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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대 백제와 남북조의 관계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우수논문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7-325-A00015
선정년도 2007 년
연구기간 1 년 (2007년 12월 01일 ~ 2008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박윤선
연구수행기관 한국역사연구회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기존 연구에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조의 풍부한 대외관계 기사를 주로 위덕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경향이다. 본고에서는 기존 연구와 관점을 조금 달리하여 백제와 중국 남북조 각국의 관계를 당시 국제정세와 연관하여 대외관계의 측면에서 구체적인 양상 복원에 힘을 기울이고자 한다. 위덕왕은 백년 가까이 중단되었던 북조 국가와 교류를 재개했을 뿐만 아니라 남조 진나라와의 교섭 보다 더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존의 백제왕들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남조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고수하였던 사실에 비할 때 매우 획기적인 사실이다. 그러면 왜 이때 백제는 북조왕조들과 교류를 재개하였고, 또 계속 빈번한 교류를 이어나갔던 것일까? 이에 대한 추론을 시도하였다. 이어서 위덕왕대 백제가 남북조와 전개해 가는 외교과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북제·북주·수, 그리고 진의 입장과 백제의 입장을 함께 고려하여 이해하고, 백제가 가진 남북조에 대한 입장 차이를 고찰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를 통하여 기대되는 효과는 다음과 같다. 기대효과를 위덕왕대라는 6세기 후반 시기 백제 역사의 조명이라는 측면과 백제의 외교사 전개의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겠다. 첫째로, 위덕왕대는 백제 외교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시기로써 이에 대한 주의 환기가 기대된다. 위덕왕은 백제 중흥의 영주 성왕과 그 어느 시기보다 집중적으로 신라에 공세를 퍼부었던 무왕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백제 군주였다. 위덕왕대인 6세기 후반에 백제를 중심으로 한 삼국 외교관계의 구도는 커다란 변화를 겪는 시기였다. 즉 백제는 신라와 100여 년 동안 지속해 왔던 우호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적대적인 관계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양국관계는 백제 멸망 때까지 더욱 심화되어 간다. 아울러 기존에 빈번한 무력충돌이 이어졌던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그 성격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채 소강상태에 돌입하였다. 백제가 신라와의 대결에 집중한 까닭이다. 한편 신라는 한강유역 점령을 통해 당시 그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고구려, 그리고 과거 그 지역의 소유자였던 백제와 대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삼국관계는 이제 삼국 각축의 시대로 변화하였는데, 그 변화는 위덕왕 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백제 외교사뿐 아니라 삼국 관계의 역사에서 삼국 역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이 시기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을 통해 위덕왕대 백제외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힘과 동시에 위덕왕대 백제외교의 의미에 대한 환기가 기대된다.
    둘째, 위덕왕대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효과가 기대된다. 외교사 연구를 통하여 백제 역사 자체에 대한 조명과 복원을 꾀하는 것이다. 위덕왕대 백제는 주변 국가와의 교류가 매우 활발하였다. 백제본기 위덕왕대 기사 약 27건 가운데 위덕왕의 즉위와 사망, 그리고 천문관련 기사 등 7건을 제외한 나머지 20건의 기사가 모두 외국과의 교류기사이다. 위덕왕대 백제 내부 사정에 관한 기사는 전무하지만 활발한 대외교류를 통하여 추론해 보건대 위덕왕대는 이렇게 대외교류를 진행시킬 수 있을 만큼 안정된 왕권에 기반하고 있었다. 외교 연구의 심화는 간접적으로나마 백제 자체 역사 복원에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셋째, 본 연구는 그간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백제 교류 당사국들, 즉 북조의 북제·북주·수, 그리고 남조의 진나라 내부 정황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백제가 교류하였던 국가, 즉 위덕왕대 교류국가였던 북조의 북제·북주·수와 남조의 진나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힘으로써 양자간 교류의 성격을 밝힘과 동시에 남북조의 외교 상대국이었던 백제 역사 이해의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넷째, 자료 개척의 효과가 기대된다. 이는 상기 기대효과로 지적한 내용과 관련되는 기대효과이다. 절대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의 어려움을 겪는 한국 고대사 영역에서 백제사 관련 자료 환경은 가장 열악하다. 위덕왕대 자체에 관한 연구자료가 부족하지만, 외교관계 자료를 통하여 위덕왕대 백제 내부사정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한 백제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외교 상대국에 대한 이해를 넓힘으로써 거꾸로 그들과 교류하였던 백제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수준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위덕왕대 백제가 교류하였던 남북조 각 왕조와의 교류 기사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통계적으로 분석하며, 각각의 교류기사의 의미와 전체 교류 양상의 성격을 파악하고자 한다. 먼저 1장에서는 백제와 북조의 관계로 1절에서 백제와 북조왕조와의 교류가 재개되는 배경을 살펴보았다. 개로왕대 백제는 고구려 견제를 목적으로 북위와 손을 잡고자 하였으나 북위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이 때 교류시도는 단발에 그쳤다. 그리고 이후 백제는 남조왕조들하고만 교류를 계속해 왔다. 그런데 위덕왕은 돌연 북제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위덕왕대 백제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커다란 변화를 살펴보면, 첫째 백제가 한반도내에서 고립하게 되었으며, 두 번째 신라가 남북조와 직접 교통할 길이 열리면서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세 번째 백제가 북조와 교류를 재개하였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 변화는 모두 백제의 한강유역 회복과 상실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앞의 두 가지 사실은 백제의 북조와 교류 재개, 그리고 북제에 이은 북주·수 등 북조 왕조들과 밀접한 관계 유지에 자극으로 작용하였다. 백제가 한강유역을 회복하였으나 결국 신라에게 빼앗기게 되는 결정적 배경에는 고구려 서북경에서 북제의 압박이 있었다. 또 5~6세기 고구려의 남진정책 적극화가 가능했던 것은 고구려와 북중국의 제세력과의 장기간에 걸친 평화가 전제조건이었다. 고구려 서북쪽 국경의 상황은 남쪽 경계에 대한 고구려의 태도를 결정짓는 주요한 조건이 되어 왔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한반도에서의 고립이라는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신라와 효과적으로 대적하기 위해 고구려를 견제하는 방책으로 북제와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장 2절에서는 백제와 북제와의 교류 양상, 1장 3절에서는 북주·수와의 교류 양상을 분석하여 정리하였다. 북제는 북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했으며, 지리적으로도 북주에 의해 서쪽 경계가 막혀 주변 국가들과 교류에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백제가 북제에 사신을 처음 파견한 567년 당시에는 신라와 고구려마저 북제와의 교류를 중단했던 시기였다. 북주·진과 함께 중국대륙에서 정립(鼎立)하고 있던 북제가 뚜렷한 후원세력 없이 북주·진의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일은 절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렇듯 백제와 북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양국은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으나 북제를 향한 북주와 진의 공세로 인하여 양국관계는 더 진전되기 어려웠다. 북제가 멸망하고, 북주와의 접촉이 가능해진 후에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적극적으로 북주외교에 나섰고, 수가 건국되자 의욕적으로 수와의 교류를 진행시켰다.
    2장에서는 남조의 진과의 관계를 다루었는데, 1절에서는 논란이 되어온 562년 진의 백제왕 책봉기사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때 책봉은 백제왕뿐 아니라 고구려왕에게도 행해지며, 송·제·양의 남조 왕조들이 창건 직후 행하였던 신왕조 성립을 자축하고 주변국가에 선포하는 의미를 가진 책봉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이 기사에서 백제왕의 이름이 잘못 기록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대개 주변국가의 사절이 오기도 전에 각국에 대한 신정보가 없이 책봉을 행하다 보니 일어나는 일로써, 송·제·양의 전대 왕조들에서도 흔히 있어온 바이다. 이 기사에서 주목할 것은 책봉주체인 진의 의도로, 진이 책봉한 국가가 백제와 고구려뿐이라는 점에서 진에게 백제와 고구려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진이 끝내 위덕왕을 책봉하지 않은 것은 당시 어지럽던 진의 국내외정세와 아울러 백제의 북조왕조들과의 밀접한 교섭에 영향받은 것이라 여겨진다.
    2장 2절에서는 백제와 진의 교류 양상을 분석하고 정리하였다. 567년 백제가 처음으로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진뿐만 아니라 북제에도 사신을 파견하고 있으며 577년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자 또한 진과 북주 양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최초의 사신파견과 중국대륙에서 격변이 있는 시점의 사신 파견에서 남북조 양쪽 모두의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려는 위덕왕의 능동적인 자세가 엿보인다. 백제는 진에 대한 정보에 어둡지 않을 만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조와는 더욱 밀접히 교류하여 북조의 상황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고구려의 관심을 남쪽으로 돌리지 못하게 막고자 하였다. 남북조관계를 적절히 이용하여 한반도내에서 신라에 대적하는데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외교관계에서 의도하는 바는 매우 다양한 측면이 있을 것이나 본고에서는 위덕왕대 외교에서 북조 왕조의 등장과 거기서 그치지 않은 밀접한 교류에 주목하고 이러한 상황이 전개된 이유에 대한 한 가지 가능성을 제기한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 한글키워드
  • 위덕왕,남조,북조왕조와 교류재개
  • 영문키워드
  • Southern Dynasties,King Weduck,Reopening of interchange with Northern Dynas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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