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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변록] 시비의 사상적 기반에 대한 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7-327-A00187
선정년도 2007 년
연구기간 1 년 (2007년 12월 01일 ~ 2008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김태년
연구수행기관 인하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 朴世堂(西溪, 1629∼1703)은 인조·효종·현종·숙종 4대에 걸쳐 살았던 학자이자 문신으로 당시 노론과 소론의 분열과 대립이 격화되는 한 계기를 제공하면서 상대방인 노론측으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비판받았던 인물임. 그가 사문난적으로 몰리게 된 결정적 이유는 󰡔思辨錄󰡕의 저술이었는데, 이 책은 󰡔通說(錄)󰡕이라고도 하며 14책의 필사본으로 박세당이 52~65세 14년에 걸쳐 󰡔사서󰡕와 󰡔상서󰡕·󰡔시경󰡕에 대해 주석을 붙인 것임.
    ▲ 노론과 소론이 벌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문난적’과 ‘대학자’라는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를 받아오던 박세당은 근대 이후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함. “경전을 훼손하고 성인을 모독한 것”이 ‘반(탈)주자학’ ‘탈(반)성리학’으로, “이단의 학설에 물든 것”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학풍”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한 것임.
    ▲ 이러한 박세당의 철학사상은 근대화의 선하인 실학의 선구자로 그를 자리매김해주었고, 정주학에 대하여 전면적인 재해석의 의지를 드러낸 󰡔사변록󰡕은 그러한 성향을 드러내는 대표적 저작으로 인식되고 있음.
    ▲ 그런데 박세당이 무언가 주희와 다른 설을 펴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거의 모든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각기 달리 해석하고 있는 실정임. 1) 반주자학이다. 2) 탈정주학(성리학)이다. 3) 실학의 선구다 4) 양명학적 경향이 많다. 4) 노장적 경향이 많다. 탈유학이다. 5) 성리학 내부의 새로운 혁신 운동이다 등 각기 강조점이 다름.
    ▲ 이는 그간의 연구들이 주희(혹은 정주)와 박세당의 해석에 치중하여 수행된 데 기인하는 것이라고 판단함. 주희와 박세당 뿐 아니라, 시야를 넓혀 한학·송학·양명학·청학 등 중국의 여러 가지 경학적 입장과 윤증과 남구만 등 소론계 학자들, 그리고 그를 비판한 김창협 등 노론계 학자들의 학설을 종합적으로 비교할 때 󰡔사변록󰡕에 드러나는 박세당의 철학사상이 더욱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임.
    ▲ 따라서 󰡔13경주소󰡕·󰡔통지당경해󰡕·󰡔황청경해󰡕 등 여러 경학서들과 전자화된 󰡔조선왕조실록󰡕·󰡔한국문집총간󰡕·󰡔경학자료집성󰡕 등을 이용하여 󰡔사변록󰡕의 주석들이 경학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 꼼꼼히 따져보는 한편 󰡔사변록󰡕 시비가 당대에 가지는 학문적 정치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한 작업이라 판단됨. 본 연구의 독창성은 우선적으로 이러한 연구 범위의 확대를 통해 확보되리라 기대함.
    ▲ 또한 그동안의 연구는 “주자학-탈(반)주자학” “전근대(봉건)-근대”의 인식틀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앞서 말한 기존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됨.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우선 당대인의 시각으로 텍스트를 읽어보려 함. 명·청 교체기, 보편 문명이었던 중화가 현실적으로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당대 지식인들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그 때 주자학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살펴보려는 시각에서 출발하려는 것임. 이렇듯 ‘글로벌 스탠다드’(중화·주자학)에 대한 당시의 다양한 입장과 해석을 󰡔사변록󰡕을 둘러싼 조선 후기 지식인의 여러 견해를 통해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본 연구의 두 번째 독창성이 드러날 수 있으리라 판단함.
  • 기대효과
  • ▲ 광범위한 문헌들을 대상으로 비교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비교·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박세당의 경전 해석이 경학사상 어느 위치에 있는지 살펴보고, 박세당에 대한 공격과 방어가 학문적으로 정당한지 아니면 단지 정치적 마타도어에 불과한지 판정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함.
    ▲ 박세당의 경전 해석이 1) 경전의 내용을 부정하는 수준인지, 그래서 그의 이념적 지향이 유학을 벗어나 버렸는지, 2) 경전의 내용을 긍정했다면 그 해석은 성리학(신유학)의 범위를 넘어선 것인지, 3) 그의 해석이 성리학의 토대 위에 서 있다면 그 성격은 어떠한지, 주자학과 다른 건지, 아니면 주자학에 대한 (송시열 등과 비교하여) 또 다른 해석인지 판정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임.
    ▲ 한편 본 연구는 󰡔사변록󰡕과 관련된 시비를 다루면서 정치적 권력투쟁(당쟁)과 학문적 사상투쟁(이단시비)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시각을 확보하는 한편, 철학과 역사를 사상사 속에서 만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임. 또한 본 연구를 통해 경학을 철학사상사의 영역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방법론을 모색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함.
    ▲ 이렇듯 󰡔사변록󰡕 관련 시비를 사상사의 시각에서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노론과 소론의 사상적 차이를 구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임. 박세당의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반대당의 비판에 깔린 사상적 기반을 살펴봄으로써 흔히 권력투쟁의 전형으로만 알려진 당쟁의 사상적 토대를 찾아내 학문·도덕과 정치의 통일이라는 중세적 특징을 더욱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함.
    ▲ 더 나아가 이러한 연구 성과는, 박세당의 독특한 사상사적 위치를 고려할 때, 박세당의 󰡔사변록󰡕 해석에서 출발하여 향후 박세당 등의 소론 학자들이 당시 시대정신이었던 ‘중화 복구(계승)’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살펴보는 데에 하나의 토대를 제공함과 동시에 주자학과 탈주자학(혹은 성리학과 탈성리학), 그리고 성리학과 실학의 구도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는 데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함.
  • 연구요약
  • ▲ 본 연구는 우선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그의 저작(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서계종택 기증 고도서와 고문서 포함)과 󰡔실록󰡕, 관계 문집, 각종 당론서 등을 분석하여 그의 문제 의식과 학문적 특징을 도출하고 󰡔사변록󰡕을 둘러싼 논란의 전개 과정을 추적하는 데에서 출발함.
    ▲ 연구 대상인 박세당에 대한 연구자 나름의 상이 그려지면 논란의 대상이었던 󰡔사변록󰡕의 내용을 해당 경서의 원문과 대조하며 검토함과 동시에 해당 내용에 대한 중국과 조선의 다른 학자들의 의견과 비교해봄으로써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그의 주석이 가지는 의미와 위상을 추적함.
    ▲ 특히 이 논란에는 1) 經의 의미, 2) 經에 대한 漢·唐 훈고학자들의 해석, 3) 이를 극복하려 한 朱熹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의 해석, 4) 그에 대한 박세당의 문제 제기, 5) 박세당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된 노론 학자들의 󰡔사서장구집주󰡕에 대한 해석, 6) 박세당과 김창협 등 조선 성리학자들의 해석과 비교할 明·淸 유학자들의 해석 등 다양한 층위의 해석이 전제되어 있음에 유의함.
    ▲ 따라서 이런 다양한 해석들을 검토하기 위해 󰡔사변록󰡕과 󰡔사서장구집주󰡕는 물론 󰡔13경주소󰡕(한·당), 󰡔주자대전󰡕·󰡔사서혹문󰡕·󰡔주자어류󰡕·󰡔통지당경해󰡕(송), 󰡔양명전서󰡕(명), 󰡔황청경해󰡕(청), 󰡔문연각사고전서󰡕, 󰡔경학자료집성󰡕(조선) 등의 자료를 적극 활용하여 최소한 핵심 논쟁점에 대해서는 각 입장을 두루 살펴보는 것을 원칙으로 삼음. 전자화된 텍스트에 대해서는 키워드 검색을 통해 대상을 선정하고 이를 학파·시기를 고려하여 광범위하되 균형 있는 검토가 이루어지게 함. 전자화되지 않은 텍스트는 저자의 위상을 고려하여 중요 인물의 저작을 선정하여 쟁점이 된 경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빠짐없이 검토함.
    ▲ 연구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함. 1. 서론 / 2. 시비의 전말과 노·소 양측의 입장 / 3. 󰡔사변록󰡕을 둘러싼 논란의 학문적 쟁점 / 4. 박세당 경전 해석의 의미와 위상 / 5. 결론
    ▲ 2장에서는 해당 󰡔실록󰡕과 󰡔계갑록󰡕·󰡔당의통략󰡕·󰡔아아록󰡕 등 각종 당론서, 그리고 해당 문집들을 기반으로 이경석 비문 작성, 김창흡의 문제 제기, 홍계적·이여 등의 탄핵 상소, 이탄·이익명·최석정 등의 방어 상소, 김창협 등의 비판 등을 거치면서 “파직 -> 귀양 -> 귀양 취소 -> 복관 -> 치제 ->시호 하사” 등으로 이어지는 당시 논란 과정을 살펴봄. 기존 연구를 통해 사건의 전말은 상세히 밝혀졌음을 감안하여 본 연구에서는 주로 그들의 비판·옹호 논리의 정당성을 검토해보려 함. 박세당이 이경석 비문을 작성하며 송시열을 비판하고 󰡔사변록󰡕을 지어 주희의 설을 비판하고 3년 상식을 철폐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성인을 모독하고 경전을 훼손한 ‘사문난적’이라는 노론의 비판이 어떤 사상적 기반에서 나온 것인지 살펴보고 이에 대한 소론의 대응은 어떤 경향성을 보이는 것인지 따져보려는 것임.
    ▲ 3장에서는 󰡔사변록󰡕에 드러난 박세당의 견해가 과연 이단적인 것인지 살펴봄. 박세당의 생각들은 과연 주희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지, 김창협 등은 박세당에게 어떤 이단성을 발견한 것인지, 과연 노론측 인사들의 비판은 논리적으로 정당한지 아니면 단지 정치적 마타도어에 불과한지 판정해 볼 것임. 이는 󰡔사변록󰡕과 관련된 부분과 그에 대한 노론계 학자들의 비판을 검토하고 그중 핵심적인 논점을 추출하여 이를 중국과 조선의 각종 경학서와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 .
    ▲ 4장에서는 3장의 논의를 기반으로 박세당 경전 해석의 의미와 위상에 대해 논해봄. 과연 박세당의 견해가 반주자학적인지, 반(탈)성리학적인지, 더 나아가 반유학적인지 살펴보고, 그 성격은 무엇인지 그것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 따져보고자 함. 여기에서 노장과 유학, 원시 유학과 성리학, 양명학과 주자학, 주자학 내부의 다양한 경향들이 함께 논의될 수 있으리라 기대함.
  • 한글키워드
  • 서계,소론,박세당,실학,성리학,양명학,주자학,노론,사변록
  • 영문키워드
  • Learning of Zhuxi,Neo-Confucianism,Learning of Yangming,Noron,Seogye,Park Se-dang,Sabyeon-nok,Soron,Silhak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박세당의 <<사변록>>을 둘러싸고 벌어진 ‘斯文亂賊’ 시비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朴世堂(西溪, 1629-1703)은 인조·효종·현종·숙종 4대에 걸쳐 살았던 학자이자 관료로 당시 노론과 소론의 분열과 대립이 격화되는 한 계기를 제공하면서 상대방인 노론측으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비판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그렇게 몰리게 된 결정적 이유는 52-65세 14년에 걸쳐 <<四書>>와 <<尙書>>·<<詩經>>에 대해 주석을 붙인 <<思辨錄>>의 저술 때문이었다.
    <<사변록>>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 간의 시비는 환국을 통한 당파간의 부침이 심했던 숙종대 대표적인 학술논전이자 사문난적 논란이었다. 그리고 金昌協(農巖, 1651-1708)은 노론의 입장에서 <論思辨錄辨>을 저술함으로써 그 논란의 한 가운데 서게 된 인물이다. 洪啓迪 등의 상소에 의해 박세당의 <<사변록>>이 문제가 되자 숙종은 이를 변파하라는 명을 내렸고, 李觀命과 함께 숙종의 명을 받은 權尙游는 <思辨錄辨>을 작성하여 <<사변록>>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한편, 그 내용을 김창협에게 보내 질정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김창협은 이에 대해 장문의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사변록>> 논란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권상유에게 보낸 김창협의 견해는 노론측의 본격적인 학술적 비판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박세당의 󰡔사변록󰡕과 김창협의 비판, 그리고 논점에 대한 朱熹의 견해를 대조하면 노론측이 제기한 "성인을 모독하고 경전을 훼손했다"는 의혹, 구체적으로는 주희의 해석을 부정하여 ‘사문’의 종지를 무너뜨렸다는 문제 제기가 정당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변록>>에 드러난 박세당의 주석을 분석해보면 그는 분명히 많은 부분에서 주희의 주석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그가 주자학, 혹은 폭을 더 넓혀서 성리학의 틀을 벗어난 어떤 새로운 사상 체계를 제시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주희의 해석을 직접 거론하며 비판한 그의 논의를 보더라도 그의 주 관심은 여전히 도의(理)의 실현에 있었고 인식틀 또한 전통적인 성리학의 자장 안에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노론 측의 ‘사문난적’이라는 비판은 분명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게다가 주희 이후 중국의 주자학자들은 물론 노론계 학자들 내부에서도 주희의 주석이나 주장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때 박세당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정치적 공세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주희의 학설에 대한 비판의 ‘태도’가 문제였다면 몰라도 ‘내용’만 가지고는 ‘斯文’을 배신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편 김창협은 주로 박세당이 <<사변록>>에서 구사하는 논리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그가 주희의 견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물론 자신이 이해한 주희의 견해에 기반을 둔 것으로, 그 이면에는 李珥에서 宋時烈로 이어지는 노론계의 방대한 주자학 연구와 理氣論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창협은 그저 박세당이 ‘朱子’와 다른 의견을 제기했다는 이유로만 비판한 것은 아니었으며, 자기가 볼 때 박세당의 학설이 ‘正學’의 틀을 벗어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비판했던 것이다.
    박세당과 김창협은 모두 성인의 무오류성을 전제하고 성인의 본의가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태도, 현실적으로는 성인의 ‘말씀(經)’을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이를 자신의 생각과 일치시키려는 경학적 태도를 견지했다. 다만 김창협은 이러한 태도를 주희의 ‘말씀’에도 적용했고, 따라서 주희의 경전 해석이 만약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함으로써 자기 견해와 일치시켜 학문적 정당성을 부여받으려 한 반면, 박세당은 주희가 성인의 뜻을 가장 잘 드러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자기 견해와 다른 주희의 해석은 부정했던 ‘태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김창협과 박세당의 대립을 탈성리학 대 성리학의 구도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조선의 성리학계 내부의 노선 다툼으로 파악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검토해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 영문
  • This study aims at clarifying philosophical context of samun ranjeok(斯文亂賊) debate which was caused by Sabyeonrok(思辨錄) written by Park Sedang(朴世堂, 1629-1703), a scholar and civil official.
    Park was main focus and motive of Noron's crticism in the debate against Soron. What made him a man of the debate was the publication of Sabyeonrok which was a result of his own critical reading of Confucian classics such as The Four Chinese Classics, The Book of Odes, and Book of History.
    On its publication, the debate between Noron and Soron became fiery and settled itself as major academic debate concerning Confucian orthodoxy in the history of Chosun. In the process of the debate, Kim Changhyeop (金昌協, 1651-1708) distinguished himself by writing Ronsabyeonrokbyeon(論思辨錄辨) - Before that, repeating appeals by scholars like Hong Gyechok(洪啓迪) made Sukjong summon to refute Sabyeonrok, and by the king's designation Yi Gwanmyeong(李觀命) and Kwon Sangyu(權尙游) wrote Sabyeonrokbyeon(思辨錄辨) to criticize Sabyeonrok in detail. Kim Changhyeop's writing was an answer to the Kwon Sangyu's request for supplementing their work and it drew him into main stage of the debate.
    Ronsabyeonrokbyeon remains as single only document to grasp genuinely academic context of the debate from Noron side. Thus, by comparing Park's Sabyeonrokbyeon, Kim's criticism, and original viewpoint of Zhuxi, we can evaluate the legitimacy of Noron side's criticism of Park's stance, which was blamed as "to profane the saints and defame the classics", and as to deny Zhuxi's viewpoint thus to destroy the orthodoxy.
    Analysis of Sabyeonrok does not provide any evidence of Park's developing new realm of thought different from Zhuxi's Neo Confucianism, notwithstanding his interpretation of the classics are different from Zhuxi's. Even in his direct criticism of Zhuxi's interpretation, his main interest is laid in realizing Ri(理) and his epistemology remains in traditional Neo Confucian framework.
    The above analysis leads us to the conclusion that the Noron's criticism against Park was overrated; Noron scholars as well as Chinese scholars after Zhuxi also presented their own interpretation different from Zhuxi's commentaries and arguments. Criticism against Park can be seen as a political attack rather than an academic refutation, because the contents of his work did not betray orthodox Neo Confucianism, even if his attitude was problematic.
    Meanwhile, Kim's criticism against Park was focused at the latter's logical inconsistency or misreading of Zhuxi's works, basing his standpoint on his own interpretation of Zhuxi's works while being influenced by Noron scholars's studies of Neo Confucianism and theories of Ri and Ki(理氣論) since Yi Yi(李珥) down to Song Siyeol(宋時烈). He did not criticize Park for being different from Zhuxi, but for Sabyeonrok's strong possibility of derailing from the orthodoxy.
    Both Park and Kim presupposed the infallibility of saints and tried to grasp the real intent of them. Their effort was centered upon interpretation of the Confucian classics, i.e. the words of saints, and realization of them in the world. Difference between the two laid in the fact that Kim supposed Zhuxi as one of the saints, refraining from denying Zhuxi's words and just trying to reinterpret the words when his own viewpoint was different from Zhuxi's, but Park denied Zhuxi's viewpoint when inconsistencies occurred while admitting Zhuxi's significance of genuine heir of the Confucian saints.
    Conclusion of the above analysis suggests that we are urged to interpret the samun ranjeok debate in the light of inner debate within Neo Confucianists in Chosun Dynasty, rather than in the light of the confrontation between Neo Confucianism versus a new kind of Confucianism.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박세당의 <<사변록>>을 둘러싸고 벌어진 ‘斯文亂賊’ 시비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朴世堂(西溪, 1629-1703)은 인조·효종·현종·숙종 4대에 걸쳐 살았던 학자이자 관료로 당시 노론과 소론의 분열과 대립이 격화되는 한 계기를 제공하면서 상대방인 노론측으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비판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그렇게 몰리게 된 결정적 이유는 52-65세 14년에 걸쳐 <<四書>>와 <<尙書>>·<<詩經>>에 대해 주석을 붙인 <<思辨錄>>의 저술 때문이었다.
    <<사변록>>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 간의 시비는 환국을 통한 당파간의 부침이 심했던 숙종대 대표적인 학술논전이자 사문난적 논란이었다. 그리고 金昌協(農巖, 1651-1708)은 노론의 입장에서 <論思辨錄辨>을 저술함으로써 그 논란의 한 가운데 서게 된 인물이다. 洪啓迪 등의 상소에 의해 박세당의 <<사변록>>이 문제가 되자 숙종은 이를 변파하라는 명을 내렸고, 李觀命과 함께 숙종의 명을 받은 權尙游는 <思辨錄辨>을 작성하여 <<사변록>>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한편, 그 내용을 김창협에게 보내 질정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김창협은 이에 대해 장문의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사변록>> 논란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권상유에게 보낸 김창협의 견해는 노론측의 본격적인 학술적 비판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박세당의 󰡔사변록󰡕과 김창협의 비판, 그리고 논점에 대한 朱熹의 견해를 대조하면 노론측이 제기한 “성인을 모독하고 경전을 훼손했다”는 의혹, 구체적으로는 주희의 해석을 부정하여 ‘사문’의 종지를 무너뜨렸다는 문제 제기가 정당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변록>>에 드러난 박세당의 주석을 분석해보면 그는 분명히 많은 부분에서 주희의 주석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그가 주자학, 혹은 폭을 더 넓혀서 성리학의 틀을 벗어난 어떤 새로운 사상 체계를 제시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주희의 해석을 직접 거론하며 비판한 그의 논의를 보더라도 그의 주 관심은 여전히 도의(理)의 실현에 있었고 인식틀 또한 전통적인 성리학의 자장 안에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노론 측의 ‘사문난적’이라는 비판은 분명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게다가 주희 이후 중국의 주자학자들은 물론 노론계 학자들 내부에서도 주희의 주석이나 주장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때 박세당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정치적 공세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주희의 학설에 대한 비판의 ‘태도’가 문제였다면 몰라도 ‘내용’만 가지고는 ‘斯文’을 배신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편 김창협은 주로 박세당이 <<사변록>>에서 구사하는 논리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그가 주희의 견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물론 자신이 이해한 주희의 견해에 기반을 둔 것으로, 그 이면에는 李珥에서 宋時烈로 이어지는 노론계의 방대한 주자학 연구와 理氣論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창협은 그저 박세당이 ‘朱子’와 다른 의견을 제기했다는 이유로만 비판한 것은 아니었으며, 자기가 볼 때 박세당의 학설이 ‘正學’의 틀을 벗어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비판했던 것이다.
    박세당과 김창협은 모두 성인의 무오류성을 전제하고 성인의 본의가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태도, 현실적으로는 성인의 ‘말씀(經)’을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이를 자신의 생각과 일치시키려는 경학적 태도를 견지했다. 다만 김창협은 이러한 태도를 주희의 ‘말씀’에도 적용했고, 따라서 주희의 경전 해석이 만약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함으로써 자기 견해와 일치시켜 학문적 정당성을 부여받으려 한 반면, 박세당은 주희가 성인의 뜻을 가장 잘 드러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자기 견해와 다른 주희의 해석은 부정했던 ‘태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김창협과 박세당의 대립을 탈성리학 대 성리학의 구도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조선의 성리학계 내부의 노선 다툼으로 파악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검토해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당초 연구계획에서 다음과 같은 기대효과들을 제시한 바 있다. 1) 박세당의 경전 해석이 경학사상 어느 위치에 있는지 살펴보고, 박세당에 대한 공격과 방어가 학문적으로 정당한지 아니면 단지 정치적 마타도어에 불과한지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2) 정치적 권력투쟁(당쟁)과 학문적 사상투쟁(이단시비)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시각을 확보하는 한편, 철학과 역사를 사상사 속에서 만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3) 또한 본 연구를 통해 경학을 철학사상사의 영역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방법론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박세당의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반대당의 비판에 깔린 사상적 기반을 살펴봄으로써 흔히 권력투쟁의 전형으로만 알려진 당쟁의 사상적 토대를 찾아내 학문·도덕과 정치의 통일이라는 중세적 특징을 더욱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 주자학과 탈주자학(혹은 성리학과 탈성리학), 그리고 성리학과 실학의 구도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는 데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주로 200자 원고지 150매로 한정되는 논문의 분량에 대한 현행 관례를 고려할 때, 한 편의 논문을 통해 이러한 기대를 다 충족시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또한 박세당의 <<사변록>>과 김창협의 <논사변록변>이 다루고 있는 논점만 해도 그 양이 방대하여 한 편의 논문에 실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본 연구의 성과를 3개의 논문으로 나누어 학술지에 발표하고, 향후 단행본 저술에 한 부분으로 포함시킬 계획이다. <서계 박세당의 <<대학사변록>> 검토>, <서계 박세당의 <<중용사변록>>에 대하여>, <박세당의 <<논어·맹자사변록>>과 김창협의 비판> 등이 논문으로 발표될 예정이고, 향후 이 논문들에 <<사변록>> 시비의 전말과 노소 양측의 입장, 그리고 윤휴 등의 ‘탈주자학’적 경서 해석과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한 연구 등을 더하여 조선시대 ‘사문난적’ 시비에 관한 저서를 저술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연구의 일부이고 등재지가 아니라서 따로 사사표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본 연구와 관련하여 <<맹자사변록>>에 나타난 호연지기론에 대한 박세당의 해석과, 그에 대한 김창협의 비판을 다룬 <<논사변록변>의 호연지기론에 대한 고찰>(<<기전문화연구>>34, 2008, 6)을 학술지에 발표했고, <서계 박세당의 <<대학사변록>>에 대한 검토>를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발표했다(제8회 연구발표회, 2009, 2). 후자는 사사표기를 하여 등재학술지에 게재할 예정이다.
  • 색인어
  • 사변록, 서계, 박세당, 농암, 김창협, 노론, 소론, 사문난적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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