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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국의 흑인 건국자들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9-327-A00099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1 년 (2009년 11월 01일 ~ 2010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이영효
연구수행기관 전남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미국 역사학계에서 1990년대는 건국 세대 즉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에 대한 연구가 부흥한 시기였다.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존 애덤스와 같은 건국 세대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매우 높아서 이러한 추세를 ‘건국자 유행(founder's chic)’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관심은 엘리트 백인 건국 세대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흑인 건국자들의 삶과 세계관, 자유 청원과 인종 정의 실현 노력, 그리고 초기 노예제폐지운동에 남긴 유산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수 년 전부터 흑인 건국자들에 대한 역사가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주로 인종 정치(racial politics)의 전개, 흑인 급진주의 사상과 활동, 그리고 혁명기 및 혁명 이후 시기 공적 정치 사회담론에 대한 흑인들의 관점과 역할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사업가이자 노예제폐지 운동가였던 제임스 포르텐(James Forten)과 목사 르뮤엘 헤인스(Lemuel Haynes)에 대한 주요 전기가 출판되었고, 리차드 알렌(Richard Allen) 주교와 폴 쿠페(Paul Cuffe)에 대한 새로운 연구도 이어졌다. 특히 로이 핑켄바인(Roy E. Finkenbine)과 존 세일런트(John Sailant)의 지휘 아래 진행된 “반(反)노예제 흑인 저술 프로젝트(Black Antislavery Writings Project), 1760-1829”는 혁명기와 초기 건국기에 미국 흑인들이 노예제, 인종, 흑인 정체성에 관해 저술한 것을 모아 출판했다. 이 연구는 데이비드 데이비스(David Brion Davis)가 중요한 미국 흑인사 연구사료로 평가했던 5권짜리 <흑인 노예제폐지론자 저술 사료(Black Abolitionist Papers)>의 후속편에 해당된다. 또한 2007년에 ‘윌리엄 앤 메리 쿼털리 (William and Mary Quarterly)’ 저널에는 ‘흑인 건국자들(black founders)’을 주제로 개최된 포럼의 주요 논문들이 게재되었다.
    흑인 건국 세대는 다양한 인물과 사상을 내포한 광범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흑인 건국자들은 혁명이후 자유 흑인 사회에서 다양한 제도를 구축하고 공동체를 건설하여 인종적 정의를 성취하는데 헌신한 지도자들이었다. 이들 다수의 무명인들은 무엇보다 인종 차별을 개선하는데 헌신했고, 그들의 투쟁은 향후 수십 년간 미국 흑인의 저항을 고무했다. 또한 178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 북부와 남부의 흑인들은 부상하는 자유 흑인 공동체들을 지탱하기 위해 일련의 자율적 제도들을 건설했다. 자유흑인들은 각 지역별로 독립된 교회와 학교, 상조회, 프리메이슨 지부, 보험, 상거래 조직 등을 만들고 인종 차별적인 관습과 법의 홍수 속에서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었다. 흑인 건국자들의 자발적인 조직은 18세기 말에 소위 ‘흑인 저항 대중(black counter-public)’으로 일컬을 수 있는 세력집단을 만들려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를 위해 팸플릿, 신문 광고, 법정 소송, 교회 설교, 집회연설 등 다양한 매체와 방법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더 나아가 초기 미국 공화국의 가치와 제도 및 정치 이념에 대한 저항 담론을 생성하고 전파했다.
    본 연구는 그 동안 미국 공화국 건설에 기여한 백인 엘리트 건국자들의 위업과 명성에 눌려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던 흑인 건국자들의 존재와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고 그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새로운 공화국 건설 시기에 흑인들은 노예노동에 대한 보상을 청구하고, 프리 메이슨 지부를 결성하여 인류 평등의 이념을 추구하고, 미국 ‘시민’으로서 워싱턴의 서거를 애도하고,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의 역사를 연구하고 아프로-아메리칸의 정체성을 탐구했다. 특히 흑인 급진주의자들은 ‘저항 대중’을 구축하고 공공 영역(civic space)에서 인종적 억압에 맞서는 대항 내러티브(counter narrative)를 발전시켜 나갔다. 따라서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는 건국 초기에 미국 흑인들이 벌인 다양한 정치 사회활동과 인쇄매체를 활용한 인종 정의 담론을 미국 건국 유산의 일부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혁명기와 건국 초기 미국 역사에 대한 국내 연구도 백인 건국자들의 사상과 정치활동에 초점이 맞추어 있었기 때문에, 본 연구는 자유흑인 공동체를 발판으로 흑인 저술가들과 활동가들이 공화국 건설에 기여한 바를 밝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사실 불과 수 년 전에 미국에서 부각된 연구 주제인 ‘흑인 건국자들(black founders)’이라는 개념에 주목한 것이다. 그 동안 미국사학계에서 미국혁명의 유산은 오롯이 토마스 페인, 패트릭 헨리, 토마스 제퍼슨 등 백인 건국의 아버지들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미국 흑인사 연구가 노예제, 흑인 공동체, 민권운동 등의 경계를 벗어나 다양한 주제로 확산되면서, 18세기 말 독립전쟁을 전후한 시기 해방노예들, 자유흑인들의 활동에도 새로운 관심이 주어졌다. 특히 이 시기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가장 많은 자유 흑인이 등장한 시기였고, 그들의 활동 반경 역시 미국에 한정되지 않고 아이티, 캐나다, 영국, 아프리카 등 대서양을 횡단하는 특징을 보였다. 일부 자유흑인은 영국에 건너가 노예무역폐지운동에 앞장섰고, 일부는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 건너가거나 서인도제도에서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본 연구는 미국을 떠나 이주한 흑인들이 아니라 최초의 공화국을 건설한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자발적 제도와 공동체를 구축하고 백인 건국자들에 맞서 미국 혁명 이념의 실천을 요구했던 흑인들의 이념과 활동을 드러내고 평가하고자 한다. 본 연구 결과는 소위 ‘흑인 건국자들’이 아프리카 후예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는데 헌신했는지, 아니면 그들의 역할에 대한 역사가들의 최근 기대와 평가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도와줄 것이다. 또한 이 연구는 미국 혁명기, 건국기의 역사 연구 패러다임을 확장하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미국 흑인사 연구에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18세기말과 19세기 초의 시대적 의의를 미국 공화국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흑인의 관점에서 되돌아보고 재평가하는데 공헌할 것으로 기대한다.
  • 연구요약
  • 혁명 이후 미국에서 흑인 저항 담론이 형성된 것은 흑인 저술가들과 종교지도자들의 공헌이 컸다. 공화국 초기 즉 1790년대부터 ‘역사적 감각’을 추구한 흑인들이 성경과 고대 역사서를 인용하며 이집트 등 아프리카 역사와 그 공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제이콥 오손(Jacob Oson)과 같은 흑인 저술가들은 백인 건국자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를 물색하여 공화국 건설의 안내판을 삼으려 한 것처럼 흑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숙고하기 위해 역사를 이용했다. 또한 많은 흑인 건국자들에게 종교는 저항활동의 토대가 되었다. 그들은 성경 담론을 통해 백인들의 위선과 이념적 모순을 지적하고 자신들의 투쟁을 정당화했다. 흑인 목사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선민’으로 정의하고 특히 출애급의 이야기를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신의 정의 실현을 암시하는 것으로 널리 활용했다. 흑인 메이슨주의자였던 마란트(John Marrant)는 아프리카 후예들의 신앙심을 기독교도의 모범이라고 설교했다. 따라서 이 연구는 1790년대의 리차드 알렌(Richard Allen)을 비롯하여 1820년대의 데이빗 워커(David Walker)에 이르기까지 흑인 종교지도자, 팸플릿 작성자, 문인 등 흑인 저술가들과 활동가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흑인 건국자들은 또한 흑인 이주에 대한 담론을 시작했다. 흑인 건국세대는 18세기 말에 ‘아프로-아메리칸’의 정체성 그리고 대서양 세계에서 흑인의 소속문제에 대면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가장 중시했던 것은 반드시 미국인일 필요는 없는 ‘자유’였다. 만약 미국이 흑인의 자유를 거부한다면, 아프로-아메리칸 개혁자들은 구원의 가능성을 대서양 지역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었고 실제로 찾았다. 포르텐과 알렌 등 소위 필라델피아의 흑인 엘리트들은 19세기 동안 여러 차례 아프리카로, 아이티로, 심지어 캐나다로의 이주 계획을 지지했다. 흑인들의 이산민(diaspora) 사고를 잘 보여주는 것은 1790년대 초 필라델피아 흑인들이 쓴 이주 청원서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릴 2차 대륙회의를 겨냥하여, 이들은 시에라리온이라는 새로운 영국 식민지로 흑인이 이주하는 것을 연방 정부가 지원해달라고 요구했다.
    본 연구에서 흑인 건국자들의 역할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부분은 미국 흑인의 합법적인 시민권을 주창한 언설과 행동이다. 개리 내쉬(Gary B. Nash)는 이를 ‘혁명 안의 혁명’으로 정의했다. 흑인 지도자들은 미국 혁명의 평등 이념의 수사에 영감을 받고 미국 공화정의 현실에 대한 실망감을 혁명적 용어, 상징, 그리고 개념들을 재전유하며 드러냈다. 흑인을 미국 시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시민’ 담론과 인종 개혁 의지는 이후 노예제폐지론자들과 근대 민권 개혁가들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흑인 건국자들은 미국 혁명 이념의 성취가 아프리카 후손들뿐만 아니라 미국 국가 자체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흑인 건국자들은 인쇄 매체, 연설과 설교, 공적 시위를 통해 가열된 ‘인종’에 관한 국가적 어젠다의 공동 창설자들이었다. 자유흑인들은 팸플릿과 같은 인쇄물을 초기 자유 투쟁 및 인종적 정의를 위한 싸움의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했다. 뉴포트, 보스턴, 필라델피아에서는 1780년대와 1790년대에 자유흑인들이 도서관 모임, 토론 서클, 문학 클럽 등을 조직하여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을 무력화하고 흑인종의 자각 능력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자유 청원운동은 주로 중부 대서양 주들의 법정에서 사법적 행동주의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존 브룩(John L. Brooke)은 초기 미국 사회를 “공적 영역에서의 의사소통 권위가 유동적인 세계”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예제 지지담론의 권력을 인정하면서도 미국의 공적 영역에서 노예제에 비판적인 목소리에 상당한 힘이 실려 있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흑인 건국자들은 자신들을 흑인사회의 공적 영역에 가두지 않고 인종적 정의에 관한 미국사회 주류 논쟁에 가담했다. 혁명 이후 흑인 건국자들은 신생국 미국의 공화주의적, 자유주의적 이념이 사유재산의 수호를 주장하는 노예 주인들의 이기심이 아니라 노예제폐지와 권리 평등이라는 자신들의 주장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1790년대와 1800년대 초에 전개된 미국의 인종 정치에서 흑인 건국자들이 인종적 정의에 대해 일종의 도덕적 나침반 역할을 수행했음에 주목할 것이다. 이 시기는 새로운 인물들이 인쇄물과 풀뿌리 유권자들의 동원을 통해 미국 정치의 장에 들어가려 했던 시기였다. 알렌, 포르텐, 홀 등은 공식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흑인 공동체 전체를 위해 발언하고 미국 대중에게 노예제의 부도덕성을 설득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정치적 담론과 도덕적 담론을 연계시킨 일종의 정치평론가들과 유사한 역할을 했다.
  • 한글키워드
  • 인종 정치,대항 내러티브,흑인 급진주의,자유 청원,흑인 건국자들,노예제폐지론,저항 대중
  • 영문키워드
  • black founders,racial politics,abilitionism,counter narrative,counter-public,freedom petition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미국사학계에서 미국혁명의 유산은 오롯이 제퍼슨, 메디슨, 워싱턴 등 백인 건국의 아버지들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미국 공화국 건설의 공로가 온전히 백인들의 몫은 아니었다. 자유 흑인의 수가 급증한 18세기 말에 흑인 건국세대는 군대 복무, 정치 논쟁, 종교 조직 등에 참여하여 ‘자유와 평등’이라는 독립선언서의 건국이념에 맞게 미국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흑인 건국자들’이었다. 흑인 건국세대는 독립 전쟁에 참여하고, 프리메이슨 지부 등을 결성하여 인류 평등의 이념을 추구하고, 인종 正義와 공화국 시민의 미덕(civic virtue)에 대한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등 국가 건설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들이 주 의회에 자유 청원을 하고 노예노동에 대한 보상을 청구하며, 미국 ‘시민’에 합당한 권리와 자유를 요구했던 것은 백인 건국자들이 건국이념에 합당한 실천을 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흑인 급진주의자들은 공공 영역에서 인종적 억압에 맞서는 ‘저항 대중’과 대항 담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흑인 저술가 오손을 비롯하여 목사인 앨런, 헤인스, 존스, 프리메이슨 지도자 홀과 마란트, 그리고 필라델피아 사업가인 포르텐과 같은 많은 흑인 지도자들은 신문과 팸플릿 등 인쇄 출판의 성장에 기대어 흑인 저항담론을 만드는데 기여했다.그들은 1790년대와 1800년대 미국의 정치 무대에서 신문 투고, 연설과 설교, 저술 등을 통해 발언하고 대중에게 노예제의 억압을 알리는 일종의 도덕적 나침반 역할을 수행했다. 흑인 행동가들은 교회, 학교, 자선단체들을 조직하여 상호 단결과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는 한편, 노예 해방과 법적 평등의 문제를 공적 논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미국의 혁명적 공화주의의 유산을 다루면서 그 이념의 한계를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인종적 노예제를 존속시키는데 공모한 것을 드러냈다. 즉 미국 혁명의 올바른 유산은 ‘노예제 폐지’가 되어야 한다고 정의하고 백인 건국자들에게 혁명 이념의 실천을 요구했다.
    이들 흑인 건국세대의 이념과 행동이 신앙심과 같은 도덕적 수단을 전략으로 강조함으로써 흑인 다수의 긴급한 필요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들의 삶은 흑인 후손들의 역사에 선행했던 단순한 서막이 아니었다. 그것은 18세기말과 19세기 초의 시대적 의의를 미국 흑인의 관점에서 되돌아보고 재평가하게 한다. 이 시기동안 흑인들은 부푼 희망을 가졌었고 또한 좌절을 경험했다. 북부 주들에서 노예 해방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았고 동시에 흑인 투표권 제한 등 인종차별적인 법이 시행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해외 노예무역의 종식을 목도했지만 그것이 국내 노예무역의 증가로 이어져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뉴욕 등의 자유흑인들을 위협하는 것도 경험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흑인들은 보편적 건국이념에 더 다가서려는 활동을 전개했고, 그런 점에서 그들의 자유 청원과 시민권 주장, 그리고 노예제 반대 운동은 미국 건국의 중요한 유산의 일부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 영문
  • The heritage of American revolution has been monopolized by white founders like Jefferson, Washington, and Madison, etc, but commendation should not be reserved only for whites. Black founding generation contributed to making, inventing, and managing new republic by participating in independence war, political debates, and religious organizations, etc. Blacks petitioned for their freedom to State congress, requested payment for their slave labor, pursued equality ideology by organizing Free Mason branches and Christian denominations, asked government's acknowledgement of their citizenship, inquired Afro-American identity contemplating the history of Africa and Africans, and took the lead in antislavery movement. Black leaders devoted themselves for racial justice and black independence.
    Black radicals, especially, tried to construct black counter-public and counter-narrative against racial oppression. James Forten, Lemuel Haynes, Richard Allen, John Marrant, and Jacob Oson made their efforts to develop black resistance discourse through sermons, speeches, and writings. They performed a certain role of moral compass to inform public the vice of slavery. They pointed out the limits of revolutionary republicanism and criticized its conspiracy to maintain racial slavery. Black leaders asked white founders to properly practice the ideology and heritage of American revolution by exterminating slavery.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activism cultivated a pioneering way for black descendants in achieving slave emancipation and legal equality in American socie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미국사학계에서 미국혁명의 유산은 오롯이 제퍼슨, 메디슨, 워싱턴 등 백인 건국의 아버지들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미국 공화국 건설의 공로가 온전히 백인들의 몫은 아니었다. 자유 흑인의 수가 급증한 18세기 말에 흑인 건국세대는 군대 복무, 정치 논쟁, 종교 조직 등에 참여하여 ‘자유와 평등’이라는 독립선언서의 건국이념에 맞게 미국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흑인 건국자들’이었다. 흑인 건국세대는 독립 전쟁에 참여하고, 프리메이슨 지부 등을 결성하여 인류 평등의 이념을 추구하고, 인종 正義와 공화국 시민의 미덕(civic virtue)에 대한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등 국가 건설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들이 주 의회에 자유 청원을 하고 노예노동에 대한 보상을 청구하며, 미국 ‘시민’에 합당한 권리와 자유를 요구했던 것은 백인 건국자들이 건국이념에 합당한 실천을 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흑인 급진주의자들은 공공 영역에서 인종적 억압에 맞서는 ‘저항 대중’과 대항 담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흑인 저술가 오손을 비롯하여 목사인 앨런, 헤인스, 존스, 프리메이슨 지도자 홀과 마란트, 그리고 필라델피아 사업가인 포르텐과 같은 많은 흑인 지도자들은 신문과 팸플릿 등 인쇄 출판의 성장에 기대어 흑인 저항담론을 만드는데 기여했다.그들은 1790년대와 1800년대 미국의 정치 무대에서 신문 투고, 연설과 설교, 저술 등을 통해 발언하고 대중에게 노예제의 억압을 알리는 일종의 도덕적 나침반 역할을 수행했다. 흑인 행동가들은 교회, 학교, 자선단체들을 조직하여 상호 단결과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는 한편, 노예 해방과 법적 평등의 문제를 공적 논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미국의 혁명적 공화주의의 유산을 다루면서 그 이념의 한계를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인종적 노예제를 존속시키는데 공모한 것을 드러냈다. 즉 미국 혁명의 올바른 유산은 ‘노예제 폐지’가 되어야 한다고 정의하고 백인 건국자들에게 혁명 이념의 실천을 요구했다.
    이들 흑인 건국세대의 이념과 행동이 신앙심과 같은 도덕적 수단을 전략으로 강조함으로써 흑인 다수의 긴급한 필요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들의 삶은 흑인 후손들의 역사에 선행했던 단순한 서막이 아니었다. 그것은 18세기말과 19세기 초의 시대적 의의를 미국 흑인의 관점에서 되돌아보고 재평가하게 한다. 이 시기동안 흑인들은 부푼 희망을 가졌었고 또한 좌절을 경험했다. 북부 주들에서 노예 해방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았고 동시에 흑인 투표권 제한 등 인종차별적인 법이 시행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해외 노예무역의 종식을 목도했지만 그것이 국내 노예무역의 증가로 이어져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뉴욕 등의 자유흑인들을 위협하는 것도 경험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흑인들은 보편적 건국이념에 더 다가서려는 활동을 전개했고, 그런 점에서 그들의 자유 청원과 시민권 주장, 그리고 노예제 반대 운동은 미국 건국의 중요한 유산의 일부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사실 불과 수 년 전에 미국에서 부각된 연구 주제인 ‘흑인 건국자들(black founders)’이라는 개념에 주목한 것이다. 그 동안 미국사학계에서 미국혁명의 유산은 오롯이 토마스 페인, 패트릭 헨리, 토마스 제퍼슨 등 백인 건국의 아버지들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미국 흑인사 연구가 노예제, 흑인 공동체, 민권운동 등의 경계를 벗어나 다양한 주제로 확산되면서, 18세기 말 독립전쟁을 전후한 시기 해방노예들, 자유흑인들의 활동에도 새로운 관심이 주어졌다. 특히 이 시기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가장 많은 자유 흑인이 등장한 시기였고, 그들의 활동 반경 역시 미국에 한정되지 않고 아이티, 캐나다, 영국, 아프리카 등 대서양을 횡단하는 특징을 보였다. 일부 자유흑인은 영국에 건너가 노예무역폐지운동에 앞장섰고, 일부는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 건너가거나 서인도제도에서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본 연구는 미국을 떠나 이주한 흑인들이 아니라 최초의 공화국을 건설한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자발적 제도와 공동체를 구축하고 백인 건국자들에 맞서 미국 혁명 이념의 실천을 요구했던 흑인들의 이념과 활동을 드러내고 평가했다. 본 연구 결과는 소위 ‘흑인 건국자들’이 아프리카 후예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는데 헌신했는지, 아니면 그들의 역할에 대한 역사가들의 최근 기대와 평가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도와줄 것이다. 또한 이 연구는 미국 혁명기, 건국기의 역사 연구 패러다임을 확장하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미국 흑인사 연구에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18세기말과 19세기 초의 시대적 의의를 미국 공화국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흑인의 관점에서 되돌아보고 재평가하는데 공헌할 것으로 기대한다.
  • 색인어
  • 흑인 건국세대, 자유 청원, 노예제 반대 운동, 혁명적 공화주의, 프리메이슨 주의, 흑인 급진주의, 흑인 저항 대중, 대항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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