여 교회는 세속의 무력지원을 필요로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교회는 이미 기독교세계 내부에서 발달하고 있었던 단 두 가지의 효과적인 탄압기재로 이를 달성했다. 그것은 십자군과 종교재판이었다. 우르반 2세의 1095년 1차십자군 선포와 그레고리우스 9세의 1230년대 초 종교재판소 설치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교회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십자군과 종교재판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탄압과 전쟁의 이미지를 심어놓고 있을 정도다.
    기독교 사회를 관리하고, 통제하고, 탄압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양상을 띠었다. 이것 또한 이 시대의 새로운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중세유럽을 방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사회가 지독한 지역주의에 빠져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대형교회들은 제각각의 의례관습을 고수했고, 도시는 자기들 나름의 성인들을 숭배했고, 총애하는 아들 가운데서 그들 자신의 이단들을 보호해주었다. 귀족들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든 전쟁과 사람과 동정으로 가득찬 궁정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부상하는 국제주의의 요소들은 강력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는 십자군전쟁으로 경계를 확대하려는 서유럽 기독교세계의 엄청난 투쟁이었을 것이다. 국제적인 종교기사단들이 있었고, 시토수도원은 스코트랜드에서 칼라브리아까지 적용되는 동일한 주기를 요청했고, 탁발수도사들은 가가호호를 전도하기에 적함한 인물들을 기대했다. 이 과정의 핵심에는 로마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 영문
  • In the eleventh century Christianity had expanded in its geographical coverage. Man thinks of the much more spirituality and of the growth of a new Christian tradition in town and country. There was a profound shift in the understanding of worship and the cure of souls. The Roman Church moved from its original cultic reform programme to an attempt to prescribe appropriate behaviour for all sorts and conditions of men. A network of parochial control spread throughout Christendom. The growing grasp and control over the faith rested partly on its moral strength and acceptability, partly on the excellent legal and administrative services. The church became increasingly ready to turn to force. It always recognized that to enforce a decree of excommunication, or still more to repress a group of heretics, it needed the help of the secular arms. Strikingly, however, the church developed the only two effectively repressive mechanisms which have ever developed from within Christianity: Crusade and Inquisition. The role of the Roman Church was central, for Urban II proclaimed the First Crusade in 1095 and Gregory IX issued the first commissions of inquisition in the early 1230s. Crusade and inquisition both still influence our images of repression and warfare.
    This pattern of care, control, and repression was an international one, and this too was a new development of our period. If we could visit medieval Europe we would be struck by its intense localisms. Major churches had their own liturgical customs, cities championed their own saints or protected their own heretics from among their favourite sons, nobles ran courts of warfare, love, and piety in whatever combination they thought fit. Yet the elements of growing internationalism were powerful. The most dramatic of all was perhaps the vast struggle of western Christendom to extend its boundaries through the crusading endeavour. There were international religious orders: the Cistercians required the same daily routine to be applied from the Scottish borders to the mountains of Calabria, and the friars expected thier members to be available for transfer between houses and if necessary between countries and continents. At the heart of this process stood the Roman Church itself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십자가를 진 전쟁의 양상은 매우 복잡했다. 봉건적 유럽은 폭력적인 사회였다. 폭력적인 유럽은 십자군을 잉태하고 있었다. 십자군으로 인해서 유럽이 폭력사회로 변질되었다는 인식은 본말전도의 양상을 띤다. 십자군은 폭력에 성전 개념을 씌운 유용한 개념이었다. 성전과 그다지 관련이 많지 않았던 염원과 정책이 십자군에는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도덕적ㆍ정치적ㆍ교회적 차원의 교황의 야망, 세속계층(특히 귀족과 부유한 계층)의 종교적 헌신의 실천, 기사도와 귀족적 명예의 발전, 서유럽 여러 지역의 경제적 팽창, 교회개혁자의 종교적 주도권. 십자군은 이슬람과 경계의 충돌에서 나온 산물이 아니라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심장부에서 생겨난 관심사들의 산물이었다. 철저하게 십자군은 그것과 연관된 형식에서, 의식에서, 화술에서, 전통에서 근본적으로 다르고 심각하게 변화하는 세속적, 종교적 요구사항들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을 보았던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한편 십자군은 최후의 심판으로서 의미를 띠었다. 십자가를 명분으로 삼은 전쟁은 영적 건강성의 시험대였고, 용광로에서 단련되는 쇠처럼 기독교도의 신앙을 검증하는 절차였고, 2차 십자군 노래 가사에서 표현되듯이 지옥과 천당의 결투였다. 필립 메지에르 같은 중세 후기의 극단주의자들은 도덕적 타락이자 영적ㆍ정치적 박약의 상징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심판주의적 관점에서 십자군은 전쟁으로 인한 희생 때문에 부정적 평가에 내몰렸다. 1차 원정 때 라인 지방 유태인 학살(1096)과 예루살렘 무슬림 학살(1099)뿐만 아니라 4차 원정 때 비잔티움 파괴, 기독교 내부의 비판적 세력에 대한 박해 (13세기 초 알비파 박해, 15세기 초 후스파 박해)는 비인간적인 행위로서 비난의 중심에 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종교적 광란이라 신랄하게 비난한다. 후세의 평가가 혹독할지라도 이러한 광란의 행위는 지극히 의도적인 연출에 의해서 조장된 측면이 강하고 그것은 중세 사회를 배타적인 사회로 몰고 가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십자군의 심장부에는 정치적 외교, 프로파간다, 재정조달, 군사력 충원과 같은 교황의 권위와 조직이 놓여 있다. 교황은 대중의 심성을 자극하는데 분명히 성공했다. 그들을 흥분시키고 에너지를 전환시키는 것은 고도의 기술과 의식이 필요했다. 그것은 교황 자신과 그의 주변을 바치고 있는 성직자 그룹의 몫이었다. 단잠에 빠져있던 유럽 사회를 요란스럽게 깨우듯 극심한 불안과 혼란을 몰고 왔던 1차 원정조차 프로파간다를 맡은 자들의 치밀한 계산 아래 준비되고 있었다. 우르반 2세가 설교를 위해 찾은 곳은 그에게 가장 우호적인 귀족들이 있는 프랑스 왕국이었다. 십자군 군대의 본질적 특성은 중세 봉건적 전투를 수행하는 전사계층의 무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평민들이 십자군에 열렬히 옹호하고 나섰던 사태는 교황이나 성직자들의 예상과 크게 어긋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장기간에 걸친 참여자의 사회적 성분을 분석해보면 평민이나 빈곤계층은 십자군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제한적임을 알 수 있다. 1차 십자군에서 보이는 대중들에 의한 무분별한 혼란과 무질서는 충격적이고 강한 이미지를 덧씌웠으나 그에 대한 집착은 십자군의 본질과 거리가 먼 이미지에 불과했다. 물론 대중의 십자가 서약과 이행을 유도하기 위한 설교자의 부단한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청중들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고 이미 설교자의 기대치를 알고 있었다. 설교자와 청중은 서로 설교이벤트를 즐기고 있었고 이벤트는 갈수록 의식으로 자리 잡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경향은 설교의 주무대가 세월이 흐르면서 가급적 사람이 많은 도시와 법정으로 옮겨간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이런 측면에서 십자군 원정은 세심하게 연출된 대중이벤트로서 교황권에 의한 영적 개혁이라는 사회적 프로그램의 일환이 되었다.
    교황의 정치적 도구로서 십자군의 본성은 파국적인 결과와 일치한다. 13~14세기 가장 특징적인 십자군은 기독교 내부의 교황권 비판세력에 대한 십자군이었다. 이런 방향전환은 전쟁의 범위ㆍ다양한 공동체의 간섭ㆍ이념의 장기지속을 통해 사회적, 문화적 세력에서 십자군이 차지하는 역할이 상당함을 반영한다. 교회는 십자군을 통해서 서방 기독교의 팽창, 교회와 국가의 권위와 질서의 내적 구조 발전, 속인의 종교적 개혁이라는 총체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1세기에 라틴기독교도들은 지중해에서 이슬람 세력을 퇴치하기 위한 영구적인 전쟁상태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11세기 후반에 이미 교회의 후원을 업은 노르만 공국들이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무슬림들을 퇴각시키면서 기독교 세계의 경계가 본격 궤도에 올랐다. 기독교의 공세가 단순한 상황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기독교의 공세는 성전의 성격을 띠며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우르반 2세의 십자군은 성전의 의미를 부각시키면서 기독교의 실지회복운동(reconquista)와 결합되었다. 하지만 실지회복운동이 기독교세계와 경계를 이루는 이교도 세력과 벌인 전쟁이었다면 십자군은 기독교세계와 경계를 이루지 않는 이교도 세력과 벌인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다르며, 이 점에서 십자군은 특별한 의미를 띠었고 특별한 사유를 표방한 전쟁이었다. 그들이 찾아낸 사유는 성지무단점령이었다. 무슬림의 죄목은 신성모독과 무단점유였다. 성지는 십자군 원정의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되었고 영구적인 전쟁의 근원적 사유가 되었다.
    1차 십자군은 교황에 의해서 고안되고, 조직된 전쟁이었다. 그것은 교황 자신의 작품이자 전쟁이었다. 그것은 기독교 인민들 자신의 진군이었고, 이 점이 가장 본질적인 십자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십자군의 지휘관은 다름 아닌 예수그리스도였다. 실제로 황제가 신의 전쟁을 수행하는 한 사람으로서 간주되는 한 합당한 십자군은 있을 수 없었다. 신의 지도력이 기독교 인민들을 예루살렘으로 가는 군사행렬에 내몰았다고 할지라도 이들로 하여금 무기를 들게 했던 사람은 바로 교황이었다. 십자군을 조직함으로써 교황은 기독교 인민에 대한 직접적인 연계성을 수립했고 그들에 대한 우월적 권력을 장악했다. 여기서 교회는 세속통치자들을 따돌리고 교황은 기독교세계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기독교세계는 교황군주국이 되었다.
    이노센트는 십자군을 교황군주의 의무로 설정하고, 신의 보편성이 내재된 조화와 정의를 실현할 세속사회의 질서 잡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정부로서 교황군주제를 표방하였다. 그에게 십자군은 평화정착을 위해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그는 십자군 이념을 평화를 실현하고 도덕적 명령을 실천하는데 두고, 교황군주의 완성을 위해 지속적으로 십자군, 교회개혁, 이단척결이라는 세 가지 목표로 설정하였다. 다시 말해서 십자군과 평화와 기독교세계는 분리될 수 없는 일체라는 것이다. 십자군은 기독교질서, 평화, 통합을 실현할 도구로서, 기독교도 전체가 참여해야 할 과업 (servitium christianitatis)이 되었다.
    기독교도 전체의 과업으로 설정됨에 따라 이를 뒷받침할 전략이 필요했다. 이 점에서 이노센트는 혁신적인 십자군 실천자이자 전략가라고 할 수 있다. 십자군의 성패는 사실 물적 토대의 확보에 있었다. 1차 십자군 당시 행진지역에서 심각한 폐해나 4차 십자군의 목적지 선회와 같은 부작용은 결과적으로 물적 토대를 효과적으로 제공하지 못한 데서 연유했다. 이노센트는 십자군의 간접참여 역시 직접적인 원정참여와 같은 수준으로 인정함으로써 기독교도 전체에게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면서 재정적 확충을 가져오는 효과를 노렸다. 그것은 십자군 서약의 이행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환하는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서 서약의 이행강제를 타인으로 대체하거나(commutation), 금전적으로 변제하거나(redemption), 이행시기를 연기하는(deferring) 행위를 허용함으로써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직간접적으로 십자군에 기여하게 하였다. 이러한 전략으로 교황은 기독교도 전체의 참여를 독려할 뿐만 아니라 십자군 모병의 민주화를 실현하게 되었다. 기실 기독교도 전체가 ‘신의 전쟁’에 참여하는 선민으로 부활했고, 종교와 전쟁이 실질적으로 결합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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