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과제 검색 > 연구과제 상세정보

연구과제 상세정보

대중기억과 매스 미디어 : 한국과 일본의 8.15 기억을 중심으로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대학교수해외방문연구지원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7-013-B00153
선정년도 2007 년
연구기간 1 년 (2007년 01월 01일 ~ 2007년 12월 31일)
연구책임자 원용진
연구수행기관 서강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일본 교토대학의 사토 교수는 최근 일본에서 가장 열심히 활동하는 소장 미디어학자다. 2004년 동경대학 사회학과 정보연구소를 방문하던 차에 연구소를 잠깐 들른 사토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사토교수는 최근 자신의 저서들을 선물하면서 같은 접근법(cultural studies)을 활용하고 있다며 동질감을 표했고 앞으로의 교류도 약속했다. 한류(韓流) 등 문화교류에 관심을 가져오던 차에 사토 교수와의 만남은 일본과 한국의 근대성을 둘러싼 차이와 동질성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천착을 위해서는 좀 더 과거로 돌아가야 함에 착안해 사토 교수의 최근 저서인 <815의 신화> 번역에 착수했다. 2007년 봄 출간을 앞두고 있다. 번역 중 확실하지 않은 사안은 서로 인터넷을 통해 확인하였고, 그 교류를 통해 한국과 대만, 그리고 중국은 815를 어떤 식으로 기념하고 있는지를 공동으로 연구할 것을 제안 받았다. 마침 공동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있어 참여하게 되었고, 이른바 ‘815 프로젝트 팀’이 태동하였다.

    싱가포르 난양대학의 LAN 교수, 동경대학의 신 교수, 가네야마대학의 손안석 교수, 교토대학의 사토 교수, 일본학진 연구소의 고바야시 연구원, 그리고 본 연구자로 짜여진 프로젝트 팀은 <아시아의 미디어와 대중의 기억>이라는 책의 출간을 목적으로 여러 준비 작업을 펼쳤다. 2006년 8월에는 교토 대학에서 전체 워크샵을 열어, 사료들의 존재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다. 2006년 10월에는 서울의 서강대학교에서 일차 발표회를 열어 북한의 815를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다. 2006년 12월 2일에는 동경대학교에서 국제 심포지엄을 갖는다 (포스터 첨부). 그 심포지엄에서 본 지원자는 “해방공간에서의 미디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공동연구를 통해 서로 다른 815를 아시아의 공간에서 맞고 있음을 확인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이라는 헛된 야망을 기억해야 할 모든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다른 종전 기념일을 지니고 있으며, 서로 다른 해방 기념일을 기념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 원인은 사회 내 헤게모니를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기득권 세력들에 있음에도 동의했다. 이제 그 헤게모니에 균열을 내고 다시는 일본이 전쟁을 꿈꾸지 못하도록 하는 범 아시아적 패전 기념일을 설정해야 한다. 기념을 통해 일본의 만행을 다시 확인하고, 전쟁의 끔찍함을 배우고, 전쟁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이들을 응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 민중들의 기억이 자신들이 기억이거나 조상으로부터 물러 받은 기억이 아니라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준 미디어가 가공하고 꾸며 던져준 기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815프로젝트팀은 연구의 최종 목표로 아시아 공동의 기억 건설로 설정했다.
  • 기대효과
  • 국내에서도 815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주백 등은 최근 저서에서 일본과 한국 그리고 북한 등에서 815가 어떻게 기념되고 있는지를 논하였다. 그들은 저서에서 대중의 기억을 조절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교과서, 기념관, 박물관 등으로 파악하여 그를 분석하고 있다. 815국면에서 미디어가 구성해낸 현실이나 이후 미디어가 기억 조성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생략되어 있다. 일본 등의 815연구에서는 미디어와 관련한 논의가 많았던 데 비하면 한국에서의 미디어 논의 생략은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대중의 기억을 둘러싸고 경합하는 국가, 교과서, 미디어를 균형 있게 살펴보는 일은 대중의 기억에 대한 연구의 질을 높이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한다.

    815정국에서 발행되었던 유력 일간지들은 총독부의 기관지였거나 일본인들에 의해 발행된 신문들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 실체에 대해 간단한 언급들만 있을 뿐 구체적 분석을 행하지 않았다. 한국 언론사에서 공백기로 남아 있는 부분이다. 프로젝트 팀의 구성원들은 그 공백기를 메워줄 많은 사료의 소재 여부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사료 확인과 분석을 통해 그 공백기를 메울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아울러 당시 경성방송인 JODK에 종사했던 일본인들이 만든 조방회(朝放會)의 후손들이 정기적 모임을 하고 있으니 그들로부터 일부 새로운 자료 수집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경성방송과 관련해 조방회는 현재까지 두 권의 책을 냈고 모두 국내에서 번역이 되었다. 하지만 세세한 자료는 여전히 몇 몇의 수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그를 구하는데 공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한국 방송사에서 해방정국의 JODK에 대해선 별로 연구된 바가 없다. 많은 조선인 방송국 종사자들이 부역혐의를 받고 있던 차여서 정확한 진술들을 내놓고 있지 않은 탓이다. 일본방송협회 등에 정기적으로 JODK가 보고서를 제출했던 만큼 많은 정보를 구할 수 있을 것이고, 한국 방송사를 좀 더 두텁게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공동 프로젝트팀은 2007년 5월 한국언론정보학회에 특별 세션을 만들어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언론정보학보로부터 프로젝트 팀을 초청한다는 답을 얻어 놓은 상태다. 이 발표를 통해 더 많은 한국학자들과 일본 학자들의 교류를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에는 연구결과를 종결짓는 공동저서를 일본에서 출판할 예정이다. <전쟁, 미디어, 기억>이라는 중간보고서 형식의 저서를 출판한 바 있으므로 <아시아의 전쟁기억과 미디어>(가제)이라는 최종 보고서 형식의 저서를 내고 연구르 종료할 예정이다. 이후 연구기금을 얻을 수 있다면 전쟁 이후 시기의 미디어에 대한 연구로 이어갈 예정이다.

    본 연구자는 한국 대중문화 연구를 학문 활동의 주 테마로 잡아왔다. 문화연구적 입장에서 한국의 대중문화를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통해 한국인들의 정서구조(structure of feeling)를 파악함을 최종 목표로 삼아왔다. 정서구조를 살피기에는 미디어의 발화방식이나 내용을 분석하는 것을 지름길로 파악하고 그 동안 그에 전념해왔다.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광고문화비평> <텔레비전비평론> <현대 대중문화의 형성> <스크린쿼터와 문화주권> <텔레비전문화연구> 등의 저서를 통해 그 연구결과들을 정리해두었다. 최근에는 근대성의 시작과 대중문화를 연결짓는 연구를 펼치고 있는바 해방 전, 해방 후, 그리고 전후 등으로 이어가며 연구를 펼칠 예정이다. 근대성의 시작 지점들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서는 정서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최근의 저서인 <근대적 육체와 일상의 발견>은 그 일환으로 연구한 성과다. 이번 일본에서의 연구는 새롭게 시작한 본 연구자의 테마인 근대성 연구에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현재 사학자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하고 있는 ‘한국사회와 미국화’ 연구를 통해서 역사연구에 대한 많은 도움말을 얻고 있다. 특히 당시의 정국으로 전이(轉移)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부분이라든지, 사료를 정리하는 방식, 역사 내러티브에 대해 주고받은 대화들은 매우 소중한 것들이었다. 물론 일본연구자들과의 대화에서도 그 같은 부분을 많이 전달받기도 했다.

    사회과학자로서 지닐 수 있는 사회학적 상상력과 인문과학자들과의 대화로 얻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결합된다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 연구요약
  • 한국과 일본은 815정국을 같은 방식으로 국가와 미디어가 정치화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화 과정에서 과연 누구를 타자로 두게 되는가가 매우 소중한 일인데 그 과정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한국의 경우 북한, 공산주의가 큰 타자로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해방은 광복으로 바뀌고, 광복은 다시 북한과 공산주의와 연관되어 해석된다. 통일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며 북한에 광복을 전해주는 일이 민족의 사명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의 경우, 미국이 큰 타자로 등장하되 그는 경쟁과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믿고 따르는 대상으로 설정된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미국의 보호를 고맙게 생각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던 차에 벌어진 한국전쟁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거듭한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 설정에 변화를 모색한다. 파트너쉽을 강조하게 된다. 파트너쉽의 관계로 설정한 미일 관계에서 더 이상 불균형 관계가 지속될 필요는 없다. 일본은 스스로의 위치를 선정함에 있어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기억들을 재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다.

    한국에서 815는 반공과의 절합(articulation) 되어 미래의 통일과 연관되었다. 일본에서는 815가 피해자 개념과 절합 되었다. 한국은 815 정국을 잊고자 함이 강했고, 일본은 815정국을 변화시켜 기억하고자 하는 바람이 강했다. 조선의 815 정국에서 벌어졌던 좌우의 대립은 부각되지 않으나 북한과의 관계와 관련된 메시지는 815 기념식 마다 전달된다. 해방이후 한국 정치, 경제, 사회 분야를 이끌던 많은 인사들은 친일인사들이었으며, 해방정국에서 그 과거를 지우고자 좌우갈등을 주도했던 사실들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시를 잊고자 한 의도가 역력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815에 대한 기억은 지나치게 선택적이고, 만세소리와 환희만 가득 찬 몽환적인 모습을 띠고 있기도 했다. 일본의 경우, 패전에서 종전으로 그 모습이 바뀌면서 815는 일부 호전적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결과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 같은 기억을 통해 일본 왕은 면죄부를 받게 되고, 천황제는 여전히 유지된다. 일본 대중들 또한 전쟁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 오히려 가공할만한 전쟁 무기에 의한 희생, 고통이 떠올려질 뿐이다. 815는 일본의 오랜 풍습이던 추석과 같은 날에 치러지면서 전혀 다른 기억을 주고받는 날로 기념되고 있었다. 식민지의 기억 등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한국과 일본, 그 어느 쪽이든 815는 기억을 변화시키고, 망각시키고, 절합 시키는 구성의 대상이었다.

    한 사회 내 대중매체의 성격은 국가, 시민사회, 그리고 경제계와 함께 논의될 수 밖에 없다. 사회 구성체와 유리시키지 않은 채 대중매체를 논의하는 일의 소중함은 누구나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미디어가 갖는 이념적 전통에 대한 논의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정리될 수밖에 없는 역사의 산물임을 인식한다면 미디어의 발전사에 대한 논의는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된다, 한국언론사에 대한 연구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수많은 사료들을 찾아내, 언론이 펼쳤던 사회적 영향력을 정리하는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대중매체를 수동적 존재로 파악해 당시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대중매체의 존재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가설적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 대중매체가 벌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능동적 행태들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왔다. 815국면에 대한 연구는 그 같은 맹점들을 보완하기에 적절한 작업이다. 미디어가 815의 기억을 어느 한 쪽으로 이끌어 갔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였던 것일까?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의 성격을 규명해줄 수는 있는 것일까? 비교를 통해 새로운 연구과제들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키워드
  • 기억,국가,JODK,천황,패전,광복,하지,아베,안재홍,여운형,총독부,저널리즘,경성일보,매일신보,단파방송사건,건국준비위원회,독립,해방,종전,일본,8.15,매스 미디어
  • 영문키워드
  • Chosun,Japan,popular memory,radio,Nakasaki,GHQ,liberation,national holidays,the Emperor,Hiroshima,JODK,the state,mass media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한국의 815에 대한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날 정오 일본 천황의 육성방송을 듣고 해방이 왔다고들 기억하지만 실제로 그날의 방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후 회고록이나 기억을 담은 저서들은 그날 정오에 대해 많은 기억들을 남기지만 실제로 문헌 상으로 남은 기록들은 별로 없는 편이다. 일본인들의 기억과 한국인들의 기억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교과서 등을 비롯하여 많은 기록들은 당일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 시위가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정황이 많다. 그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패전 기념일에 대한 기억들도 제 각각이지만 그날 일본인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천황에 사죄하는 조아림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연구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815와 한국의 815는 과연 어떤 의미를 어떻게 지니는가 당시 신문을 중심으로 815 보도를 살펴보고 양 사회에서 패전과 해방이 어떻게 소통되었는지를 비교할 목적으로 이 연구는 시작되었다. 연구 결과 일본의 패전 저널리즘은 매우 정교하게 준비된 채로 이뤄졌지만 실제 한국의 경우는 미리 준비하지 못한 탓에 여러 형태의 혼동과 혼란상을 보여준다. 여운형을 비롯한 건준 준비자들은 미리 해방에 대한 귀뜀을 받았고, 준비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한국의 매일신보과 경성일보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점검해보았다
  • 영문
  • What happened to Koreans at 15 August of 1945 Most Koreans think that everybody came out of one's place and shared the joy of liberation at the day. Even those who were born after the liberation day do not hesitate to think of those sceneries. School textbooks, mass media, bedtime stories may affect their memories. However that sort of narrative is a myth. At that time most Koreans did not fully understand the meaning of Japanese defeat and even the meaning of liberation. From the next day on, they came out to the street with flags and sang the joy, otherwise, gathered to share information about the future of the society. Japanese eyewitnessed the very same situations as Koreans.

    The research aims to follow the memories about the liberation day of Korea and to compare with Japanese experience. Especially throughout the analysis of reportings of newspaper aroung the day I tried to show how the stereotyped image of the day was reminded by Koreans for a long time. A part of the research was published in Japanese last year. Revising the published one, I will see the way how the image was constructed by Korean newspaper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한국의 815에 대한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날 정오 일본 천황의 육성방송을 듣고 해방이 왔다고들 기억하지만 실제로 그날의 방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815와 한국의 815는 과연 어떤 의미를 어떻게 지니는가 당시 신문을 중심으로 815 보도를 살펴보고 양 사회에서 패전과 해방이 어떻게 소통되었는지를 비교할 목적으로 이 연구는 시작되었다. 연구 결과 일본의 패전 저널리즘은 매우 정교하게 준비된 채로 이뤄졌지만 실제 한국의 경우는 미리 준비하지 못한 탓에 여러 형태의 혼동과 혼란상을 보여준다. 여운형을 비롯한 건준 준비자들은 미리 해방에 대한 귀뜀을 받았고, 준비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한국의 매일신보과 경성일보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점검해보았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현재 일본에서 구입해온 자료를 분석하여 일부분은 일본에서 출판을 완료했으며, 한국 학술저널에 그 결과를 제출할 예정이다. 연구결과는 당시 한국의 언론종사자들이 민족주의적 사고가 더 강했는가 아니면 언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는가를 제대로 살펴보는 일이 연구의 핵이 될 듯 하다. 오랫동안 한국 저널리즘 연구가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해 해방당시에 매일신보나 경성일보에 종사하던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제대로 해오질 못했다. 양 신문이 모두 총독부의 기관지라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1942년에 폐간된 동아, 조선일보 양 신문의 기자들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나 경성일보로 자리를 옮겼고, 해방을 맞이하여서는 그들이 민족운동, 좌파운동, 독립언론을 위한 운동 등을 주도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새롭게 논의를 전개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 색인어
  • 해방, 815, 여운형, 건준, 경성일보, 매일신보, 천황, 포츠담선언, 신화
  • 연구성과물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